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8일 화요일

배우고 알게 된다는 것

학회가 끝나고, 로마 시내를 구경하기 위해 일행과 헤어졌다. 학회장 근처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밀라노에 온 또 다른 학회 참석자와 만나게 되어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양반 역시 기차를 타려면 시내까지 가야 하니까.

내가 주제로 잡고 있는 부분은 간단한 행렬로 그 문제가 기술될 수 있다. 즉, 간단한 선형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학회에서 사람들이 그 주제로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나는 이것이 간단한 선형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무엇이 문제이길래 이것이 계속 이야기되는지. 그 사람은 전자 전공이었기 때문에, 내가 잘 모르고 서툰 부분들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의 대답은 요약해서 이야기하자면, “감지기는 자극에 선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선형성을 줄이기 위한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보정계수나 식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진부한 표현으로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풀고 있었던 것은 그렇다면 연습문제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니까. 하하.


수학으로 계산되는 깔끔한 모델에 심취해 이를 좋아했었는데, 그것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기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끔 쓰는 state of art라는 용어, 기술적 노하우들이 쉽게 전달이 안되는 이유는 그런 비선형성들이 이론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기술들은 한 사람의 경험자에 의해서 유지될 수도 있겠지만, 다양한 분야의 경력자들을 조화롭게 조직하는 것을 통해서만이 유지될 수도 있다. 외국의 석학을 모셔와 강의를 맡긴다는 기획들은, 재대로 된 기술적·학술적 경험을 해 본 사람의 아이디어는 결코 아닐 것이다. 미국의 연구기관에 많은 외국인들이 활약하고 있지만, 그들이 고국에 돌아가서 같은 수준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단지 기자재가 빈약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기술과 과학은 다르다고. 맞다. 합리적인 의문을 품고, 객관적인 실험과 관찰을 통해 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체계적인 지식을 쌓아가는 방법인 과학은, 뭔가 멋진 것을 만들어 내어야 할 것 같은 기술과는 격이 다른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기술은 객관적인 실험과 관찰의 다른 말이다. 실재로 유명한 과학자들 중에는 의문을 풀기 위해 스스로 기구를 고안하여 실험을 한 이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그런 기구들의 성능은 당대의 기술적 수준에 의해 제한된다. 의문->관측·실험->지식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관측과 실험이 빠지게 되면, 의문은 신화가 되고, 종교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된다.

요즘에도 대학에서 실험·실습이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언론만 보면 요즘 대학생들은 그저 취업준비에 미쳐서 영어와 쉬운 학점에만 목멘다고들 한다. 그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대학은 이미 현장에서 활동할 사람들을 키우는 기관이 아니라, 단지 다시 한 번 젊은이들의 카스트를 파인튜닝 해주는 기관으로 변질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뭔가를 배우고 알게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스템의 비선형성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2011년 2월 1일 화요일

難作人間識字人

박노해의 손무덤을 다시 읽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다시 읽고 울어버리련다.



최규석의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가 처음 게시판에 올라왔을 때,

예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양성평등을 주장하던 이들이 보여줬던 적대감을 기억한다.

주류가 노무현에게 보여줬던 그 짜릿한 개무시의 싸지르가즘.



네가 결코 내 입장이 될 수 없고,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

인간은 가장 잔인해 질 수 있다.



매천야록을 시간이 걸려 마저 다 읽었다.

難作人間識字人

흉강을 후벼 파 내는 듯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