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에너지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에너지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2년 5월 12일 토요일

전쟁, 평화, 전쟁

치세와 난세가 교대하고, 융성과 쇠락이 반복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인가? 피터 터친의 《War and Peace and War》는 전근대 시대 농업문명권에서 펼쳐젔던 역사에 파장이 다른 세 주기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고 주장한다. 안타깝게도 영어책을 읽고 말았다. 일단 변명부터 시작하자면, 이 책을 우연히 알게 된게 지난 여름이었는데, 이 책의 우리말 번역인 《제국의 탄생》이 나왔다는 것을 아마존에 주문하는 시점에서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1. 책 내용 정리

세 주기

역사를 구성하는 세가지 주기를 저자인 피터 터친은 주장하고 있다. 약 천 년을 주기로 가지는 아싸비야(عصبية‎)주기, 수 세기에 걸쳐서 반복되는 영년주기(secular cycle), 그리고 대체로 두 세대를 통해 반복되는 부자(父子)주기가 그것이다. 아싸비야는 이 책의 핵심 생각이다. 아싸비야는 인간 사이의 연대를 의미한다. 아싸비야라는 개념은 14세기 북아프리카와 티무르 제국에서 활동했던 역사가인 이븐 할둔(ابن خلدون)이 그의 역작 《알무깟디마》(المقدّمة‎)(소개, 서설 정도의 뜻)에서 주장한 개념이다. 이븐 할둔에 따르면 아싸비야야 말로 역사의 모든 단계에서 실재적인 힘을 구축하고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연대하는 인간집단만이 실재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사소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아싸비야의 'ㅆ'은 아싸라비아의 'ㅆ'과 다르다. 아싸라비아는 “아빠 사우디아라비아 갔다.”의 줄인말인데, 여기서의 'ㅆ'은 아랍어 자음의 'س'으로 보통의 'ㅅ'발음이고, 아싸비야의 'ㅆ'은 아랍어 자음의 'ص'로, 둔탁한 느낌이 드는 'ㅆ'소리이다. 입을 한 발쯤 내 밀고 ㅆㅂ 할 때의 소리랑 비슷한 것 같다.

삼라만상이 성주괴공의 주기를 윤회하듯이 아싸비야 역시 형성과 쇠퇴를 하게 된다. 아싸비야가 형성되는 조건으로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초민족전선(metaethnic frontier)이다. 이 경계를 통해 우리와 느그가 구분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 사이의 결속력과 연대가 형성 발전하기 때문이다. 한 편 강한 아싸비야를 통해서 형성된 제국은 초민족전선을 그 제국의 중심지로부터 먼 곳으로 이동시킨다. 아싸비야는 더 이상 자극받지 못하고 점차 쇠퇴하게 된다.

그 다음 주기로 제시되는 것은 영년주기이다. 영년주기는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말세다”라고 하는 상황의 주기적 도래를 설명한다. 전근대 농경문명에서 치세는, 토지가 사람 수에 비해 풍부한 시대이다. 사회는 번영을 누리고 인구가 증가한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는 필연적으로 공급초과에 따른 노동임금의 감소를 초래한다. 인구에 비해 토지는 부족하므로 지대가 상승한다. 토지는 증가하지 않는 반면 수요가 많아지므로 곡물의 가격은 상승한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들은 농민의 삶이 고통스럽게 함과 동시에 지배계급으로 부를 이전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지배계급 역시 과잉재생산되기 때문에 이들의 삶의 질 역시 악화되고, 부족한 재화와 용역을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한 투쟁에서 파벌이 형성된다. 위로는 엘리트간의 내전, 아래로는 갈 데까지 내몰린 농민들의 봉기. 더하여 토지를 가지지 못한 유민들의 비위생적인 거주환경은 역병의 창궐을 불러온다. 내전과 기아, 역병을 통해 인구의 공급과잉이 해소되면서 한 번의 영년주기가 마무리된다.

마지막으로 제시되는 부자주기는 특히 쇠퇴국면에 있는 영년주기에 잘 나타나는데, 엘리트 파벌 사이에서 벌어지는 내전의 폭력성이 약 두 세대를 주기로 강약을 반복한다는 주장이다. 할어버지 대에 피비린내 나는 지독한 내전을 보고 자란 아버지 세대는 상대적으로 약한 폭력성을 보이는 반면, 아들 세대는 할아버지대의 잔혹함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또 다시 내전의 양상이 잔인해진다는 설명이다.


예시들

이 주장을 뒤바침하기 위하여 저자는 수많은 예시를 들이 붓는다. 아싸비야주기를 설명하는 데에는 초민족전선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예들을 보여준다. 킵차크 칸국 및 그의 승계국가들과의 투쟁을 통해 제정 러시아의 아싸비야를 형성하는 과정. 북미 인디언들과의 투쟁을 통해 미국의 아싸비야가 형성되는 과정, 골족과의 투쟁을 통해서 로마의 아싸비야가 형성되는 과정을 그 예시로 든다. 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난 뒤 유럽에서 형성되었던 프랑크 왕국, 스페인, 독일제국, 비잔틴 제국의 형성을 또한 초민족전선을 통해서 설명하려고 한다.

영년주기의 예시 역시 충분하다. 로마에서 반복된 네 번의 영년주기가 잘 분석되어 있다. 13-14세기 중세의 번영과 쇠락, 뒤이어 르네상스로 시작되고 종교전쟁으로 마무리된 두 영년주기가 프랑스와 영국의 사례를 중심으로 매우 상세하게 기술되어있다. 부자주기의 예시들은 영년주기를 설명하는 동안 제시된다.


비합리적 인간

아싸비야는 인간 간의 상호 신뢰와 희생을 전재로 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생물학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 개체는 수 억 년에 걸쳐 치열하기 짝이 없는 경쟁을 통해 선택되고 연마된 냉철한 생존 머신이지 않는가? 그들이 어떻게 이타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이타적 행동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아싸비야를 기초로 하여 역사를 설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시도는 허공에 좆질이 된다. 저자는 이 질문에 반드시 답해야 하는 것이다.

실재로는 이타적인 행동은 드문 현상이 아니다. 이 모순에 대한 가장 새로운 생물학적 대답은, “그 '자연스러운 선택'이 일어나는 단위는 개체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포부터 군집에 이르는 모든 층위에서 자연스런 선택의 압력이 작용하며, 개체의 이타적인 행동은 이러한 틀에서 이해할 때, 개체의 생존과 모순되지 않는다.”이다.

이기적 인간 개체라는 구시대의 신화는 비단 생물학적 근거뿐만 아니라, 실험 경제학을 통해서도 도전받고 있다. 인간의 이타성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여러 실험 결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인가의 이타성을 드러내는 게임들은 피험자가 상반되는 두 유인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도록 설계되어 있다. 한 가지 유인은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이익이 돌아오는, 또는 최소한 손해를 보지는 않는 유인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피험자가 협력해야만 자신에게 이익이 돌아오되 더 큰 이익이 돌아오는 유인이다. 이 때는 다른 피험자가 협력하지 않을 경우 손해를 보게 된다. 수인의 딜레마, 공유지의 비극이 모두 같은 조건에서 비롯된다.

많은 중학생들이 세상의 사람을 임마, 점마, 금마의 세 카테고리로 구분하듯이, 이타성을 기준으로 할 때 사람은 성인(saint), 속인(moralist), 악인(knave)의 세 분류로 구분될 수 있다. 성인은 무조건적인 이타성을 보이는 사람으로 약 2할 5푼 정도의 사람들이라고 한다. 악인은 반대로 무조적적인 이기성을 보이는 사람들로 역시 약 2할 5푼 정도의 사람들이 해당된다고 한다. 속인은 그 중간에 속하는 사람들인데 눈치를 보고 행동을 결정하는 사람들이다. 놀라운 점은 이 속인들 중에는 정의맨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들은 자신의 자원을 소모하면서까지 악인을 응징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또한 일련의 실험들이 보여주는 바는, 정의맨이 존재할 때, 악인의 이기적 성향을 억누를 수 있고, 그결과 피험자군 모두가 모두에게 최선이 되는 방향으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인간 무리는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 그것이 친족에서 끝난다면 역시나 제국의 탄생은 요원해진다. 한 개인이 밀접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또한 타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까지 헤아릴 수 있는 인간 집단의 최대 크기는 150명 정도라고 한다. 마을의 크기이다. 연대할 수 있는 인간 집단의 크기가 그 이상이 되기 위해서는 처음보는 사람도 우리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표시가 필요하고, 그런 이유에서 상징(symbol)이 생긴다. 아마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상징은 두발과 옷차림이었을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곰과 호랑이를 원숭이나 팬더와 구분되는 자신들의 상징이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국가는 상징적 사고가 가장 발전된 형태이다.


