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29일 수요일

매직넘버 543

뿌리와 이파리에서 나온 《눈의 탄생》을 읽었다.

지질시대는 크게 명왕누대, 시생누대, 원생누대, 현생누대. 이렇게 크게 네 시기로 나뉘어진다. 시생누대는 38억년 전부터 25억년 전까지, 원생누대는 25억년 전부터 5억 4200만 년 전까지, 현생누대는 그 이후이다. 38억년 이전 시기의 암석은 지구상에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시피하며, 이 시기를 명왕누대라고 한다. 이 책이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원생누대와 현생누대의 경계를 전후로 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지구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되는 시기이다.

현생누대의 가장 오래된 시기는 캄브리아기이다. 캄브리아기의 시작은 삼엽충의 등장 또는 비슷한 시기 특정 종류의 생흔화석이 나오기 시작하는 시기로 결정하며, 앞서 말했듯이 5억 4200만 년 전으로 정해져 있다. 그리고 100만 년 후의 퇴적암에는 엄청나게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이 “매우 갑작스럽게” 등장한다. 이와 같은 갑작스런 화석 기록의 “폭발”은 캄브리아기의 폭발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책은 그 폭발의 이유를 추적하고, 그 범인으로 “시각”을 제시한다.

다윈은 유명한 《종의 기원》에서, 캄브리아기에 갑자기 화석기록이 많아지는 것은 점진적인 자연 선택을 통해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자신의 견해를 반박하는 증거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한 적이 있고, 더하여 눈과 같은 완벽한 기관이 자연선택을 통해 만들어지기는 어려운 것 아닌가 하고 쓰기도 했다. 이 책은 다윈의 두가지 걱정을 풀어준다.

캄브리아기의 극초기에 시각을 가진 삼엽충이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러면서 포식이라는 전략이 최초로 가능해졌고, 이는 절대적인 진화압으로 작용하게 된다. 캄브리아기 초반, 캄브리아기의 대폭발이라고 불리는 그 시기동안 여러 전략들이 제시되고 시험받게 된다. 그리고 그 폭발이 끝난 이후에는 포식과 그 방어기제가 다시 균형을 이루며, 이른바 포식자와 피식자간의 평행한 군비경쟁의 시기가 열리게 된 것이다.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소소한 재미있는 사실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몇 가지 인상적인 것들을 열거해 본다.

눈은 “여러 번” 완전히 개별적으로 진화했다. 진화 계통수와 현재 눈을 가진 생물, 그리고 화석으로 발견되는 조상 생물들이 눈을 가졌는지 여부를 조사해 보면, 눈의 진화는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예를들면, 절지동물들이 이미 눈을 가지고 으스대고 있을 때, 동시대에 살던 척추동물의 조상 생물은 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척추동물의 눈은, 이후에, 절지동물의 눈과는 별개로 진화했다는 뜻이다.

콩벌레라고 알고 있는, 그 쥐며느리의 가까운 친척뻘 되는 생물이 심해에도 살고 있는데, 이 친척은 좀 크시다. Bathynomus라는 등각류의 일족이신 분인데, 이렇게 생기셨다.
책에 칼라 화보로 있는 것은 이 사진보다 좀 더 인상적인데, 이 사진에는 크기를 비교할 만한 대상이 좀 애매하기 때문에, 좀 더 친숙한 동물인 고양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다시 올려본다.
새끼 고양이가 처음에는 기겁을 하는 눈빛이 역력한데, 나중에는 신기한지 한 번 물어본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는 말이 생각난다. 여튼 이 생물은 심해저에서 청소부 역할을 하며, 전 세계 어디에서 잡히는 놈이나 다들 비슷하게 생겼다. 빛이 없는 환경에는 진화압이 작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예로 이 놈을 보여주었다.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부분 중의 하나는 책의 도입부분에서 생명의 역사를 10장으로 나누어 설명한 부분이었다. 생명의 탄생, 무기물을 이용한 에너지 획득, 광합성, 세포핵의 형성, 세포의 합체, 다세포 생물, 조직의 분화, 혈액·내장 공간의 확보, 눈의 등장 등이다. 요런 단계적이고 도식적인  설명은 기억하기 쉽다. 그런데 마지막 10단계가 뭔지는 끝까지 설명한 안한 느낌이다. 性의 탄생 정도인가?

