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블이 과학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레이블이 과학인 게시물을 표시합니다. 모든 게시물 표시

2013년 3월 13일 수요일

화성에 생명체가 존재했었을 수 있는 조건을 확인

화성의 과거 기후가 생명체를 지탱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는 나사의 발표를 전하는 신문 기사를 인터넷을 통해 읽었다. 짧게 요약하자면, “수소, 탄소, 산소등이 검출되었으므로 과거 화성환경은 생명체 서식에 적당했다.”정도일 것인데, 솔직히 말해서 이게 기사냐? 두 문장으로 된 기사는 근거-결론의 구성인데, 각 문장 자체는 흠잡을 데 없다. 하지만 논리의 구성을 비유하자면 마치 “오늘은 날씨가 좋으므로, 나는 남자다.”라는 식으로, 근거에서 결론을 추론하는 내용이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 얼토당토않은 소리처럼 들린다는 것이 문제다.

외신을 번역하는 많은 과학기사들의 함량미달은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지만, 특히나 오늘 읽었던 그 기사는 성질 깊숙한 곳의 어떤 민감한 곳을 긁는 느낌이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짜증이 밀려오는 느낌이랄까. 이런 기사들의 소스는 뻔하다. 프레스 릴리즈. 역시나 홈페이지에는 바로 링크가 걸려 있었다 (2013-092). 예상대로 한국어로 번역된 그 기사는 그 프레스 릴리즈의 첫 세 문장을 번역한 것이었다. 첫 문장은 제목으로 갔고, 둘째 셋째 문장을 번역해서 기사로 올렸다. 원문의 나머지 4/5는 번역과정에서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번역된 부분 역시, 난데 없는 무기물 같은 단어가 나오는 것으로 봐서 썩 훌륭해 보이지는 않는다.

프레스 릴리즈를 내 나름 옮기자면 이렇다. 큐리오시티가 화성의 퇴적암에 구멍을 파서 만든 돌가루에서 황, 질소, 수소, 산소, , 탄소와 같은 생명 구성의 필수성분들을 확인했는데, 이것은 과거 화성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이었음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미션 관계자가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 근거와 해석 사이의 단차를 설명하는 부분이 버려진 4/5이다.

프레스 릴리즈의 버려진 부분은 먼저 샘플이 채집된 지역의 지질학적 셋팅을 설명한다. 큐리오시티가 샘플을 채집한 지역은 과거 하천의 말단부였거나 단속적인 호수들의 바닥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지역으로, 미생물들이 좋아할 만한 화학에너지 같은 조건들을 제공했었을 수 있었다. 이 내용은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꽤나 당연한 일인데, 외계인이 지구에 탐사선을 날려서 지적 생명체가 있는지 확인을 하고 싶어하는데, 그 탐사선이 바다 위를 열심히 찾아 다닌다면 목적을 완수하기 힘들 것이다. 큐리오시티는 물이 흘렀을 만한 곳을 찾아가 샘플을 땄다. 생명활동에 필수적인 용매로 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샘플을 채집한 암석에 관한 설명이다. 그 암석은 세립질 이암으로, 점토광물, 황산염광물을 비롯한 다른 화학물질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러한 구성으로부터 추론할 수 있는 과거의 습윤했던 환경은, 화성 다른 곳에서 발견된 바 있는, 심하게 산화시킨다거나, 산성이라던가, 혹은 매우 고염분의 환경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다. 또한 그 암석의 기반암은 과거의 수로망에 위치해 있었으며, 역시 세립질 이암임을 설명하면서, 지질학적 셋팅에서 예상되는 암석이 샘플로 쓰였음을 다시 설명한다. , 그렇다면, 큐리오시티의 관찰 결과, 즉 암석의 광물 구성이, 어떤 환경을 지시하길래 화성에서 이미 관찰되었었던 다른 환경과는 다르다는 말을 할 수 있는지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다음에 설명되어 있다.

