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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5일 일요일

망국 100년, 나만의 핑계

500년을 지속했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조선이 망하고, 백성들은 망국노로 전락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났다. 오늘은 광복절이다.

대학에 와서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짬밥이 오를만큼 오른 4학년 때, 나는 동양사학과 과목이었던 개관일본사를 신청해 들었다. 수업 첫날 받은, 손으로 흘겨 쓴 수업소개 프린터에 쓰인 수업 제목은 개판일본사처럼 보였지만, 수업은 흥미로웠고, 일본사는 개판수준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개판. ㅋ

수업시간에 딱히 교과서가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읽어볼 책 목록의 많은 책 중에 피터 두으스의 일본근대사를 사서 읽었다. 일본의 고대사나 중세사에는 그 때까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 수업을 들은 이유도, 근대사를 읽은 이유도, 단 하나의 의문을 풀기 위해서였다. `왜  조선이 망하는 동안 일본은 안 망했지?'

문명의 발상지에서 멀리 떨어져있어, 청동기·철기의 전래도, 농업의 시작도 늦었던 일본, 율령국가를 세우기까지 한반도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던 일본,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제대로 경영해 본 경혐이 일천했던 일본이, 어떻게 근대 질서에는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었고, 그에 비하여 앞서 말한 조건들에서는 우위에 있었던 조선은 왜 멸망할 수 밖에 없었는지.

혹시 땅의 문제일까?

한양과 에도를 비교하면서 볼 수 있었던 많은 차이점 중에 솔깃하게 보였던 것 중 하나는 외국과의 교역에 대한 태도였다. 분명하다. 양 쪽 모두 쇄국을 기반으로 하였다. 그러나 에도 쪽이 좀 더 열려있었던 것 같다. 나가사키의 데시마에 해당하는 것은 조선에는 없었다. 그래서 데시마에서 시작된 난학,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하여 얻은, 신문물을 이용할 수 있는 태도가, 흑선 이후 일본의 성공을 설명할 수 있지 않는가.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쇄국은 기조로 했던 에도 막부가 데시마를 열었던 것은, 네덜란드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지 않는가. 왜 유럽세력은 조선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가. 그리고 또 다른 의문이다. 그렇다면 서양 문물에 훨씬 더 열려있었던 청조는 결국 서구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가.

첫 번째에 대하여 생각해야 할 요소는 판구조론이다. 일본은 새로운 대지이다. 활발한 화산활동은 필연적으로 많은 무거운 원소들을 지각에 쌓아두게 된다. 금속이다. 전통적으로 교역에 이용되는 금속원소 금·은·동이 조선보다는 일본에서 흔하게 채취되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유럽세력이 조선 보다는 일본과의 접촉에 더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좀 관심을 가지고 찾아본 바에 의하면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에도 막부시대의 일본은 멕시코에 이은 세계 제 2의 은 수출국이었다. 일본의 구리는 동남아시아로 흘러들어갔다.

그렇다면 조선은? 조선에도 은광·동광이 있다. 일본의 은 채취가 에도시대에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된 데에서는 조선에서 개발되었다고 하는 회취법의 전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재 조선 후기에는 금·은광이 사적으로 많이 개발되었다. 그런데 조선은 정책적으로 금·은광의 개발을 막아왔었다. 귀금속의 생산이 늘어나면 그만큼 조공으로 바쳐야 할 것이 많아져서 힘들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문제는 부존량의 문제가 아니었다. 조공 바치기 싫다고 중국과 맞장을 뜰 유인 동기가, 귀금속을 매개로 한 서양과의 교역에 있었을까. 지나친 흑백논리인가. 조선 후기 청과의 관계는 적대적이었고, 서양과의 교역에서 얻을 것은 조총 뿐이라고 생각했을 당시의 사대부들, 그리고 사치를 배격하는 유교 이데올로기는 충분히 귀금속 광산의 개발을 저지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더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농민을 있는 대로 쥐어 짜기만 하면 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체제를 완성한 조선 후기에는 은의 개발이 정책적으로 뒤바침되기에는 무리였을 지도 모른다. 더하여 왜란과 호란 양란으로 외국에 대한 피해의식에 쩔어있었을 사대부들이지 않는가.

하지만 조선 후기에도 국제무역은 중요한 경제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인삼은 조선의 주요 수출품이었고, 인삼을 팔아서 얻어진 부가 조선 후기 영·정조 때의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기반이라고 한다. 일본의 은은 서양의 범선 뿐만이 아니라 조선을 통해서도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조선의 인삼조차도 서양 세력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조선도 이에 대하여 결코 적극적이지 않았다. 아까 언급했듯이 이들은 피해의식과 두려움에 쩔어있었을 것이다. 동아시아 질서의 큰 변동이 있었던, 그래서 서양세력이 침입해 들어 올 작은 틈이 생겼던 16세기에, 조선은 양란의 충격을 가까스로 수습하는데 그쳤던 것 같다. 서양 세력이 함께하는 새로운 질서는 동아시아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들에 영향을 줄 만큼 아직 강한 힘을 가지지 못했고 (그래서 분열되어 있던 전국시대의 일본은 그 이후의 에도 막부에 비하면 서양에 활짝 열려있었다.), 내부적으로도 그닥 웰컴은 아니었다. 조선에게 있어 중국을 너머서는 작은 창을 열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첫 번째 기회는 그렇게 지나 간 것으로 보인다.