불평등의 확대 모델

마태원리는 부익부 빈익빈의 기독교식, 혹은 서구식 표현이다. 재미있는 부분은 마태원리가 항상 작용하는 원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인구가 적을 때에는, 지주가 스스로 자신의 토지를 모두 경작할 수 없기 때문에, 추가적인 수익을 얻기 위해 무자산자에게 (비싼) 임금을 주고 노동을 구매할 수 밖에 없게 되고 교환을 통해 부의 재분배가 일어난다. 윈-윈 게임이고, 요새 말로 블루오션이다. 과잉인구가 존재할 경우 노동의 교환가치는 땅에 떨어지고, 지주에게 수익의 대부분이 돌아가게 되며, 여러 이유로 최저생계조건 이상의 수익을 올리지 못한 자영농이 매각하는 토지를 간단히 구매하게 되면서 부의 집중이 심해진다. 제로썸 게임이고, 레드오션이다.


현대 세계로의 인신 (생산의 확대, 대중매체)

마지막으로 저자는 현재 지구에 있는 제국, 혹은 그 선구체로, 미국, 중국, 유럽, 러시아 네 개를 제시한다. 이들은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인가. 이것을 추측하기 위해서는 세개의 주기 이론을 현대사회에 그냥 적용시키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 전에 세개의 주기 이론이 현대사회에도 적용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만약에 그렇다면 현대는 융성국면에 있는가 쇠락국면에 있는가? 안타깝게도 여러 지표들은 현재가 쇠락국면임을 지시한다. 혹시나 농경사회와 현대사회의 차이가 이 국면을 뒤집을 수 있지 않을까?

전근대 농경사회와 현대산업사회를 구분하는 많은 요소 가운데서도, 아싸비야에 가장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부분은 통신기술의 발달이다. 발전된 통신기술이 아싸비야의 궤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저자는 추적하고 싶어 하지만, 그 기술의 발달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나머지 예시 이상의 분석을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



2. 비판

여기까지가 책의 내용을 나름 정리해 본 것이다. 언뜻 보기만 해도 굉장히 설득력있는 주장이 체계적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은 크게 두 가지 부문에서 공격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납득하기 힘들었던 이유들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는 뚯이다. 그 첫번째는 환경결정론과의 충돌이고, 두번째는 샘플링 편차이다.


환경결정론에 대한 도전

이 책은 문명의 흥망을 거의 완전히 내부동력학에 의하여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는 환경이 문명의 흥망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주장과는 상당한 부분에서 상반된다. 실재로 책에는 두 부분에서 다이아몬드의 주장을 명시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첫번째 부분은 중국과 유럽이 완전히 다른 역사의 궤적을 그려온 사실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유럽은 한 번도 완전히 통일된 적이 없었다. 반대로 중국은 끊임없이 통일제국이 성립되었다. 다이아몬드는 이를 지리적인 차이로 설명한다. 유럽은 네 개의 큰 반도와 전지구적 대조산대의 일부가 육로를 통한 교통을 방해하고 있다. 반면 중국의 핵심지역은 광대한 평원지대로 거의 교통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 다이아몬드의 설명은 명쾌하고 직관적이다. 터친은 이에 대하여 다른 견해를 내어 놓는다. 중국에서 반복되는 대제국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아싸비야가 로마와는 달리 시간과 함께 고갈되지 않아왔음을 보여야 한다. 아싸비야의 원천은 초민족전선이고, 중국에서 그 전선은 북중국에 놓여있는 유목민족과의 경계선이다. 터친에 따르면 이 전선에서의 충돌은 아싸비야의 화수분이었다. 유럽과는 달리 이 전선은 크게 이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또한 지리적으로 연속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두번째로 터친이 다이아몬드와 각을 세우는 부분은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통해 볼 수 있는, 프랑스와 영국의 쇠락 국면의 시차이다. 프랑스 북부나 영국 남부에서 눈에 띄는 기후변화의 차이를 기대할 수는 없다. 영국과 프랑스가 공히 쇠락압력에 시달리고 있을 때, 영국은 지배계급의 불만을 프랑스라는 외부로 투사함으로써 내전의 막을 수 있었으나, 프랑스는 그러지 못했고 지배계급의 내전과 외부의 침략의 동시에 견뎌내야 했다. 100년이 넘는 외침에 저항하면서 프랑스는 (엄청난 인구감소의 댓가로) 내적 결속력을 회복했고, 영국군을 대륙에서 축출하면서 르네상스 황금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반면 영국에서 지배계급의 내전은 압력을 외부로 투사할 숨구멍이 막히면서 비로소 시작되었고, 그 결과 영년주기가 도버해협의 양쪽에서 위상차를 보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중국

만리장성은 과연 아싸비야의 원천이었던가? 그렇지 않다. 중국사는 완전히 큰 규모에서 아싸비야주기가 아니라 “胡-漢 인터랙션”이라는 표현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 호-한 인터랙션이라는 것도 일정 정도의 주기성(약 두 왕조)을 가지는데, 그 주기는 아싸비야주기보다는 짫고 그 주기성의 동력 역시 다르다.

진나라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문화적 전선이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초민족전선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한나라는 농민봉기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 동기 중에 산시(陝西)성과 후베이성 사이의 문화적 갈등이 존재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최소한 초민족전선은 아니다. 무제 때 북방의 흉노와의 상호작용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한나라를 구성하는 농경민들의 아싸비야를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특히 키예프-카잔 전선에서 유목민에 저항하기 위해 러시아인들이 보여줬던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그때 중국의 농민들은 병사로 편입되어, 비록 몇 번의 처절한 실패가 있었지만, 흉노를 정벌해 버렸다.

아마 몽골점령 이후 16세기까지 우크라이나 평원지대에서 벌어졌던 살육사태들과 가장 비슷한 예를 중국에서 고르자면 위진남북조 후기부터 오호십륙국시대일 것 같은데, 그 때도 상황은 사뭇 달랐다. 화북을 점령한 유목민들은 화북평원을 평원으로 두고 들어오는 농민들을 약탈하는 방법을 택하는 대신, 스스로가 한족(의 지배계급)화 되었다. 화북을 통일한 유목민 왕조는 이내 한화되어 버리고, 그러면 다른 유목민이 그 왕조를 엎어버리고 새로운 왕조를 새우고 한화되는 양상이 반복되었다. 이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수, 곧이어 이를 교대한 당의 창업군주들은 둘다 북방민족 출신이다. 수나라 양씨, 당나라 이씨는 둘 다 선비족 출신이다.