일단 그 암석 샘플의 최소한 20%는 점토광물로 되어있다고 한다. 점토광물은 상대적으로 맑은 물이, 예를 들자면, 감람석 같이 화성암에서 나타나는 광물과 반응하여 생기는 광물이다. 점토광물의 존재는 흘렀던 물이 뭐가 많이 녹아 들어 있는 짠 물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짠 물에 노출된 화성암의 광물은 용질과 우선적으로 반응하여 점토광물이 아닌 다른 광물을 만들 것이다. 또한 암석 샘플에서는 황산칼슘이 검출되었는데, 이는 중성 또는 약 알칼리성 환경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로서 산성이 아닌 환경, 고염분이 아닌 환경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물질의 상태는 대체로 온도와 압력으로 기술된다. 똑같은 화학 구성을 가지는 혼합물이라도, 그것이 온도 1700도에 압력 1억 파스칼의 환경에서 안정되게 존재할 수 있는 모습과 지표 환경에서 안정되게 존재할 수 있는 모습은 전혀 다를 것이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점토광물은,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커먼 현무암을 이루고 있는 물질이, 습한 지구표면에서 가장 안정적으로 존재하는 형태라고 생각하면 된다. 점토광물은 지구상에 매우 흔하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흙이, 유기물과 미립질 석영 및 장석이 좀 포함되어 있는 점토광물의 혼합물이라고 생각해도 별로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점토광물이 화성의 표면에서 확인된 것이다. 또한 황산칼슘은 다른 말로 석고라고도 하는데, 물이 산성일 때에는 침전되지 않는가 보다. 인터넷을 뒤져 봤는데, 명확한 관계를 찾을 수 없었다.

매우 흥미로운 부분은 산화 환경의 화합물과 환원 환경의 화합물들이 섞여 나왔다는 데에 있다. 처음 드릴을 박을 때부터 산화를 나타내는 붉은 색이 아니라, 회색이 나왔다는 데에서 예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환원성 환경은 색을 통해서도 이미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화합물의 성분 또한 인상적인데, 황산염 광물과 황화광물이 섞여 나오고 있다는 점은, 미생물들이 화학에너지를 이용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지구에 살고 있는 시아노박테리아는 물(H20)을 이용해 광합성을 하는데, 물이 부족한 환경에서는 황화수소(H2S)를 이용해 광합성에 필요한 전자를 공급받고, 황과 황산염을 부산물로 내 놓는다.

큐리오시티는 과거의 하천에서의 작업을 끝내고 나면, 게일 크레이터의 센트럴피크인 몽 샤프로 이동할 계획인데, 거기에서도 점토광물과 황산염광물이 확인된 바 있다. 보다 다양한 생존환경에 대한 정보를 얻을 지도 모른다. 센트럴피크는 충돌구의 중앙부가 충돌 시의 압력에 대한 역작용으로 불룩 솟아오른 곳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화성의 크레이터들은 상대적으로 큰 센트럴피크를 가지고 있다.

이 정도가 프레스 릴리즈를 나름 번역·해석·보충한 것이다. 비록 그 첫 부분이 매우 압축적으로 제시되어 있지만, 납득하기 힘들었던 논리의 비약은 그 나머지 부분에 차근차근 설명되어 있었다. 한국어로 기사를 쓴 사람은 그 논리의 흐름 또한 한국어로 옮겼어야 했다.

마무리 짓기 전에 강조하고 싶은 한 가지는 광물은 환경을 지시한다는 점이다. 지구과학 II를 배우는 누구나 접하게 되는, 남정석·규선석·홍주석이 보여주는 산화알루미늄의 상태도는, 광물을 통해 환경을 유추하는 방법의 대표적인 예시를 보여주는 것이다. 화성의 과거 환경이 점토광물과 석고를 통해서 유추하는 것을 나사의 프레스 릴리즈에서 볼 수 있었다. 광물을 통해 환경을 유추하는 방법은, 인류 지식의 최전선에서 똑같은 원리에 입각하여 응용되고 있다.

2011년 4월 8일 금요일

지성인이 되고 싶었다

2학년 1학기 교양수업으로 나는 동아시아 문명의 사적 전개라는 수업을 들었다. 금요일 오후 수업이었으므로 전체 16강 중에, 첫 수업, 중간고사, 기말고사, 휴일 겹치는 거 빼고 하니까 11강인가 12강인가가 남았다. 그 중 8시간 중국사, 나머지 한일월 한 주씩. 이렇게 수업을 했다. 아, 중국사의 비중이 엄청나구나, 그것을 배웠다. 그 다음 3학년 1학기에는 외대 교수님께서 출강하신 교양 아랍어 수업을 들었고, 그 다다음 학기에는 개관 일본사, 그 다음에는 중화민국사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1학년 때는 문화인류학을 듣기도 했었네. 내 전공과는 아무 상관없는 수업이었지만, 배우고 싶었고, 실재로 재미있었고, 또 그 때가 아니면 결코 배울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결과는 보통이었다. 전공과목들과 별 차이 없는 점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개관 일본사는 평균보다 좀 많이 떨어지게 받았다. 일반 교양과목이 아니라 동양사학과 핵심교양과목이라서 그랬는가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존나 재미있었거든.

