2010년 5월 25일 화요일

사람이 자원인 나라

사람이 자원인 나라

일요일 아침에 방송되었던 장학퀴즈에는 당시로는 상당히 선진적이었던 PR광고가 항상 나왔다. 선경그룹의 광고였는데, 가브리엘의 오보에에 맞추어 나뭇가지에 걸린 동네 꼬맹이들 연을 꺼내주는 할아버지 에피소드도 기억이 나고,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로 시작하는 백범 김구선생의 《백범일지》출간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사람이 자원인 나라라는 카피가 그 때쯤부터 시작되었는지를 확실하게 기억하기에는 그 때는 좀 어렸다. 하지만 석유가 부존되어있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정유라는 업종까지 소화해 나는 기업이 내걸기에 적절한 카피라는 사실은 확실한 것 같다.

사람이 무한정으로 공급되는 자원인 나라

1990년대 초반 KBS에서 한차례 방송되었던 국민방위군사건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51년 겨울 100일 동안 자그마치 10여만 명이 얼어 죽거나 굶어 죽었다. 소심한 소년에 불과했던 나는 군대에 끌려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끔찍한 일 아닌가. 방송에는 또한 그런 참혹한 일이 벌어지고 있던 그 시점에 부산에서는 정치인들이 횡령을 저질러 국민방위군에게 갈 물자가 정치인(?)의 뱃속으로 사라지고 있었고, 또 문제가 되자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빨갱이 드립을 쳤다는 것이 대비되어 나왔던 것 같다. 이장로가 대통령인 시절이 형편없는 시절이었다는 것을 다시 이야기하여 무엇 하랴. 세월이 흘러 한홍구 선생의 《대한민국사》에서 국민방위군사건을 다룬 글을 읽게 되었다. 거기에는 “사람이 무한정으로 공급되는 자원으로 분류될 때 사람의 가치는 땅에 떨어지는 법이다.”라는 구절이 적혀있었다.



뭐 괴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공계를 졸업한 젊은이들이 큰 회사에 들어가면 적당한 월급을 주면서 젊었을 때 뼈 빠지게 부려먹다가, 시간이 지나 그들이 가진 기술이 생산성 경쟁이 뒤쳐지게 되면 해고된다는 말이 떠돌았었다. 확실하지도 않는 예전 기억을 들먹일 것도 없고, 이공계 졸업생이라는 특별한 경우를 예로 들 것도 없다. IMF사태 다음으로는 해고가 얼마나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1950년대 대한민국은 사람이 무한정으로 공급되는 자원이었던 나라였고, 1990년대 대한민국에는 사람이 자원이라는 카피가 받아들여지는 사회였다. 그러나 40년이 지나도록 사람이 무한정으로 공급되는 자원이었던 나라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2000년대가 되자 사람이 무한정으로 공급되는 자원인 나라가 백색테러단체의 옷을 벗고, 보다 세련된 경쟁이데올로기라는 허울을 뒤집어쓰고 다시 나타났을 뿐이다.

진정 사람이 귀중한 자원이라면, 노동·토지·자본 중에서 오로지 사람만이 생산 가능한 노동에 가장 큰 가치를 뒀어야 하지 않았을까? 진정 사람이 귀중한 자원이라면, 오로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창조적인 활동에 보다 더 투자를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진정 사람이 귀중한 자원이라면, 인간의 노동이 최적화될 수 있는 삶의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서 복지에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하지 않았을까? 혹시 진심은 토지가 자원인 나라 아니었을까?

하지만 사람이 자원인 나라에서는, 불행하게도 사람자원이 다른 사람자원으로 대체 가능했다. 누구도 숙련된 노동에 대하여 추가적인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고, 그 결과 그 작은 차이가 만든다는 명품이 탄생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언제나 똑같은 예비품으로 교체 가능한, 균질한 집단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안타깝게 그 집단 안에서 사람자원의 공급이 수요보다 좀 더 많이 제공되고 있다.

사람이 무한정으로 제공되는 자원인 나라가 나빴듯이, 사람이 자원인 나라도 나쁘다. 게다가 사람이 자원이라는 말에는 그 자원을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가에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자원을 잘 쓰겠다는 생각에서 발전하여 사람을 키워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 사람을 키운다는 말이 지금과 같이 미친 것 같은 경쟁교육을 통해서라면, 그래서 유휴자원을 가지는 특정 계급에서만 자원이 재생산되는 구조라면, 그런 인재육성에 동의할 수는 없지 않는가. 게다가 자원이 될 기회를 가지지도 못한 채, 자원이 되지 못했다고 버림받아야 한다면, 만약 그런 의미의 사람이 자원인 나라라면, 그것이 왜 나라이겠는가? 맹자의 민본주의적인 가치고, 서구의 공화국의 가치도 여기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단지 도적떼의 위계질서 말고 다른 어떤 것을 찾아볼 수 있겠는가?

사람이 자원인 나라라는 말은 더 이상 달콤하게 들리지 않는다. 사람이 자원인 나라에서는 사람이 목적이 된다는 원칙적인 말을 꺼내지 않더라도, 그 카피는 달콤하지 않다. 그 자원이 제품의 원료와 같이 균질한 자원을 뜻한다면, 더 말할 것도 없다. 혹시나 기업의 입장에서 유능하고 특별한 인재를 뜻하는 자원이라 하더라도, 그런 자원이 될 기회가 특히나 불균등하게 제공되어 키워진 자원이라면, 적어도 내가 보기에 그건 쓰레기다.



국민학교 4학년 때, 국민교육헌장 대신, 김구선생의 그 글을 외웠다면, 지금 우리나라가 좀 더 나은 모습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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