당을 계승한 송나라는 북방민족에 밀려 계속하여 남하하였으나, 그 와중에도 아싸비야가 자극받기는 커녕 조정은 계속해서 부패해 들어갔고, 결국은 몽골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 몽골족의 흥기와 쇠퇴는 아싸비야주기로 설명되기에는 너무 급작스럽다.  통일 직전까지 몽골의 분열양상은 딴지일보에서 필독이 연재하는 테무진 투 더 칸에서 잘 볼 수 있다. 몽골족은 다시 몽골로 쫒겨난 후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만주족에 의해 점령되고 만다. 한족이 북방민족을 몰아내고 세운 왕조는 명나라이고, 명나라 역시 별로 아싸비야를 유지했던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동아시아에 걸쳐 있던 유목민족과 농경민족간의 경계는 적어도 중국 농경민족의 아싸비야를 길러내는 토양으로 작용하지는 못했다. 한족이 단 한번 성공적으로 이민족의 지배를 뿌리쳤던 명은 거기서 천 km는 떨어진 남중국에서 발원했다. 오히려 이 전선의 북쪽에 있던 유목민족들이야 말로 내부적 결속력을 키울 수 있었지만, 그들이 중국 대륙을 점령하고 난 이후에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버리고 한족화 되어버리고 말았고, 많은 경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더하여 중국에도 유럽 못지 않는 지리적 경계가 있다는 터친의 주장에 대하여서도 태클을 걸 수 밖에 없다. 아마도 (중국인을 포함한) 일반적인 동아시아인에게, 역사에 등장하는 중국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지리적 범위는, 현재의 세계지도가 보여주는 중국의 강역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칭하이 포함) 티베트, 위구르, 내몽고, 만주가 포함되지 않는다. 더하여 타이완과 위난, 구이저우, 광시는 아직 반 정도만 중국이고, 광둥, 푸젠 역시 처음부터 “역사적인” 중국의 일부는 아니었다. 이렇게 떼고 나면, 남아있는 전통적인 중국은, 중원이라 불리는, 매우 지리적으로 연속되어 있는 지역이다. 단 하나의 예외는 쓰촨분지가 되겠는데, 왜 이 지역이 중원에 대해 정치적인 독립성을 지니는 데에 그토록 주저해왔는가는, 좀 더 책을 찾아봐야 될 것 같다.



프랑스-영국, 조선-일본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있었던 쇠퇴국면의 시차는 기후변화와 같은 외부적 요인이 문명의 흥망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공격하기에 매우 적절한 근거이다. 아마 터친이 맞을 것이다. 나는 영국·프랑스 역사도 잘 모르고, 터친이 제시한 증거가 틀린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 영국과 프랑스의 위상차이는 기후 탓으로 설명할 수 없는게 맞아 보인다.

비슷한 위상차가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도 보인다는 점이 재미있다. 한반도는 한반도의 통일과 함께 신라에 의해 8세기 중반까지 융성기를 누리다가 10세기 초반까지 쇠퇴기를 겪는다. 다음에는 고려가 등장하여 12세기 초반까지 요·금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융성하는 기운을 보이다가 12세기동안 엘리트 내전·농민 봉기라는 전형적인 쇠퇴기를 보이고, 무신정권기와 원 침략기를 견뎌 내다가 14세기 후반에는 권문세족으로 상징되는 부의 양극화가 다시 나타나면서 내리막을 걷는다. 다음 번 상승기는 15세기에 조선의 건국과 함께 시작된다. 일본열도에서는 야마토시대 말기 (7세기 말) 정점을 찍고, 나라시대의 좀 혼란해 보이는 시기를 지나 헤이안 시대(794-1185)가 한 번의 영년 주기를 완성한다. 가마쿠라 시대는 13세기 말까지 상승세를 유지하다가 그 이후 16세기 중반까지 센고쿠 시대라고 불리는 꾸준한 혼란기를 겪는다. 일본의 경우에는 부자주기로 보이는 잛은 변동이 보이기도 한다. 15세기 초 무로마치막부 안정기가 그 시기이다.

위에서 본 관찰로부터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은 문명의 흥망에는 내적동력학의 영향과 함께 지리나 기후변화 같은 정적·동적 환경의 변수, 둘 다가 중요하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아싸비야 주기는 사실인가?

주기는 반복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 지점에서 만들어진 박동이 그 곳에서 다시 반복되지 않고, 대신 그 이웃한 곳으로 전달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주기가 아니라 자극의 전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터친이 주장한 아싸비야주기는, 심지어 그의 주장을 따르더라도, 한 지역에서는 반복되지 않았다. 로마에서 고양된 아싸비야는 로마의 멸망과 함께 그 변경지역으로 옮아갔고, 다시 한 번 동쪽으로는 러시아 평원, 서쪽으로는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로 옮아갔다. 일종의 전파가 일어난 샘이다. 한 편 아싸비야의 한 주기가 끝난 이탈리아, 특히 그 중에서도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고갈된 아싸비야는 매우 오랜 시간동안 회복되지 않고 있다.

아싸비야는 측정되기가 매우 힘든 양이다. 어느 곳의 역사가 잘 풀리고 있는 동안에는 아싸비야가 높아서 그렇고, 좆망테크 타고 있는 동안에는 아싸비야가 낮아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과학적이지 못한 설명이다. 책의 후반부에서, 전투와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물질적이지 않되 승패에 중요한 역할을 미치는 변수를 측정하는 몇가지 방법과 그 성과들이 제시되었지만, 서로 충돌해 보지 않았던 두 문명 사이에서는 어떻게 그러한 변수를 측정할 수 있단 말이가? 결국은 삼국지 최고 무장이 누구인가 같은 헛된 싸움만 남게 될 것이다.

아싸비야가 가지는 또 다른 문제는, 아싸비야를 측정할 집단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주어진 문명권의 어떤 집단이 그 문명권의 아싸비야를 대표할 수 있는가?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엘리트 집단인가? 어느수준의 하급관리까지가 엘리트 집단에 포함될 수 있는가? 그렇다면, 평민들의 결속력은 그 문명의 아싸비야를 결정하는 데 상관이 없는 요소인가? 아싸비야는 역사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한 변수로 취급하기에는 지나치게 자의적이다. 온도나 압력과 같이 퉁계적인 양을 기술하기 위한 변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았거니와, 그런 정의가 그리 쉽게 내려질 것 같아 보이는 성격의 양도 아니다.

한 편, 앞의 중국의 예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중국의 경우에는 아싸비야의 주기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규칙적인 분열과 통일, 왕조 흥망의 주기에서 호-한 인터랙션 말고 또 다른 어떤 긴 흐름을 찾아 낼 수 있다면, 그것은 11세기 이후에 중국 문명를 선도하는 지역이 황하 유역에서 장강 하구 지역으로 옮겨갔다는 사실이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선도 지역이 광둥으로까지 남하한 단편적 증거가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증거들이 중국에서도 아싸비야의 주기가 있다는 사실을 뒤바침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것은 유럽에서 보았던, 아싸비야의 전파와 비슷한 느낌이다.

여기까지 말하면 내가 마치 장기적인 아싸비야의 변화는 인정하는 것 같아 보여서 좀 더 변명을 해야 될 것 같다. 아싸비야는 주기성을 가지고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기 보다는, 한 곳에서 생긴 아싸비야가 주변으로 전파되는 모양을 보인다. 적어도 유럽과, 백 번 양보해서, 중국에서는. 중국과의 비교에서 내릴 수 있는 결론는, 심지어 장기적으로 변동하는 아싸비야라는 게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형성에 초민족전선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싸비야라는 추상적인 개념의 등락을 도입하는 것 보다는, 문명의 중심지가 될 만한 최적지가 시간에 따라 서서히 이동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비단 기후의 변동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물질과 에너지를 공급하는 기술의 변화, 그리고 그 기술에 의해 개발될 수 있는 자원의 “지리적 분포”가, 초민족전선에서 형성되는 인간사이의 결속력보다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보아야 한다.