그런 경험을 통해서 전인적 교양에 한 발작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교과서 위주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선택과목의 자유도가 높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학습량이 많았지만, 전반적인 지식의 범위는 꽤 넓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대학의 공기는, 춥다고 창문 닫아 놓은 겨울철 남자 고등학교 교실의 공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스스로 박식하다고 여겼던 내가 아는 수준이란, 단지 그 세계의 베이스일 뿐이었다. 내가 전공으로 선택한 지구에 대한 이해를 완벽하게 하고 싶다는 욕심은 대학 입학 전부터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대학은 그것만 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많은 기회를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조금 한눈을 팔면서, 내가 궁금해 하고 재미있어하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수업들을 찾아 들었다.

사실에 대한 지식, 원리에 대한 이해, 합리적인 사고방식, 선입견과 반대되는 사실을 마주쳤을 때 가져야할 태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 것들로부터 만들어지는, (인문·사회·자연·예술 모든 측면을 망라한) 세상을 바라보는 오직 그 사람만의 관점. 이런 것들이 바로 전인적 교양교육을 통해 얻어지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추에 대한 기호, 선·악에 대한 판별은 개성의 문제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므로 제외했다. 그리고 이런 전인적 교양에 덧붙여, 혹은 더불어 전문적 지식과 경험이 쌓여야 비로소 하나의 사회인이 완성되고, 이에 추가로 행동하는 용기가 더해지면, 그 때야말로 그 사람을 지성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성인이 되고 싶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치기 어렸지만, 자연과학을 공부한다는 점에서 정말로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었다. 인문대 수업을 들으면서 전혀 생소한 방법론들을 접할 때도,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이 이질적인 요소들이 수렴되는 지점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지금 역시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 때보다는 많이 게을러졌고, 사실 시간이 지난만큼 쌓인 것도 별로 없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학점 잘 주는 수업을 골라 듣는 사람들을 낮추어 보았다. 수강편람을 뒤지며 수업을 찾을 때, 누구 수업이 재미있다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어디서 들었는지 누구 교수가 학점을 잘 준다고 하니 그 수업을 듣겠다는 말에는 언짢게 반응했었다. 비례물청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포카페이스가 아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하려했지만, 정색하는 내 표정을 상대는 분명히 봤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앞서 말한 그 단 한 부분에서는 확신에 차 있었다. “학점좆망가능”이라는 경고는 무섭지도 않았었다. 신기하고 재미있었고, 그래서 나는 굶어야 할 만큼 돈이 없었지만, 그런데도 심지어 행복했었다.



언론을 통해 보이는 지금 대학의 공기는, 내가 느꼈던 공기와는 확연히 달라 보인다. 어느 학교에서건, 학생들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자유는 학점과 스펙의 경쟁뿐인 듯하다. 대한민국은 빚을 강요함으로서 전 국민을 거대자본권력에게 인신적으로 종속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국민들은,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젊은이들의 피를 바쳐 얻어내자마자, 그 자유로 빚을 내어 그들의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자본에게 가져다 바쳤다. 빚을 내는 순간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그들의 현재를,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은 그들의 미래를 저당 잡혔다. 빚을 진 사람은 정말로 노예가 된다. 현재의 대학생들은 학자금 융자 빚과는 관계없이, 이미 미래가 자본권력에 손에 저당 잡혔다. 그들이 채권자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할 자유 따위는 이미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전인적 교양교육을 강요할 수 있는가? 기성세대가? 그럴 수 있다면, 그들에게는 내가 이명박에게 주는 경멸을 보낸다. 단 지금의 대학생들은 용기라는 고귀한 가치를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나와 내 또래는 배울 수 없었던 그 용기라는 가치 말이다.

