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5일 토요일

집에 들렀다

부모님 댁에 잠시 들렀다. 4년 전 귀농하신 부모님께서는 이제 꽤 규모가 있는 농장을 꾸리셨다.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 간 그 날은 마침 말리려고 널어 두었던 나락을 정미하러 보내야 하는 날이었다. 마을 입구 들어오는 길에 족히 100 m는 되게 펼쳐 놓은 나락을 포대에 옮겨 담아야 했다. 농협으로 보내는 쌀 자루는 처음 보는 종류였다. 표시 중량 950 kg. 크기도 물론이거니와 형태도 정육면체의 독특한 모양이었다.

농촌의 도구들은, 어떤 공정에 특화된 형태를 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1년에 딱 한 번, 딱 그 때 사용하기 위한 것들이다. 바닥에 펼쳐놓은 쌀을 퍼 담는 데에도 쓰레받이 같이 생긴, 다른 용도로는 도무지 쓰일 데가 없을 것 같은 용구를 사용했다. 950 kg이 들어가는 포대는 인력으로는 옮길 수 없다. 그러면 쌀을 옮기는 사람이 움직여야 한다. 할머니와 부모님과 나, 동생 이렇게 5명이 달라붙어 왔다갔다 하면서 포대에 쌀을 모았다.

가족들과 함께 이렇게 육체노동을 하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너는 저 위에서부터 치워라.”, “포대는 이렇게 잡는거다.” 그 자리에서 작전을 세워가면서 부산스레 왔다갔다 하다 보니, 노래 없이도, 술 없이도 흥이 났다. 중간 쯤부터는, 이미 해 치운 일을 보는 것도 즐거움이었다. 우리 가족이 일하는게 신나 보였는지, 그 즈음부터는 동네 아버지 친구분도 오셔서 일을 거드셨다. 아저씨는 아버지가 좀 부러우셨던 걸까. “옛날 같았으면, 인제 농사는 자식들 시키고, 가끔 논에 물이나 대고, 소 몰고 풀 먹이고 하면 되는데.”라는 농에 아버지는 허허 웃으셨다.

한참 걸릴 것 같았던 작업은 생각보다 빠르게 2시간 만에 끝났다. 그 950 kg짜리 포대는 6개가 나왔다. 트랙터로 포대들을 용달차 두 대에 옮겨 싣고, 아버지와 친구 분은 면 농협으로 가셨다.

고생을 함께 나눈 사람들끼리는 좀처럼 얻기 힘든 연대가 생긴다. 쌀 퍼 담는 건 그다지 힘든 노동이라 할 것도 없지만, 만약 전통사회에서 한 해 농사의 완전한 주기를 이렇게 가족들과 함께 힘든 노동을 나누며 평생을 살았다면, 그 관계는 정말 남달랐을 것이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 부모님은 삼촌·고모와 그런 관계이시지 않는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일하면서 든 작은 아쉬움. 결혼을 하고 아내와 함께 일하면 좋았을 것 같다. 부모님께서는 절대 내색하시지 않으셨지만, 은근히 바라지 않으셨을까. 지독한 가부장적 이기주의라고 몰아붙여지고 싶지는 않다. 똑같이, 장인 장모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나락을 퍼 옮기는 일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결혼을 하고, 또 가족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