더하여 초민족전선은 그 정의가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편의에 따라 가져다 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효용을 잃었다고 보이는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브랜드에 지나치게 심취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제국의 형성에 초민족전선이 필요하다면, 이집트, 페르시아, 잉카, 마야, 인도에서 제국들의 형성을 또한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보기에 초민족 전선이라는 것은 오히리 이들 (최초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원형제국”이 형성된 후 이들의 국가 구성원리의 전파 과정에서 생겨나는, 일종의 2차 전선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변방이었던 유럽에서는 잘 맞아 떨어지나, 다른 곳에서는 별로 그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3. 나의 썰

영년주기

터친의 이론에서 가장 탁월한 부분은 영년주기 이론이다. 영년주기이론을 뒷바침하는 수치들은 구체적인 숫자들(물건 값, 임금, 계급별 인구구성비율, 내전과 농민봉기의 정확한 시점)이었으며, 그 이론이 지시하는 바 역시 짧은 경제학 지식으로도 이해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을만큼 명쾌했다. 결정적으로 그 이론은 비단 유럽뿐만 아니라, 적어도 동아시아에도 역시 잘 적용되었다. 중국, 한국, 일본에서도 치세와 난세의 교대 양상은, 거의 완벽하게 영년주기의 이론을 따른다. 아싸비야주기라는 것에서 상상의 냄새가 많이 난다면, 영년주기 이론은 매우 사실적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계몽받은 느낌이다.

로마는 에트루리아인과의 투쟁, 중부 이탈리아 평정, 평민과 귀족의 투쟁이라는 한 주기를 귀족정 체제에서 보낸다. 골족과의 투쟁 (포에니 전쟁 포함), 시스알핀 골족 평정, 내전라는 다음 번 주기를 공화정 체제에서 보낸다. 영토 팽창과 함께 5현제로 대표되는 한 번의 영년주기를 약 2세기 동안 뛰고, 마지막 영년주기는 뚜렸한 상승기를 보이지는 않는다.

영년주기 이론은 농경문명권 어디에서나 적용되도록 설계되었다. 로마가 끝나고 난 뒤에 세워진 프랑크 제국은 메로빙거, 카롤링거 왕조가 각기 한 번씩의 영년주기를 상징한다. 오토대제의 즉위부터 시작된 중세성기는 흑사병으로 한 주기를 끝내고, 르네상스는 종교전쟁으로, 중상주의 시대는 혁명의 시대로 각기 자신의 주기를 마무리했다.

동아시아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서 한 통일왕조는 그 자체가 하나의 영년주기이다. 양상은 한반도에서도 비슷해서 통일신라, 고려전기, 고려후기, 조선전기, 조선후기가 각기 영년주기를 보인다.

재미있는 부분은, 늘 영년주기 자체는 비슷하게 반복되면서, 그 주기를 대표하는 지배계급, 그들의 통치이념은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진골귀족, 문벌귀족, 무신-권문세족, 훈구파, 사대부. 농경사회의 한계 때문에 인간에게 공급하는 물질과 에너지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매 새로운 주기들은 그 이전 주기때 물질과 에너지를 분배하는 방법과 소비하는 염치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제도와 사상·도덕을 제시해 온 것이다. 도식화라는 것이 대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이러한 도식이 있으면, 대강을 이해하고, 새로운 지역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이제는 인도의 역사를 좀 공부를 해서, 아싸비야주기 내지는 환경변화와 문명의 이동 같은 이론이 거기에도 적용되는지 확인을 해 보고 싶다.


현대사회로의 인신

터친은 농업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영년주기 이론을 현대사회에까지 적용하는 것을 주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살펴보자. 우리가 전근대 농업사회라고 말하는 시기에도 끊임없는 기술발전이 있어왔고, 농업생산성은 꾸준히 도약해왔다. 기술이 발달하는 것은 기후가 온화해지거나, 영토가 팽창하는 것과 비슷하게 더 많은 물질과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과 일차적으로는 같은 말이다. 기술의 발달은 토지에서 더 많은 물질(농작물, 임산물, 광물)과 에너지(가축, 태양, 수력·풍력, 석탄·석유)를 인간이 사용하는 형태로 바꿀 수 있도록 했고, 이러한 일반적인 법칙은 산업혁명 이후에도 변화하지 않았다. 부가가치를 생산해 내는 토대가 농업사회에서는 거의 대부분 농토에 한정되어있었다고 한다면, 현대사회는 보다 추상적인 부분이 많아졌을 뿐 인간에게 물질과 에너지를 공급하는 일이 한계에 부딧히게 되었을 때, 문명의 쇠퇴가 시작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물질과 에너지의 공급이 끊어졌을 때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산업혁명이 바꾸어 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산업혁명은 근복적으로 에너지 혁명이었다. 그 전까지 그저 일부 지역에서 난방용으로 사용되며 흩어졌던 태고의 태양에너지를,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기계적인 힘의 원천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 힘을 통해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의 공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개인적으로는 산업혁명 이후, 전 세계적으로 보자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포함해 끊임없이 전쟁이 이어졌고 여러 번의 공황이 찾아왔지만, 20세기까지는 상승국면이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이토록 긴 상승기가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인구의 증가보다 빠르게 물질과 에너지의 공급이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전근대사회에서 끊임없이 영토가 확장되었던 것과 비슷한 효과이다. 그 동안이 상승국면이었다는 것은 인구의 끊임없는 증가를 통해서도 뒷바침된다.

그런데 그 놀라운 에너지원이었던 석유의 생산 정점이 얼마전에 지나갔다. 또한 현대 사회는 이미 쇠퇴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영년주기 쇠퇴기의 기본적인 기작을 살펴보자. 먼저 인구가 증가해서 임금이 감소하는가? 예. 한국에서는 비정규직 문제로 나타나고 있고, 선진국에서도 특히 신자유주의를 반갑게 받아들인 곳에서는 노동자의 실질소득이 정체한지 수십년이 흘렀다. 지대가 증가하는가? 농업사회에서 토지는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산업사회에서는 무엇에 비유할 수 있는지 애매하므로 패스. 곡물가격이 상승했는가? 아직은 아니오. 농업에 투입되는 물질과 에너지의 가격이 (기술발전 덕에) 기적적으로 낮아진 데에 기인하는 바가 크나, 아직도 악기후에 의한 변동 가능성은 여전하다. 부의 편중이 심해지고 있는가? 예. 이 부분에 대하여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쇠퇴국면의 또 다른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폭력의 보편화가 다시 나타나는 조짐도 보인다. 현대사회가 쇠퇴국면이라는 진단은 터친 역시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쇠퇴국면의 클라이막스는 인간의 대량죽음이다. 기근과 역병 따위를 관리할 수 있게 되었고, 전쟁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늘어나는 현대에도 전근대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극적인 인구감소가 일어날 수 있는가? 현대사회에서 인구 감소는 저출산의 양상을 통해 실현될 것 같다. 죽지 않는다. 다만 태어나지 않을 뿐이다. 또한 저출산으로 고령화된 사회가 외부의 편차에 대한 탄력성을 상실한다면, 질병에 취약한 노인인구가 가장 첨예한 위험에 노출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정의맨과 공동체, 공동체주의

아싸비야의 현대적 표현은 사회적 자본이다. 아싸비야가 긴 시간동안 상승과 쇠퇴를 반복하면서 제국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양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중국이 높은 아싸비야를 가지고 있다는 명제는 참이 아니기 때문이다. 터친이 제시한 실험 결과들은, 인간 집단이 서로간의 높은 신뢰를 유지하는 데에 정의맨의 존재가, 그리고 그 존재가 행위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을 열어놓는 일이 불가결함을 보여준다. 나는 어떤 사회가 높은 아싸비야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초민족전선의 이동이 아니라.

인간 집단의 사회적 신뢰를 가장 좀먹는 행위는 사기와 배신이라고 생각한다. 아싸비야가 낮고, 사회적 자본이 결여된 사회는, 사기와 배신행위에 대한 인센티브가 작용하고 있다. 친일파를 죽이지 못했고, 그 댓가로 그 부역자들을 핵심 정책결정자로 모시게 된 한국 사회는 그런 이유 때문에 아싸비야 고양에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 신뢰가 어떤 수준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규모에서 아싸비야의 한계가 있다고 해서, 그보다 작은 단위인, 지역, 문중, 학벌, 재벌 수준에서의 아싸비:가 낮으라는 법은 없다. 국가 단위에서 보았을 때의 정의맨들은, 이들 하위 단위에서 보았을 때의 배신자일 수 있다. 국가나 민족 수준에서의 배신자들이 세계화를 이야기 하는 것은 모순이 아니라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또한 국가 단위에서의 정의맨들이, 이를테면 내부고발자가, 받는 처우는, 우리나라의 구성 원리가 국민국가 공동체라기 보다는, 그 하위단위들인 지역, 문중, 학벌, 재벌들의 연합체임을 방증한다고 보여지기도 하다. 그들의 국가의 보호의무를 훨씬 뛰어넘는, 하위단위의 압박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국가는 이들의 압박을 무력화시키지 못한다. 주권의 원천이 하위단위이기 때문일 수 있다.