또 다시 최고수준의 이공계 학생이 자살했다. 올해 들어서 그가 다니던 학교에서만 벌써 네 번째다. 징벌적 등록금제 때문에 생긴 심리적 압박이 그 원인이라고 하는데에, 동의한다.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학점으로 사람들 들들 볶으면, 전인적 교양교육은 불가능하다. 물론 대학의 존재 가치에서 전인적 교양인을 양성하는 측면은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고, 전적으로 전문적인 기능인을 양성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고 우긴다면 그 지점에서는 논리를 맞추겠지만, 그렇다면 대학과 직업학교는 어떻게 다르며, 직업인을 육성하는데 드는 비용을 왜 기업이 아닌 가계가 부담하느냐는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다음 질문이다. 징벌적 등록금을 도입한 사람을 과연 교육자로 볼 수 있는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현명한 채권자는 채무자들에게 자신이 주인임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채무자들을 경쟁시킬 뿐이다. 그 대학교의 총장이라는 서남표라는 작자도, 채권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 역시 다른 대학총장들과 경쟁을 하는 채무자에 불과하다. 채권자가 왜 경쟁을 하겠는가? 대가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따라서 총장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교육자라는 것은 의복에 불과하다. 만약 그가 공기업에 낙하산을 타고 가면 경영자가 될 것 아닌가. 옷을 갈아입는다고 채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경쟁이라지만 도라는 게 있다. 점수나 등수는 어쨌든 한 개 스칼라량에 불과하기 때문에 모든 정보를, 혹은 요새 유행하는 말로는, 모든 비용이나 편익을 표현할 수 없다. 잔인한 학점·등록금 경쟁을 붙여 학교 평가등수가 높아졌는지 모르지만, 그 향상된 어떤 가상의 지표는 그 경쟁 때문에 작아져 버린 학생들의 행복도는 포함하고 있지 않은 지표이다. 여기에서 매우 정의롭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학교 평가등수 상승이라는 이익은 총장에게 가고, 행복도의 하락이라는 손실은 학생에게 돌아간다. 요새는 그 말도 유행하데. “이익의 사유화, 손일의 사회화”라고.

어떤 문제에서 고려하지 않는 변수라는 말은, 그것이 실재로는 존재함을 의미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2011년 2월 8일 화요일

배우고 알게 된다는 것

학회가 끝나고, 로마 시내를 구경하기 위해 일행과 헤어졌다. 학회장 근처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밀라노에 온 또 다른 학회 참석자와 만나게 되어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양반 역시 기차를 타려면 시내까지 가야 하니까.

내가 주제로 잡고 있는 부분은 간단한 행렬로 그 문제가 기술될 수 있다. 즉, 간단한 선형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학회에서 사람들이 그 주제로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나는 이것이 간단한 선형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무엇이 문제이길래 이것이 계속 이야기되는지. 그 사람은 전자 전공이었기 때문에, 내가 잘 모르고 서툰 부분들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의 대답은 요약해서 이야기하자면, “감지기는 자극에 선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선형성을 줄이기 위한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보정계수나 식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진부한 표현으로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풀고 있었던 것은 그렇다면 연습문제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니까. 하하.


수학으로 계산되는 깔끔한 모델에 심취해 이를 좋아했었는데, 그것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기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끔 쓰는 state of art라는 용어, 기술적 노하우들이 쉽게 전달이 안되는 이유는 그런 비선형성들이 이론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기술들은 한 사람의 경험자에 의해서 유지될 수도 있겠지만, 다양한 분야의 경력자들을 조화롭게 조직하는 것을 통해서만이 유지될 수도 있다. 외국의 석학을 모셔와 강의를 맡긴다는 기획들은, 재대로 된 기술적·학술적 경험을 해 본 사람의 아이디어는 결코 아닐 것이다. 미국의 연구기관에 많은 외국인들이 활약하고 있지만, 그들이 고국에 돌아가서 같은 수준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단지 기자재가 빈약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기술과 과학은 다르다고. 맞다. 합리적인 의문을 품고, 객관적인 실험과 관찰을 통해 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체계적인 지식을 쌓아가는 방법인 과학은, 뭔가 멋진 것을 만들어 내어야 할 것 같은 기술과는 격이 다른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기술은 객관적인 실험과 관찰의 다른 말이다. 실재로 유명한 과학자들 중에는 의문을 풀기 위해 스스로 기구를 고안하여 실험을 한 이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그런 기구들의 성능은 당대의 기술적 수준에 의해 제한된다. 의문->관측·실험->지식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관측과 실험이 빠지게 되면, 의문은 신화가 되고, 종교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된다.

요즘에도 대학에서 실험·실습이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언론만 보면 요즘 대학생들은 그저 취업준비에 미쳐서 영어와 쉬운 학점에만 목멘다고들 한다. 그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대학은 이미 현장에서 활동할 사람들을 키우는 기관이 아니라, 단지 다시 한 번 젊은이들의 카스트를 파인튜닝 해주는 기관으로 변질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뭔가를 배우고 알게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스템의 비선형성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