풍토가 문제일까?

석유(플라스틱 포함)·철강·콘크리트가 없는 현대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가. 전근대사회에서 이 세 가지 자원은 모두 목재에 대응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목재는 많은 경우 문명의 운명을 좌우하는 자원이었다. 조선 후기에 목재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은 명확하다. 18·19세기는 산송의 시대이다. 일반적으로는 유교사상의 확산으로 조상의 무덤자리를 차지하고 지키기 위하여 산송이 활발해졌다고 이야기하지만, 아마도 산소에 딸린 숲에 대한 배타적 재산권을 행사하기 위한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음이 근래에 밝혀지고 있다. 목재의 부족은 가옥의 구조와 크기를 축소시켰다. 곧게 뻗은 큰 목재는 서까래를 위해서 중요하다. 이런 목재가 희귀해지면서 집의 크기가 작아지거나, 나무를 잇대어 만들 수 있도록 구조가 변화하였다. 조선 정부는 금산령을 내리거나 불법적인 벌목을 단속하려 하지만,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경우 삼림자원의 관리는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받는다. 일본에서도 에도시대의 인구증가는 목재 수요의 급증을 가져왔고, 삼림자원에 대한 관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조선의 경우만큼 구체적인 사례는 알기 어렵지만, 약탈적 삼림 이용에서 관리형 삼림 이용으로의 전환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 받는다. 조선과는 달리 지방분권적이었던 에도 시대에는 각 번에게 삼림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관리에 대한 책임이 돌아가는 것도 일종의 압력으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이 차이에 대하여 재미있는 개인적인 경험이 있다. 수 년 전에 일본인 친구와 함께 서귀포에 간 적이 있다. 천지연 폭포 아래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걸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숲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짧은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충격적이었다. 그가 일본의 숲이라고 말하는 그 숲이 내 눈에는 이국적인 난대림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봄에 벗꽃구경을 간다는 일본의 삼림은 한국의 삼림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본인이 느끼는 한국의 숲은 좀 더 건조하고, 추운 지방의 숲이었던 것이다. 그의 고향은 가나자와이므로 일본에서도 위도상으로 보자면 딱 중간 즈음이다. 지형적으로도 강우가 많았으면 많았지, 기온은 한국의 평균과 다르지 않은 곳이다. 전에 한 번 나리타에서 도쿄로 들어갈 때 보았던 숲이, 심지어 부산에서 자란 내가 보기에도 좀 열대스러워 보였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났다. 그 때가 여름이라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일본과 한국의 숲의 차이가 개인적인 느낌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모노노케히메》에 묘사된 일본의 수해(樹海)를 떠올려 보라.

이것은 아마 숲의 생장 속도 역시 일본 쪽이 더 빠르거나 월등할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숲을 관리하려는 시도의 성패에 꽤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삶의 질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경제적 풍요로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더하여 조선 후기는 북반구에 소빙하기가 덮쳤을 때로 조선은 잦은 기근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이러한 경제적 제한이 조선 후기에 새로운 사상, 새로운 문화적 시도의 싹을 말려버렸다고 생각한다. 문화의 부흥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부흥을 필요로 한다. 조선이 충분히 풍요로운 사회였다면, 성리학이 제아무리 다른 사상을 배척하고, 그로 인하여 정치적인 통합을 완수했다 하더라도, 경제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사상의 대두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정치에서 배제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부유했던 중인계층에서 중국의 신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나, 결국에는 이들도 경제적인 기반을 통하여 성리학 및 기존 질서에 대응할만한 새력으로 대두하지는 못했다. 양명학과 고증학의 영향에 철저한 현실 인식이 더해져 만들어졌던 새로운 학문 경향인 실학은 자립적인 경제적·정치적 기반을 만들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왜 망했다는 말인데?

여러 개선의 기회들이 물리적인 한계로 인하여 도래하지 못했다. 17·18세기에는 희망적으로 보이는 몇 가지의 시도가 있었으나 조선은 완전히 성공하지도, 완전히 실패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조의 급작스런 죽음과 함께 19세기가 도래하였다. 이명래 고약이 한 세기만 일찍 만들어졌더라도, 세도정치라는 악마의 강림을 좀 더 미루거나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정조가 추구했던 탕평책을 통한 붕당정치의 해체가 세도정치가 성립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정조가 얼마나 개혁적인 생각을 가졌는지는 고민이 필요하다.)