좀 엉뚱한 생각

문명의 흥망이 외부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면, 우리는 세상이 망해갈 때 나타나는 파국적 현상에 대해 환멸을 느낄지언정, 도덕적 책무에서는 거의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 영년주기는 문명의 융성과 쇠퇴가 외부적 요인보다는 내적 동력학에 의해 좌우됨을 보여준다. 인구증가, 임금하락, 지대상승, 곡가상승, 부의 집중은, 개별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나타나는, 어찌보면 불가항력이다. 그러므로 영년주기에 우리는 개입할 수 없고, 그 진폭을 누그려트리려는 모든 노력은 헛된 것인가? 그러므로 망해가는 세상에 대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도덕적 책무를 느낄 필요가 없는가? 파레토의 원리가 떠오르지 않는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잘 조직되고 유능한 정부는, 심지어는 오히려 부패한 정부가 더 잘, 산아제한을 실시한다. 시장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때에만 신뢰할 필요가 있는 것이고, 더하여 어디까지가 시장의 영역이 될 것인지는 문화와 정치가 판단할 문제이다. 임금과 지대와 곡가가 시장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분배될 수 있다는 상상은 사실과는 좀 다르다. 한 개인이 시장의 원리를 거스를 수는 없겠지만, 정치에 참여함으로서 시장의 범위를 정하는 일에 참여할 수는 있다. 더하여 시장이 잘 한다는 자원의 효율적 분배라는 것도, 공동체 전체의 효용을 최대화하지는 않음을 공유지의 비극을 통해서 우리는 알고 있다.

영년주기 이론이 마음에 드는 또 다른 이유는, 세상은 원래부터 불공평한 것이라고 짖어대는 한 줌 좌좀주의자(새누리당의 여집합은 좌빨 좀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들의 근시안적 프레임을 부숴버리기에 적절한 논거로 보이기 때문이다. 쇠퇴기가 끝나고 상승기가 시작될 때는 계급과 자산에 관계 없이 소득이 매우 평등하다. 쇠퇴기의 가난과 부는 그들 조상의 가난과 부 때문이다. 세상이 원래부터 불공평하지도 않았거니와, 원래부터 불공평하면, 그냥 참고 닥치고 살란 말인가? 이북에서 당원의 자식으로 태어났어도 똑같은 소리를 했을 쓰레기들이다. 세상이 원래부터 불공평하다면, 자본주의는 생겨날 수도 없다.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는 다르다. 자본주의는 교환 쌍방의 평등을 전재로 하는 것이다. 교환 양층이 평등하지 않을 때에는, 자본주의의 최대 미덕인 자원의 효율적 분배가 달성되지 않는다. 어디 산골짜기의 18세기 무덤에 들어가 뒹굴고 있어야 할 뼈다귀들이 좀비처럼 살아 돌아다니며 트인 입이라고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는 꼴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역겨운 꼴 중에 하나이다.

마지막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는, 그렇다면 지금의 경제불평등은, 영년주기의 자연스러운 결과인가? 아니면 흔히 말해지는 대로 신자유주의의 폐해인가? 예전에 여기(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15781.html)서 본 건데, 2차대전 이후의 통화팽창은 크게 세 단계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맨 처음은 인플레, 그 다음은 공공부채, 그리고 민간부채. 이런 설명은 영년주기의 설명과 합치하는 설명이다. 경제주체의 역학관계에 따라 자연히 흘러간 결과가 바로 지금이라는 것. 영년주기 이론은 그 결과 아마 망할 수 밖에 없을거야 라고 친절하게 예언까지 해 준다. 그런데 맨 첫 댓글에도 볼 수 있듯이 이런 상황에서 돈 먹는 놈은 따로 있다. 그들이 우연히 이득을 볼 수 있는 위치에 가게 된 것일까? 누구도 그리 믿을 만큼 순진하지는 않을 것이다.

2011년 9월 16일 금요일

자연과 문명

학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알펜포어란트를 지나갔다. 숭숭 동그란 구멍이 난 숲이 산맥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숲의 구멍의 중심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었다.

문명이 이르기 전, 유럽은 숲으로 덮여 있었다. 삼림. 유럽의 중세는 숲을 개간하면서 증가하는 인구를 흡수해 온 시기였다. 숲 가운데 정착지가 생기고, 주면의 숲을 벌목하여 농장과 마을을 확장해왔다. 숲은 좀 먹듯이 동그랗게, 정착지에서 동심원을 그리면서 구멍이 숭숭 뚫히게 되었고, 그 원은 인구와 함께 확장한다. 유럽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이제 거의 모든 숲이 파괴되었다. 알펜 포어란트는 그 동심원상으로 사라지는 숲을 볼 수 있게 남아있는 지역 중의 한 곳이다.

사람이 석탄·석유를 사용하기 전까지 대용량의 발열을 하기 위한 재료는 목재였다. 사람이 콘크리트와 철근을 이용하여 건물을 만들기 전까지는 건축에 반드시 목재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플라스틱이 대체하고 있는 수 많은 생활용품은 나무로 만들어졌었다. 요즘도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학교에서 세계사를 배웠을 때, 그 가장 처음부분은 큰 강 유역에서 발달한 고대 4대문명에서 시작했었다. 그러나 강에만 촛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그 강 유역에 존재했던 대삼림의 존재가 묻혔을 뿐일 것이다. 그래서 마스터 키튼은 도나우 강 문명을 찾으러 다니고, 중국에서는 장강 문명을 열심히 찾고 있다.

동아시아사를 배울 때, 참고문헌 목록의 책들 가운데, 중국 고대사에 대한 책을 읽고 기말 보고서를 써 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책은 갑골문·고고학 등의 성취로부터 밝혀 낸, 하·은·주·춘추·전국·한대까지의 자연사와 생활사에 중점을 두고, 주제어 별로 서술되어 있었다. 하·은 시대 이전, 지금의 화북평원에는 대삼림이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주거지 주변의 삼림이 벌목과 화전으로 개간되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면적은 넓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화북지역에 삼림은 남아있지 않다. 장강 유역과 사천분지의 삼림은 조금 후에 파괴되기 시작했다. 고사에 자주 등장하는 현재 장안 주변의 관중이라는 지역은, 비옥하기 짝이 없는 지역으로 묘사되지만, 내가 아는 현재의 섬서성은 건조한 반사막 내지는 초원 지대이다.

환경이 황폐화되면서 문명이 사그라든 많은 경우들이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와 《문명의 붕괴》에 나와 있다. 그리고 그 책에서는 깊이있게 서술하지 않았지만, 문명의 요람이라고 불리는 메소포타미아 지역과 고대 그리스의 많은 식민 항구도시들이 어떻게 멸망했는지는, 잡지와 《지구대기행》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들이 비슷한 테크트리를 따라간다. 인구가 늘어나면, 자원의 소비 역시 따라서 증가하고, 이를 위해서 주변의 자원(삼림·물·토양·광물)을 과도하게 이용하게 되면서, 그 일대의 자연 환경이 더 이상 문명을 지탱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에페수스는 삼림벌채로 인해 토양유실이 일어났고, 그 모래가 바다로 흘러들어와 항구를 매우는 바람에 입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상당한 건조지역이었던 탓에 지나친 관개가 토양의 염화를 불러왔고, 결국 농업은 포기되었다.