이론상 가장 작은 카메라형 눈의 크기는 1mm정도라고 한다. 그 실재는 Thorius라는 도롱뇽 류인데, 매우 귀엽다. 웹에서 찾은 사진들이 다들 저작권에 엮히는 것 같아, 링크만 걸어놓는다.
http://www.arkive.org/thorius/thorius-macdougalli/
이름도 외우기쉽네.



좀 호들갑스럽게 서술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좀 어려운 주제인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하려면 그 정도 오바 정도는 이해할 만했다. 그리고 나름 유머도 드물게나마 있었으니까.

좀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식물 부문에 대하여서는 거의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동물 사이의 포식·피식 관계에 너무 집중을 한 나머지 식물을 포함한 생태환경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는 점이 좀 아쉬웠다.

두번째로 왜 하필 그 때 시각이 진화되어 나왔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부분은 좀 많이 실망스러웠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외부의 자극에서만 찾으려고 하는데, 사실 그에 대한 답은 이미 책에 다 설명이 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시각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몸집이 커져야 하고, 또한 시각 영상을 처리할만한 신경 네트워크가 있어야한다고까지 설명을 했다면, 그 준비가 완성된 시기가 바로 매직넘버 5억 4300만년 전이었음을 보이면 될 일이었다. 실재로 시기가 비슷하다. 태양 광도가 변했을 수 있다는 논증을 위해 성간 물질의 밀도 변화라든지 은하계에서 태양의 위치같은 설명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다음은 불확실한 부분인데, 책에서는 캄브리아기 직전의 생물들이 배회하다 우연히 포식을 하거나 죽은 시체에서 영양을 얻었을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음.. 좀 더 사실적이라면, 그 꿈틀거리는 벌레같던 생물들이, 시체가 있으면 냄새를 맡고 거기 우글우글 몰려들어 시체를 뜯어먹고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시체에 선캄브리아기의 생물들이 우글우글 달라 붙어있는 화석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뿌리와 이파리에서 나온 또 다른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생명 최초의 30억년》이라는 책인데, 이 책은 《눈의 탄생》이 다루는 시기 바로 직전까지의 생명의 진화를 다룬 책이다. 솔직히 술술 읽히는 교양서는 아니다. 《눈의 탄생》은 《생명 최초의 30억년》이 끝까지 제기하지 않았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주고 있다. 왜 생명은 그 최초의 30억년 동안 그토록 천천히 진화해왔단 말인가. 특히나 그 이후의 5억 4300만년과 비교했을 때 말이다. 그 답이 “시각”일 확률은 매우 높아 보인다.

2010년 12월 27일 월요일

이주

일단은 텍스트큐브에서 권장(?)하는 대로 블로거로 옮기도록 신청을 했다.

겁나게 후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꺼렸었는데,

국내 서비스제공자로 옮기는 것은 더더욱 내키지 않아서리.

10일날 옮겨준다고 했으니, 기다리고 있다.

2010년 12월 22일 수요일

충격과 공포

http://media.daum.net/digital/view.html?cateid=100031&newsid=20101222083025905&p=hani

폭풍 댓글을 자석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핫한 기사다.

그 분의 목표는 결국에는 종신통령인 것인가.



이탈리아 친구에게 물어봤다.
언론을 장악한 것이 베를루스코니에게 큰 유리함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하느냐?

답하되,
매체를 장악하는 것은 부수적이다. 베를루스코니가 계속 정권을 잡을 수 있는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야당들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다. 도무지 신뢰가 가지 못하는 짓만을 하고 있다. 둘째로, 국민들이 자기중심적이다. 세금을 깎아주기만 한다면, 베를루스코니를 뽑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무리 나라가 빚더미 위에 있어도.



