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5일 화요일

욕론



많은 사람이 그러할 텐데, 나는 뉴스를 보면 욕이 막 나온다. 욕을 하는 거야 유치원에서 배운 후로 계속되어온 현상인데, 요즘 들어 욕의 발화(發話) 양상에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났다. 욕으로 서사가 가능해지고 있다.

사실 이전에도 가끔 뭔가에 열 받아서 욕을 하면,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내가 대뜸 랩을 하는지 알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하다. 그런데 요즘은 욕지거리가 나오는 동안 내가 박자를 맞추고 있다는 느낌을 스스로 받는 경우가 있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 봤다.

일단 가장 자연스러운 이유로 시간이 흐르면서 더 많은 욕들을 접하면서 어휘력이 늘었을 수 있다. 그리고 가요의 깊은 맛을 알아가면서 박자를 맞춘 인간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점차 알아 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또 시대적 이유가 욕의 변화에 기여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명박 시대의 정치 뉴스는 이전과는 달리 욕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다양하고 여러 층위에 분포하고 있다. 물론 이 역시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상사의 다양한 측면, 복잡 다단한 연관성을 점점 더 파악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생물학적인 이유인 듯하다. 어리고 젊은 시절, 욕을 하고 싶은 충동은 강렬하지만 짧은 펄스처럼 다가왔다. 그 충동은 심지어 외마디 욕이 발화되는 시간 동안 조차 지속되지 못했다. 그 때는 외마디 욕을 짐승같이 외쳤었다. 그런데 요즘은 늙어가서 그런지 그 충동이 완전한 형태로 조합되고 해체되는데 시간이 좀 오래 걸린다. 하지만 일단 발화된 욕은, 발화 후 흩어져가는 충동을 자극하여 다음 번 발화로 이어지고, 다시 그 발화는 다음 발화를 유도하는, 그런 연쇄반응이 일어나는 듯하다.

화자의 카타르시스에서 끝나는 욕을 결코 아름다운 욕이 될 수 없다. 아름다운 욕은 옆에서 방관하며 듣는 사람의 감정을 흔들어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욕의 공격 대상이 되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계속하여 말싸움을 이끌어 가고 싶어하는 생각을 단념시킬 수 있어야 한다. 2인칭에 대하여서는 욕의 내용이, 3인칭에 대하여서는 욕설의 구조와 발화의 시연(박자, 운율, 고저, 장단), 호소력의 요체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호소력 있는 주장에 공감할 뿐, 설득력 있는 주장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서사가 점차 자연스러워 지고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두 가지 퍼포먼스를 실을 수 있는 플랫폼이 겨우 만들어져 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아직 멀었다. “어떻게 하면 수영(, 달리기, 피아노, 글쓰기, 노래 뭐 든)를 그렇게 잘 할 수 있나요?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욕에 대하여서도 별로 다르지 않은 듯하다.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