사실 흔히들 환경의 역습이라고 말하는 이런 현상들이, (문명의 붕괴에서 이미 제시했듯이) 모든 문명의 붕괴를 설명할 수는 없고, 수백년 단위의 장기적인 기후 변동과 환경의 역습 효과를 분리해 내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그린란드의 바이킹 정착지나, 화북에서 장강으로 중국 문명의 중심이 이동한 경우가 있겠다.

지구대기행 13편은, 몇몇 문명의 흥망성쇠를 제시한 후, 한가지 예외, 서유럽 문명을 제시한다. 중세가 한계에 다다른 이후 서유럽 문명이 멸망하지 않았던 이유. 그들은 새로운 온대림이 펼쳐져 있는 거대한 대륙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더 이상 처녀림이 펼쳐져 있는 꿀이 흐르는 대지는 남아있지 않다고. 인류의 남아있는 미개척지 우주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메마르고 가혹한 곳임을 일깨운다.

한 때, 국민성과 지도자의 자질로 (야매스럽게) 설명되던 문명론을, 이제는 상당한 과학적 방법론에 기반하여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인류 전체의 문명을 떠바치고 있는 지구의 자원 서플라이 혹은 충격흡수 능력을 수치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탄소와 질소의 순환, 열이동, 종다양성 따위가 얼마 정도나 인간충격을 견딜 수 있는지 말할 수 있는 단계이다. 앞으로는 이런 자연환경적 맥락을 과학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문명론들, 혹은 자연을 언급하더라도 자의적으로 그것을 인간에 가져다 붙여 멋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문명론들은 가차없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것이다.

그 날 알펜 포어란트를 비행하던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할 때, 창 밖을 보니 뒤따라오는 비행기의 항법등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비행기가 내릴 활주로의 옆 활주로를 이용할 비행기가 다가오는 것 역시 보였다. 엄청난 양의 석유를 태워 수십톤이 넘는 금속 통을 공중에 띄우고, 그를 위해서 그 무거운 금속 통을 1 초에 300 미터의 속력으로 날리는 것도 놀랍기 그지 없지만, 그러면서도 그토록 정교하게 이들을 제어하고 관리하여,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곳으로 유도하는 모습에 또한 경이로움을 느꼈었다. 인류는 행성 지구에 대한 인간충격 역시 그 정도 이상으로 정밀하게 관리해야 한다.



오늘은 전국적인 산발적 정전이 있었다. 전력 사용량이 64 GW를 넘어섰기 때문이라고. 64 GW는 일인당 1280 W이고, 약 1.7 마력이다. 한 사람이 말 두 마리가 달라 붙어야 만들어 낼 에너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건강한 보통 사람이 지속적으로 낼 수 있는 일은 약 0.1 마력이라고 하므로, 현대 한국인은 17 명의 노예를 부리고 있는 샘이다. 한 가정으로 치면 노예가 한 50 명 붙어 있는 샘이므로, 100 년 전으로만 돌아가더라도 더 할 수 없는 호사이다. 그런데 과연 이 정도의 소비가 언제까지 가능할 수 있을까.

2011년 3월 16일 수요일

원자력 발전에 대한 의견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 사태가 차차 손아귀를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현대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환경문제는 지구온난화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화력발전의 비중을 줄이는 것이 다급하게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생기는 에너지의 부족은 아쉬우나마 원자력발전으로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원자력발전에 반대하는 환경론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고 여겼다. 방사능에 대한 비정상적인 공포 유발에서부터 시작하는 그들의 주장은 감성에 호소하는 면이 많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나오는 여러 주장 역시 신뢰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2000년를 전후하여 초반에 원자력폐기물 저장소의 입지 선정이 문제가 되었을 때, 지질이나 단층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에서 비롯된 주장을 펼쳐나간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는 국내 환경론자들을 일종의 극단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해왔다. 더군다나 현대의 미친듯한 에너지 소비를 충족시킬 수 있는,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현실적인 대안은 원자력 말고는 아직 생각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일본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고 있다. 시버트 단위로 표시되는 방사선량이 얼마만큼이나 뛰어오르는지 확인하면서 굉장히 놀랐다. 평소에는 시간당 나노 단위에서 놀고, 엑스레이를 찍을 때 마이크로 시버트 이러는데, 시간당 밀리 시버트가 파괴된 원전 근처에서 검출된다고 하니,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세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1-2 시버트를 받으면 한 달 내에 사망률 10%라고 한다. 일단 이정도 수준에서 대참사만은 면한다고 하더라도, 흩뿌려진 방사선 물질들 때문에 태평양에서 잡은 고기들을 마음 편히 먹기는 힘들지도 모르겠다. 태평양은 넓고, 사실은 그동안 많은 방사성 폐기물들이 버려져왔지만 말이다.

유럽은 원자력발전에 대하여 동아시아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아마도 체르노빌 참사를 보다 가까이에서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참사가 일본에서 발생한 것은 어떤 점에서는 행운인지 모르겠다. 중국에서 발생했다면, 그것은 원자력발전소가 위험해서라기 보다는, 중국이라서 그렇다는 쪽으로 해석되었을 공산이 크다. 한국이나 일본의 시민들은 보다 강력한 주장으로 원자력 발전에 반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 년 내에 중국 기원의 원전사고가 발생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에는 중국 정부의 공식적 언급보다 한국이나 일본의 방사능 관측대가 먼저 반응할 가능성이 높다.

원자력발전이 선택 가능한 해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리스크가 크다는 것이 알려진 이상, 다른 대체 에너지원을 활발히 개발하든가 아니면 에너지소비 자체를 줄여야 한다. 중국같은 개발도상에 있는 나라, 또는 한국처럼 성장중독에 있는 나라가 선택하기에 후자는 너무나도 비싼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청정에너지의 모범사례로 손꼽히는 독일. 나는 한달에 60kWh정도를 소비하는 댓가로 25 유로를 매달 지불한다. 세금은 30% 정도가 붙어 있다. 한국이라면 사용료 56.2원/kWh, 기본료 380원이 적용되므로 3752원이 나오는데 여기에 부가세와 기금을 곱하면 4280원이 되고, 이를 유로로 환산하면 2.75유로 정도가 나온다. (전기요금 계산은 http://jjangfree.tistory.com/865을 참조) (처음에 30kWh라고 썼다가 정확한 통계를 찾게 되어 4월 21일에 고쳤다. 고치기 전에는 각각 2066, 2360, 1.5 였다.) 나는 혼자 살고 있으므로 이는 아주 극단적인 예시일 수 있다. 일반적인 가정을 비교할 경우 그 차이는 줄어들 수 있겠지만, 그래도 독일의 전기요금이 한국에 비해 훨씬 비쌀 것임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청정에너지를 사용하는 댓가는 이 정도로 비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원자력에너지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며칠 전 독일 정부가 오래된 원전 7기(처음에 9기라고 썼다가 4월 8일 수정)의 임시가동중단을 결정하였으므로, 전기요금은 더 비싸질 것이다.

다시 한국의 경우로 돌아가 보자. 지난 겨울 전기 사용량이 공급을 턱 밑까지 따라 붙자 정부에서 전기요금 현실화 카드를 살짝 꺼냈서 간을 봤다가 사람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일단 물밑으로 접어 놓은 적이 있음을 기억하자. 그런데 원전을 폐쇄하자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짧은 인생을 돌아보건데, 국민학교·중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전등 스위치 위에는 절전 스티커가 붙어 있고, 물자절약 에너지절약 포스터 그리기 표어 짓기 따위를 했다. 절약이 미덕이 사회였던 것이다. 그랬는데 대학교 다닐 때는 이미 소비가 미덕인 사회가 되어 있었다. 그 빌어먹을 1997년 외환위기가 사회를 완전히 그리고 급속히 재편성해 버렸다. 한국의 일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소득에 비하여 높은 편이다. 소득에 비하여 소비량이 적은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다. 온돌이 건강에 좋은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에너지 효율이 높은 시스템인지는 잘 모르겠다. 비슷하게 배달시켜 먹는 문화는 확실히 에너지 과소비 측면이 있고, 승용차 같은 것도 다른 나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대형이다. 한국의 자동차 메이커들이 내수용 차량을 튼튼하게 만들지 않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전철망은 일본과 비교할 경우 형편 없는 수준인데, 땅값이 너무 올라버려 네트워크를 더 이상 확충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번 지진은 확실히 인류의 역사를 바꿀 지진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일본 경제의 침체 이런 정도가 아니라,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에 어떤 제한을 걸어버린 마법같은 지진으로 기록될 것 같다. 중국이나 인도 같은 신성장엔진들이 얼마만큼 원자력의 유혹을 떨쳐버릴지는 미지수이다. 아니 개인적으로는 좀 부정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유럽에서는 거의 확실히 원자력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것 같고, 그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나라나 다른 중간보스 급의 나라들에서도 원전에 대한 사회적 비용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하리라 예상한다.