인터넷의 글을 자의적으로 마음대로 삭제하겠다는 생각이 누구의 어깨 위에서 나왔는지는 대충 알 법하다. 하급 관리는 징계를 먹고, 상급 관리는 탄핵을 당한다는데, 방통위는 당췌 어떤 기관이길래, 걸래같은 인간이 계속 거기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 이들에 대한 탄핵소추는 법리적으로 불가능한가?



그리고
이명박이 자신의 자산과 부를 불려 줄 것이라고 믿을 만큼 지성이 모자랐다면,
최소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판단할 도덕성은 지녀야 했지 않았을까.


텍스트큐브가 세상 접는다는데, 외국에 서버를 두는, 외국계 회사의 블로그 서비스를 알아봐야겠다.
이렇게 심한 상심을 느끼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인 것 같다.



PS. 구글 어스에 바이칼호 측심 자료가 얹혀졌다.

2010년 12월 21일 화요일

잡담들

1. 두달 정도 됐나? ASS가 한나라당 인터넷 청년전위대를 만들겠다고 하더니,

요즘들어 어디든 게시판 분위기들이 묘해 보인다.



2. 한나라당이 하는 말이라면 아무리 앞뒤가 안 맞아도 무조건 믿기로 작정한 사람이 아니라면,

요즘 매체에서 나오는 내용들을 새겨 들을 사람은 몇 없을 것같다.



3. 선형대수를 공부하다가 듀얼스페이스를 마주쳤다.

1주일 정도 낑낑거리다가 이제 대충 감을 잡은 것 같다.



4. 왜 국사를 배울 때, 정부의 재정상황에 대하여는 별로 가르쳐주지 않는지 모르겠다.

고종 당시의 꼴을 보면 가관일텐데.

돈이 어디서 생기고, 어디에 쓰는가 하는 문제는, 개인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못하지만, 단체의 거의 모든 것을 말해 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5. 핵 연료봉은 어디로?



6. 어제 소호대의 돌이킬 수 없는 사랑을 들었다.

오늘도 계속 들었다.



7. 제육볶음을 만들었는데, 양파가 없어서 파만 넣고 했다.

먹기는 하겠는데, 맛이 좀 빈다.



8. 중화제국쇠망사.. 언론사의 책선전 플레이에 낚인 느낌이다.

2010년 12월 12일 일요일

몽턴 경을 신문에서 읽었다

예전에 프레시안에서 지구온난화 구라설을 발바닥에 땀나게 소개한 적이 있다. 그 때 좀 당황해 하며 쓴 포스팅이 있는데(http://jolysses.textcube.com/8), 그 때 몽턴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프레시안의 기사에 언급된 내용을 인용하면서 몽턴을 소개하게 되었다. 지금은 시스템 에러라고 그 기사가 검색이 되지 않는다. 그 기사를 처음 읽고 몽턴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철자를 몰라서 못 찾았던 것 같다. 아니면 내가 기사를 주의 깊게 읽지 않았던가.

금요일에 차이트紙에서 자칭 지구온난화회의론자들이 칸쿤 근교의 슬럼가에 가서 무슨 썰을 풀었는지 써 놓은 르뽀 기사 비슷한거를 읽었다. (http://www.zeit.de/politik/ausland/2010-12/cancun-skeptiker) 아하, 거기에 몽턴 경이 나왔다. 그런데 거기 나온 몽턴 경이 좀 우스꽝스러웠다. 그 몽턴경이 라리베르다드라는 칸쿤 근교의 슬럼가에 있는 한 학교에서 했던 행동들을 옮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몽턴 경이라는 사람이 기후변화 문제에서 진지하게 언급되기에는 객관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내가 읽은 기사가 충분히 객관적이라면, 그의 주장이 합리적 사고의 결과라고 이야기 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자, 진보매체 프레시안이, 기후변화라는 주제가 자본권력과 과학권력의 결합이 만들어 낸 거짓임을 주장하는데 사용하였던, 몽턴이란 사람의 의견을 잘 보도록 하자.