사회적 비용이 그냥 웃기고 자빠진 소리가 아니다. 후쿠시마 원전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의 인터뷰에서 읽은 이야기다. 자기는 조상 대대로 거기서 살아 왔다고. 그런데 정부가 그 근처에 원전을 지었고, 이제는 위험하다고 밖으로 나가랜다. 어디로? 그리고 그가 살아왔던 땅과 마을에서 계속해 살아갈 당연한 권리는 어디로? 우리나라에서도 보상금으로 땅투기 해서 부자되라는 속삭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다들 좀 불편하게 살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다. 아니,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2010년 8월 15일 일요일

망국 100년, 나만의 핑계

500년을 지속했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조선이 망하고, 백성들은 망국노로 전락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났다. 오늘은 광복절이다.

대학에 와서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짬밥이 오를만큼 오른 4학년 때, 나는 동양사학과 과목이었던 개관일본사를 신청해 들었다. 수업 첫날 받은, 손으로 흘겨 쓴 수업소개 프린터에 쓰인 수업 제목은 개판일본사처럼 보였지만, 수업은 흥미로웠고, 일본사는 개판수준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개판. ㅋ

수업시간에 딱히 교과서가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읽어볼 책 목록의 많은 책 중에 피터 두으스의 일본근대사를 사서 읽었다. 일본의 고대사나 중세사에는 그 때까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 수업을 들은 이유도, 근대사를 읽은 이유도, 단 하나의 의문을 풀기 위해서였다. `왜  조선이 망하는 동안 일본은 안 망했지?'

문명의 발상지에서 멀리 떨어져있어, 청동기·철기의 전래도, 농업의 시작도 늦었던 일본, 율령국가를 세우기까지 한반도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던 일본,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제대로 경영해 본 경혐이 일천했던 일본이, 어떻게 근대 질서에는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었고, 그에 비하여 앞서 말한 조건들에서는 우위에 있었던 조선은 왜 멸망할 수 밖에 없었는지.

혹시 땅의 문제일까?

한양과 에도를 비교하면서 볼 수 있었던 많은 차이점 중에 솔깃하게 보였던 것 중 하나는 외국과의 교역에 대한 태도였다. 분명하다. 양 쪽 모두 쇄국을 기반으로 하였다. 그러나 에도 쪽이 좀 더 열려있었던 것 같다. 나가사키의 데시마에 해당하는 것은 조선에는 없었다. 그래서 데시마에서 시작된 난학,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하여 얻은, 신문물을 이용할 수 있는 태도가, 흑선 이후 일본의 성공을 설명할 수 있지 않는가.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쇄국은 기조로 했던 에도 막부가 데시마를 열었던 것은, 네덜란드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지 않는가. 왜 유럽세력은 조선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가. 그리고 또 다른 의문이다. 그렇다면 서양 문물에 훨씬 더 열려있었던 청조는 결국 서구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가.

첫 번째에 대하여 생각해야 할 요소는 판구조론이다. 일본은 새로운 대지이다. 활발한 화산활동은 필연적으로 많은 무거운 원소들을 지각에 쌓아두게 된다. 금속이다. 전통적으로 교역에 이용되는 금속원소 금·은·동이 조선보다는 일본에서 흔하게 채취되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유럽세력이 조선 보다는 일본과의 접촉에 더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좀 관심을 가지고 찾아본 바에 의하면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에도 막부시대의 일본은 멕시코에 이은 세계 제 2의 은 수출국이었다. 일본의 구리는 동남아시아로 흘러들어갔다.

그렇다면 조선은? 조선에도 은광·동광이 있다. 일본의 은 채취가 에도시대에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된 데에서는 조선에서 개발되었다고 하는 회취법의 전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재 조선 후기에는 금·은광이 사적으로 많이 개발되었다. 그런데 조선은 정책적으로 금·은광의 개발을 막아왔었다. 귀금속의 생산이 늘어나면 그만큼 조공으로 바쳐야 할 것이 많아져서 힘들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문제는 부존량의 문제가 아니었다. 조공 바치기 싫다고 중국과 맞장을 뜰 유인 동기가, 귀금속을 매개로 한 서양과의 교역에 있었을까. 지나친 흑백논리인가. 조선 후기 청과의 관계는 적대적이었고, 서양과의 교역에서 얻을 것은 조총 뿐이라고 생각했을 당시의 사대부들, 그리고 사치를 배격하는 유교 이데올로기는 충분히 귀금속 광산의 개발을 저지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더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농민을 있는 대로 쥐어 짜기만 하면 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체제를 완성한 조선 후기에는 은의 개발이 정책적으로 뒤바침되기에는 무리였을 지도 모른다. 더하여 왜란과 호란 양란으로 외국에 대한 피해의식에 쩔어있었을 사대부들이지 않는가.

하지만 조선 후기에도 국제무역은 중요한 경제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인삼은 조선의 주요 수출품이었고, 인삼을 팔아서 얻어진 부가 조선 후기 영·정조 때의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기반이라고 한다. 일본의 은은 서양의 범선 뿐만이 아니라 조선을 통해서도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조선의 인삼조차도 서양 세력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조선도 이에 대하여 결코 적극적이지 않았다. 아까 언급했듯이 이들은 피해의식과 두려움에 쩔어있었을 것이다. 동아시아 질서의 큰 변동이 있었던, 그래서 서양세력이 침입해 들어 올 작은 틈이 생겼던 16세기에, 조선은 양란의 충격을 가까스로 수습하는데 그쳤던 것 같다. 서양 세력이 함께하는 새로운 질서는 동아시아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들에 영향을 줄 만큼 아직 강한 힘을 가지지 못했고 (그래서 분열되어 있던 전국시대의 일본은 그 이후의 에도 막부에 비하면 서양에 활짝 열려있었다.), 내부적으로도 그닥 웰컴은 아니었다. 조선에게 있어 중국을 너머서는 작은 창을 열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첫 번째 기회는 그렇게 지나 간 것으로 보인다.

풍토가 문제일까?