번쩍이는 흰색 셔틀버스 세대가 칸쿤에서 20km떨어진 슬럼가의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콘크리트 바닥에 달랑 건물 둘이 서 있는 허름한 초등학교에 차들이 섰다. 수백명의 학생들과 몇몇 부모들이 대표단들을 환영했다. 그 대표단은 영국자작 한명, 방금 칸쿤에서도 보았던 카자흐스탄의 UN 기후회의 대표 두명, 티파티운동 편에 서 있다고 밝힌 미국 여자 2명, 대표단 몇 명 더, 그리고 비정부기구 대표 몇 명인데, 이 비정부기구의 이름은 CFACT이다. 독일 기자도 하나 있었다. (아마 기자 자신을 말하는 듯)

질문: 작금의 기후변화에 대하여 무엇을 해야 하나?

CFACT가 뭔지 안다면,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쉽다. CFACT는 워싱턴에 본부를 둔 단체로, 스스로 “건설적인 내일을 위해” 일하는 단체임을 표방하면서, 석유산업과 함께 일하고 있다. 그들의 생각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기후 변화에 맞서 싸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될 수 있는 한 화석연료의 사용을 제한해야 한다는, 한줌의 좌파환경주의자들의 황당한 주장만큼 건설적인 미래의 도래를 방해하는 것이 없다고.

버스가 라리베르다드의 학교에 도착했을 때, 함께 여행을 온 사람들은 여러 질문을 통해 이미 몽턴 경이 기후 변화와 세계 정치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CFACT는 때때로 석유산업과의 협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명확하지 않았다. 몽턴 경은 자신이 일행 중에서는 사실상의 대변임임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몽턴 경이 자신의 세계관을 이상하게 언급할 때 말고는, 그가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그는 마르크주의 주류 매체들이 마르크스주의 정치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마르크스주의 과학자들을 부패시켜서 거대한 기후음모를 계획했다, 그 목적은 세계정복 이하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몽턴 경에 따르면, 가난한 나라들의 모든 기후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이라는 것은, 사실은 나이브한 동시대 개인들이 정말로 지원이 필요한 곳에 쓸 수도 있는 그런 지원들은, 사실은 비민주적인 UN이라는 기구의 손이 쓸 수 있는 폭력적인 한 장의 카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가 발견하고 영구사회주의라고 이름붙인 이런 현상은 거대하게 자라버렸고, 합법화할 수도 없고, 제어할 수도 없는 지배기구이다. 전형적인 예로 그가 독제자라고 이름붙인 EU를 들 수 있겠다.

이보시오, 몽턴 경! EU는 민주적인 국가들의 자발적인 연합이오. 그리고 칸쿤에는 선거로 뽑힌 정부들의 대표들이 어떤 경우에도 민주주의 이름으로 토론을 하고 있소. 자작님은 이런 반대의견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여기 기후회의에 오는 대표들 중 누구 하나라도 선거를 통해 뽑혔나? 아니요.

그러나 슬럼가 라리베르다드에 있는 허름한 초등학교가 기후변화에 대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기후변화문제에 있어서도 몽턴 경의 의견은 그의 정치적인 발언들과 비슷한 수준에 머무른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필요하다. 일군의 과학자들이 노력을 했지만, 그를 고치기 위한 모든 노력들이 별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다시 라리베르다드로 발을 옮겼고, 한편 세명의 기타연주자들이 관타나메라를 연주하는 동안 몽턴 경이 운동장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왜 아이들이 그를 환영했을까? CFACT가 학교에 조명을 달아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럼 왜 CFACT가 그런 짓을 하지? 기후보호에너지는 불필요하게 비싸지고, 그러면 전기에너지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전원을 끌 수 밖에 없어진다는 것이 그 단체의 의견이다. 그리고 CFACT의 사람들은 이런 관계를 UN-기후변화 화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

CFACT가 학교에 태양판넬을 달려고 계획했다는 이론은 잘 맞지 않는다. 그들에 따르면 태양판넬은 혐오스러운 녹색기술로 전기료를 올릴 뿐이기 때문이다. 혹은, 유럽 나라들의 기후보호정책은 이 기술들을 값싸게 만드는데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그 결과 전력망에 포함되지 못한 라리베르다드 같은 곳에는 다른 어떤 전기조명방법보다 값이 싸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로 불이 들어올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운동장을 떠나는 동안 CFACT의장 데이비드 로트바드에게 물었다. 학교에 다는 태양광 조명은 단지 작은 계획일 뿐이라고 했는데, 다른 무엇을 할 계획은 무엇인지. 라리베르다드에 대한 해법은 CFACT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CFACT가 기후변화회의의 변두리에 있는 작은 동네에서의 쇼를 위해 적절한 연결고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돕고싶다면, 구호품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어쨌든 회사를 세워야한다.

또 다른 질문이 생겼다. 이 연출의 결과는 무엇인가. 티파티운동을 한다던 그 여자 둘은 이미 전부터 CFACT쪽에 서 있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온 두 대표는 스페인어는 전혀, 영어는 거의 못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불쌍한 사람들인 라리베르다드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도 도와줘야 한다고, 나중에 말했다.



여기가 기사의 끝이다. 고백하는데, 몽턴 경의 개그콘서트 이후 부분은 번역이 힘겨웠고, 무슨 이야기 하려는지 감을 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돈 많으면 뻘짓도 참 재미있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우울해졌다.

전에 누군가 캡춰해서 올려 놓았던, Climate Swindle을 본 적이 있었다. 끝까지 보고 있기에 힘들었음을 미리 일러둔다. 그 다큐멘터리의 맨 마지막 쯔음에 캐냐였던가? 아프리카 모처에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한 이야기가 나왔다. 불안정해서 별 도움이 안된다고. 그 연출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환경과 기후를 들먹이며 아프리카의 꿈을 짖밟는 저주스러운 것들. 누가 정말로 아프리카의 꿈을 갉아먹는지는 구지 여기서 따지지 않겠다. 다만 여기서 보이는 모순. 칸쿤에 다는 태양전지는 지구온난화구라론자들의 선물이 되었다.

그리고 두번째 짜증. 기업의 사회봉사. 여기 나오는 CFACT는 명목상 비정부기구이지만 사실은 석유회사의 수족이듯 하다. 조그마한 마을의 학교에 조명시설을 달아주고는 생색을 낸다. 이런 거 많이 본다. 광고든 뭐든. 어릴적에 선행은 남 모르게 하라 그랬는데. 기업의 사회봉사 광고를 볼 때마다, 아침에 지하철 계단의 거지한테 500원 던져줬다고 생생내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자랑하고 다니는 모습을 나에게 뒤집어 씌워보고는, 수치심에 몸을 떤다. 이것이 바른 삶의 태도에 비추어 보는것이라면, 다른 측면의 질문도 가능하다.

기업입장에서라면 사회봉사는 기업의 홍보를 위한 수단이고, 같은 돈을 쓴다면 광고효과가 높은 사람에게 쏟아붙는 편이 이익이다. 불쌍한 사람들 중에서도, 광고효과가 뛰어난 사람들이 구호를 받는다면, 그것이 무슨 구호냐, 미친. 예전에 한 번 어디서 봤다. 사랑의 리퀘스트인가, 거기서 출연자를 모집할 때, 심사를 받고 그 중에 가장 불쌍한 경우만 출연이 가능하다고. 그래서 출연희망자 중에는 구라를 치는 경우도 있다고. 불행한 운명 또는 상황이 상품이 되어 거래되는 것이 정의로운가? (ㅎㅎ 책좀 읽었다.) 혹은 불쌍한 사람들 중 일부만 구호를 받는것이 공정한가?

불운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도움은 ARS 띡띡 눌러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를 추구할 대표에게 선관위 도장을 꾸욱 찍어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더욱 확실해지는 요즘이다.

잠시 이야기가 샜지만, 어쨌든 기후변화구라설이 요즘들어 많이 잠잠해진 것 같아서 참으로 다행이다.