석유(플라스틱 포함)·철강·콘크리트가 없는 현대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가. 전근대사회에서 이 세 가지 자원은 모두 목재에 대응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목재는 많은 경우 문명의 운명을 좌우하는 자원이었다. 조선 후기에 목재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은 명확하다. 18·19세기는 산송의 시대이다. 일반적으로는 유교사상의 확산으로 조상의 무덤자리를 차지하고 지키기 위하여 산송이 활발해졌다고 이야기하지만, 아마도 산소에 딸린 숲에 대한 배타적 재산권을 행사하기 위한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음이 근래에 밝혀지고 있다. 목재의 부족은 가옥의 구조와 크기를 축소시켰다. 곧게 뻗은 큰 목재는 서까래를 위해서 중요하다. 이런 목재가 희귀해지면서 집의 크기가 작아지거나, 나무를 잇대어 만들 수 있도록 구조가 변화하였다. 조선 정부는 금산령을 내리거나 불법적인 벌목을 단속하려 하지만,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경우 삼림자원의 관리는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받는다. 일본에서도 에도시대의 인구증가는 목재 수요의 급증을 가져왔고, 삼림자원에 대한 관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조선의 경우만큼 구체적인 사례는 알기 어렵지만, 약탈적 삼림 이용에서 관리형 삼림 이용으로의 전환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 받는다. 조선과는 달리 지방분권적이었던 에도 시대에는 각 번에게 삼림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관리에 대한 책임이 돌아가는 것도 일종의 압력으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이 차이에 대하여 재미있는 개인적인 경험이 있다. 수 년 전에 일본인 친구와 함께 서귀포에 간 적이 있다. 천지연 폭포 아래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걸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숲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짧은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충격적이었다. 그가 일본의 숲이라고 말하는 그 숲이 내 눈에는 이국적인 난대림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봄에 벗꽃구경을 간다는 일본의 삼림은 한국의 삼림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본인이 느끼는 한국의 숲은 좀 더 건조하고, 추운 지방의 숲이었던 것이다. 그의 고향은 가나자와이므로 일본에서도 위도상으로 보자면 딱 중간 즈음이다. 지형적으로도 강우가 많았으면 많았지, 기온은 한국의 평균과 다르지 않은 곳이다. 전에 한 번 나리타에서 도쿄로 들어갈 때 보았던 숲이, 심지어 부산에서 자란 내가 보기에도 좀 열대스러워 보였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났다. 그 때가 여름이라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일본과 한국의 숲의 차이가 개인적인 느낌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모노노케히메》에 묘사된 일본의 수해(樹海)를 떠올려 보라.

이것은 아마 숲의 생장 속도 역시 일본 쪽이 더 빠르거나 월등할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숲을 관리하려는 시도의 성패에 꽤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삶의 질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경제적 풍요로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더하여 조선 후기는 북반구에 소빙하기가 덮쳤을 때로 조선은 잦은 기근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이러한 경제적 제한이 조선 후기에 새로운 사상, 새로운 문화적 시도의 싹을 말려버렸다고 생각한다. 문화의 부흥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부흥을 필요로 한다. 조선이 충분히 풍요로운 사회였다면, 성리학이 제아무리 다른 사상을 배척하고, 그로 인하여 정치적인 통합을 완수했다 하더라도, 경제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사상의 대두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정치에서 배제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부유했던 중인계층에서 중국의 신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나, 결국에는 이들도 경제적인 기반을 통하여 성리학 및 기존 질서에 대응할만한 새력으로 대두하지는 못했다. 양명학과 고증학의 영향에 철저한 현실 인식이 더해져 만들어졌던 새로운 학문 경향인 실학은 자립적인 경제적·정치적 기반을 만들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왜 망했다는 말인데?

여러 개선의 기회들이 물리적인 한계로 인하여 도래하지 못했다. 17·18세기에는 희망적으로 보이는 몇 가지의 시도가 있었으나 조선은 완전히 성공하지도, 완전히 실패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조의 급작스런 죽음과 함께 19세기가 도래하였다. 이명래 고약이 한 세기만 일찍 만들어졌더라도, 세도정치라는 악마의 강림을 좀 더 미루거나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정조가 추구했던 탕평책을 통한 붕당정치의 해체가 세도정치가 성립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정조가 얼마나 개혁적인 생각을 가졌는지는 고민이 필요하다.)

조선이 결정적으로 썩게 된 데에는 세도정치의 탓이 크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세도정치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명분도 사라진, `권력의 사유화'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쇄도정치를 겪으면서 조선이라는 나라는 백성을 삥뜯는 양아치로 전락했다는 말이다. 관료는 조선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기 자신 또는 가문을 위해 일할 뿐이다. 붕당정치에서도 관료들은 자기 자신 또는 파당을 위해 일할 뿐이었으나, 최소한 파당의 일원이 되는 문은 조금이나마 열려 있었다. 그러나 세도정치에서는 모든 가능성이 닫혀버린다. 요즘 명성황후라 불리는 그 사람은 아무리 다시 봐도 민씨 일족의 이익을 위해 조선이라는 국가를 이용했다고 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다.

한 나라가 삥뜯는 양아치가 되었다면, 망해야지?

세도정치를 혁파한 흥선대원군은 일단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공포정치를 펼친다. 일단는 나라가 안으로 너무 썩어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문을 걸어잠그고 집안단속을 하기도 한 것이다.  집안단속은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그러나 쑨 죽을 또 다른 돼지새끼들은 민씨 일당이 홀랑 처먹어버렸다. 그리고 때가 너무 늦었다. 그가 집권한 1860년부터 실각했던 1873년까지, 일본은 흑선 이후의 격렬한 내전을 마무리하고, 메이지 유신과 대정봉환을 통해 근대화를 시작하였다.

게다가 그 이후에 권력을 잡은 민씨 일파나 고종이나 개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생각이 이었던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친위군이 신식군대가 되고, 서울에 전기가 통하는 것을 개화라고 여겼던 것 같다. 갑신정변은 어떠했던가. 이들은 일본처럼 되는 것이 개화라고 여긴 것 아니었을까. 1894년 갑오개혁에서야 조선의 현실에 기반한 개혁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미 일본은 청을 꺾어버렸다. 구르기 시작한 돌은 멈출 수가 없었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

조선의 멸망에는 물리적 요인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불가항력은 아니었다. 현대적이고 일반적인 언어로 기술하자면, 권력의 사유화, 배타적인 유일사상 숭배, 관념론의 절대화가 조선의 정신력을 약화시켰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하나도 고쳐지지 않았다. 권력의 사유화는 아직도 횡횡하고 있고, 배타적인 유일신 사상은 성리학에서 천민자본주의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를 개선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절대적인 신자유주의가 이 땅에 실현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모두가 예와 의를 지치면서 살게 되면, 이상사회가 실현될것이라는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생각에 이상하게 소위 말하는 사회지도층이 빠져있다. 혹은 이의 반대판으로 통일이 모든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담론도 소수 있기는 하다.

조선은 왜 망했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쇄국을 이야기하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전의 꼬라지를 보면, 흥선대원군이나마 있었기 때문에 19세기에 식민지가 되지는 않은 것 같다. 세도정치로 나라는 이미 끝장났다고 봐야한다. 쇄국은 아주 맛깔 땡기는 핑계거리이다. 첫째, 간단·명료하다. 둘째, 지배이데올로기에 봉사한다. 자유무역협정에 쇄국망국론이 어떻게 이용되는지 보라.

식민지 이후의 쇄국망국론은 딴지일보에서 읽은 임진왜란 이후의 조총패퇴론과 일맥상통한다. 패전상태에서 신무기에 대한 망상과 광신. 조선은 이를 백성에게 주입하는데에 성공한다. 그럼 병자호란은요?하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은 채. 쇄국망국론을 퍼트리는 한 못된 신문에서 임진왜란 때 선조가 조총에 각별한 신경을 쓰며 이에 대한 연구를 독려했음을 가지고 선조를 실용적인 인물로 추켜세우며 빨아준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에 기술자들에게 큰 돈을 들여 이 배를 연구하게 하여 결국 나무를 때서 추진하는 조선의 증기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이들이 모를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조 역시 성공하지는 못했다. 병자호란을 기억하라.

한일합방 100년의 광복절이다. 100년이 지나도록 왜 망했는지 모른다면, 부끄러운 일 아니겠는가. 조선이 망한 결정적 이유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권력의 사유화=양아치화 때문이다. 그런 배경을 만든 물리적 조건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다른 기회가 없었던 것 같지도 않고, 충분히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있었다.

근래 또 다른 양아치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200년의 양아치들이 권력을 잡고 시작한 일이 천주교 박해를 통해 지지기반을 공고히하고, 관직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개혁적 인사들을 시골로 쫓아보낸 일이다. 우리는권력의 변하지 않는 속성을 똑똑히 보고 있다.


PS. 위의 견해들은 주로 김기협, 김명관, 주경철, 이영훈, 제레드 다이아몬드, 피터 두으스 그리고 아외로워의 책이나 글에서 읽었던 사실이나 견해를 기초로하여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