2010년 12월 10일 금요일

책을 읽다

요 근래에 책을 좀 많이 읽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이제야 다 읽었고, 그 전에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을 읽었다. 물론 다른 책도 더 읽었다. 2권 읽고 많이 읽었다고 하는 건 절대 아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의 앞부분을 읽을 때는, 고등학교때 배웠던 윤리과목 내용이 많이 기억났다. 공리주의를 한참 설명하고, 또 그 원칙이 적용되는 예시들과, 이들 원칙들의 명백한 한계를 제시하였다. 그 때 제시되는 예들이 생각을 많이 자극했다. 특히나 사고 팔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고 공리가 증가하는가 하는 질문은,《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읽었던, 자유시장이 자유로운 정도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는가하는 내용과 연관되어 있었다. 덕분에 좀 더 풍부한 예를 떠올리면서 막가파식 공리주의자나 시장원리주의자들의 극단적인 생각을 비판하며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음에 등장하는 사람이 유명한 임마뉴엘 칸트. 고등학교 윤리책에서 배운 칸트에 대한 설명이 뭔가를 왜곡하거나, 빠뜨린 부분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하지만 당연히 서술의 깊이가 달랐다. 오랜만에 수능 이후 묻어두었던 지식을 꺼내어 확인해 보고, 또한 칸트의 생각을 한층 더 음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윤리책에서 배우지 못했던 사람이 등장했다. 존 롤스. 저자는 칸트와 롤스를 같은 범주에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이 아리스토텔레스. 뭥미? 어리둥절하며 그의 목적론에 대한 설명을 뒤따라 읽었다. 그 뒤를 잇는, 그의 목적론만이 가장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예시들. 가끔 맞는듯 하지만, 사실은 이런 예들은 소가 뒷걸음치다 개구리잡는 격 아닌가. 화성에서 생명을 찾느니 하는 시대에 웬 아리스토텔레스?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정의관은, 나의 선입견 이상이였으며,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집단책임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모든 인간이 가져야 할 보편적인 책임 외에, 내가 선택하지 않았지만, 내가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 존재한다. 그것을 설득력있게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의 문맥상에서, 이야기의 주체로서 살아있다. 가족·공동체·국가 같은. 그리고 이런 시각이 아리스토텔레스와 연결이 되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읽은지 며칠 되서 까먹었다. 다시 읽어야 한다.

칸트나 롤스가 이야기 한 자유로운 개인. 그리고 23가지에서 읽었던, 자유시장 원리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합리적인 개인. 요 두가지가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뜨끔해 보였다. 아, 아니다. 원리주의자들의 합리적인 개인은 공리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바와 부합하는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아 보인다.

《정의란 무엇인가》나 《그들이 이야기하지 않는 23가지》는, 정치·도덕분야나 경제 분야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설명의 한계들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흥미로웠다.


그리고 실천적인 측면에서도 《정의란 무엇인가》는 영향력이 컸다. 아마도 앞으로 계속 영향을 줄 것이다. 지금까지는 “자유로운 개인”에 초점을 두고 생각하고, 행동해왔다. 내가 속해있는 문맥보다는, 내가 써 내려가고 싶은 이야기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소극적인 내 성품에 더 부합했다. 그런 맥락에서 “용기”라는 덕목은 “만용”이라는 악덕과 본질적으로는 구별되지 않는 것이었다. 단지 그 결과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뿐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라는 덕목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맥 속에서 살고 있는 나는, 그리고 결코 그 문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는, 아마 내가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짊어져야 할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사실 나는 이 때까지 이 점을 납득할 수 없었고 (정말로), 최대한 이런 문제를 회피하려고 했었다.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할 수는 없으니까. 이 책은, 그 지점을 납득시켜줬다. 더 분명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회피하려고 했던 그 책임을 지는가 여부를, 타인을 평가할 때, 내가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나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가혹한, 관점이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매우 부끄러웠고, 또한 “그렇다면 이렇게 해 보지”하는 생각과 욕구가 생겼다.

책장수는 아니지만 일독을 권하는 책들이다.

2010년 12월 2일 목요일

떼거지 적색왜성들

지금까지 생각해오던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적생왜성들이 존재한다는 관측 보고가 발표되었다. (http://media.daum.net/digital/view.html?cateid=1043&newsid=20101202213916253&p=khan)

적색왜성은 크기가 작아서 어두운 별들이다. 별의 특성을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질량이다. 질량이 큰 별은, 일단 크기가 크고, 핵융합 반응이 일어나는 영역이 크다. 따라서 더 많은 에너지를 만들고 방출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별이 단위시간당 만들어 내는 에너지의 양은 질량이 커질수록 더 빨리 증가한다. 그 결과 큰 별은 더 빨리 연료를 소모하게 되고, 수명은 더 짧다. 무거운 별은 밝고, 수명이 짧지만, 겨우 불이 붙은 정도인 적색왜성들은 아주 오래 빛날 수 있다. 비록 희미하지만 말이다.

적색왜성은 어둡기 때문에 관측하기가 쉽지 않다. 지금까지는 다른 은하에 얼마나 많은 적색왜성이 있을까 하는 질문에, 단지 우리 은하의 관측값을 적용해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 연구는 우리은하보다 더 많은 적색왜성이 외부은하에 있고, 특히나 타원은하에는 10배는 많은 적색왜성들이 있음을 관측을 통해 보여준다.

연구 결과로부터 두가지를 유추할 수 있다. 첫번째는 적색왜성들이 암흑물질중의 일부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거는 잘 모르니까 넘어간다.

두번째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은 행성들이 존재하리라는 것이다. 알고 보니 별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 더하여 적색왜성들은 가늘지만 오래간다. 그 말은, 이런 별들 주위를 돌고 있는 행성에 생명이 깃든다면, 이 생명들은 긴 시간동안 진화할 수 있고, 지성을 갖춘 생명을 키울 가능성도 높아진다.

소년아, 얼굴을 들어 하늘을 봐라. 요새 밤하늘에 밝게 보이는 별들 역시, 행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중에는 환경이 적절하여, 암석 덩어리를 둘러싸는 얇은 휘발성 물질이 만들어 놓은 연약한 공간에서, 대사와 유전을 통해 지속되는, 생명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 우리와 통신을 할만큼 발달하지는 못할 것이다. 밝은 별들은 겨우 몇 억 년 존재해 왔었고, 역시 겨우 몇 억 년 더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지구가 인간을 키워내기까지 46억년이 걸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수억년만에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여, 망해가는 모항성을 탈출할 능력을 가진 지적 생명체가 나타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적색왜성들은 다르다. 태양이 100억년 쯤 살고, 지금은 중간쯤 왔는데, 적색왜성들은 당연히 훨씬 더 오래 빛날 수 있다. 지난 번 떠들석했던 글리제 581역시 적색왜성이다.

오늘은 또 다른 재미있는 소식이 있었다. 미국에서 인 대신 비소를 사용할 수 있는 박테리아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 박테리아는 단백질, 지방 뿐만 아니라 핵산에 들어가는 인도 비소로 치환하여 살 수 있다. 이런 생명체 확장형들(alternative biochemistry라고 하는 것 같던데, 적절하게 우리말로 쓸려면 어찌해야할 지 모르겠다.)은 SF에 단골 소재로 사용되다가, 이론적인 확장형들에 대한 과학적인 보고서가 나오기도 했다. (http://en.wikipedia.org/wiki/Hypothetical_types_of_biochemistry에서 정보를 찾을 수 있다.) 탄소 대신 규소, 산소 대신 황이라든지, 물을 대신하는 여러 용매 같은 다양한 가정들이 이론적으로 제시된 적이 있었는데, 그런 실제가, 그것도 외계도 아닌 지구에서 발견되었다. (그것도 미국에서. 역시 천조국.)

생명 작용과 우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외계 생명의 존재 가능성은 점점 더 높아져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ps. 어느날 갑자기 지구의 주요 대도시 위에 외계에서 온 원반이 자리잡고, 지구는 혼란에 빠진다. 어떠한 커뮤니케이션도 되지 않는 상황에서, 음파나 전자기파를 통한 교섭 요청이 적대적으로 묵살되고, 무력으로 출입구를 여는 시도마저 좌절되어, 전 인류가 공포에 빠진 순간, 외계인들이 지구의 방송 전파를 장악하고 최초로 그들의 의사를 전달한다.

예수믿으세요.



그럴까봐 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