조선이 결정적으로 썩게 된 데에는 세도정치의 탓이 크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세도정치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명분도 사라진, `권력의 사유화'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쇄도정치를 겪으면서 조선이라는 나라는 백성을 삥뜯는 양아치로 전락했다는 말이다. 관료는 조선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기 자신 또는 가문을 위해 일할 뿐이다. 붕당정치에서도 관료들은 자기 자신 또는 파당을 위해 일할 뿐이었으나, 최소한 파당의 일원이 되는 문은 조금이나마 열려 있었다. 그러나 세도정치에서는 모든 가능성이 닫혀버린다. 요즘 명성황후라 불리는 그 사람은 아무리 다시 봐도 민씨 일족의 이익을 위해 조선이라는 국가를 이용했다고 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다.

한 나라가 삥뜯는 양아치가 되었다면, 망해야지?

세도정치를 혁파한 흥선대원군은 일단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공포정치를 펼친다. 일단는 나라가 안으로 너무 썩어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문을 걸어잠그고 집안단속을 하기도 한 것이다.  집안단속은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그러나 쑨 죽을 또 다른 돼지새끼들은 민씨 일당이 홀랑 처먹어버렸다. 그리고 때가 너무 늦었다. 그가 집권한 1860년부터 실각했던 1873년까지, 일본은 흑선 이후의 격렬한 내전을 마무리하고, 메이지 유신과 대정봉환을 통해 근대화를 시작하였다.

게다가 그 이후에 권력을 잡은 민씨 일파나 고종이나 개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생각이 이었던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친위군이 신식군대가 되고, 서울에 전기가 통하는 것을 개화라고 여겼던 것 같다. 갑신정변은 어떠했던가. 이들은 일본처럼 되는 것이 개화라고 여긴 것 아니었을까. 1894년 갑오개혁에서야 조선의 현실에 기반한 개혁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미 일본은 청을 꺾어버렸다. 구르기 시작한 돌은 멈출 수가 없었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

조선의 멸망에는 물리적 요인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불가항력은 아니었다. 현대적이고 일반적인 언어로 기술하자면, 권력의 사유화, 배타적인 유일사상 숭배, 관념론의 절대화가 조선의 정신력을 약화시켰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하나도 고쳐지지 않았다. 권력의 사유화는 아직도 횡횡하고 있고, 배타적인 유일신 사상은 성리학에서 천민자본주의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를 개선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절대적인 신자유주의가 이 땅에 실현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모두가 예와 의를 지치면서 살게 되면, 이상사회가 실현될것이라는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생각에 이상하게 소위 말하는 사회지도층이 빠져있다. 혹은 이의 반대판으로 통일이 모든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담론도 소수 있기는 하다.

조선은 왜 망했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쇄국을 이야기하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전의 꼬라지를 보면, 흥선대원군이나마 있었기 때문에 19세기에 식민지가 되지는 않은 것 같다. 세도정치로 나라는 이미 끝장났다고 봐야한다. 쇄국은 아주 맛깔 땡기는 핑계거리이다. 첫째, 간단·명료하다. 둘째, 지배이데올로기에 봉사한다. 자유무역협정에 쇄국망국론이 어떻게 이용되는지 보라.

식민지 이후의 쇄국망국론은 딴지일보에서 읽은 임진왜란 이후의 조총패퇴론과 일맥상통한다. 패전상태에서 신무기에 대한 망상과 광신. 조선은 이를 백성에게 주입하는데에 성공한다. 그럼 병자호란은요?하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은 채. 쇄국망국론을 퍼트리는 한 못된 신문에서 임진왜란 때 선조가 조총에 각별한 신경을 쓰며 이에 대한 연구를 독려했음을 가지고 선조를 실용적인 인물로 추켜세우며 빨아준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에 기술자들에게 큰 돈을 들여 이 배를 연구하게 하여 결국 나무를 때서 추진하는 조선의 증기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이들이 모를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조 역시 성공하지는 못했다. 병자호란을 기억하라.

한일합방 100년의 광복절이다. 100년이 지나도록 왜 망했는지 모른다면, 부끄러운 일 아니겠는가. 조선이 망한 결정적 이유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권력의 사유화=양아치화 때문이다. 그런 배경을 만든 물리적 조건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다른 기회가 없었던 것 같지도 않고, 충분히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있었다.

근래 또 다른 양아치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200년의 양아치들이 권력을 잡고 시작한 일이 천주교 박해를 통해 지지기반을 공고히하고, 관직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개혁적 인사들을 시골로 쫓아보낸 일이다. 우리는권력의 변하지 않는 속성을 똑똑히 보고 있다.


PS. 위의 견해들은 주로 김기협, 김명관, 주경철, 이영훈, 제레드 다이아몬드, 피터 두으스 그리고 아외로워의 책이나 글에서 읽었던 사실이나 견해를 기초로하여 작성되었다.

2010년 2월 22일 월요일

오바마가 한국 교육 칭찬하면 좋습니까?

오바마가 한국의 교육열을 예로 들면서 미국민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했다는 사실은 심심치않게 언론에 보도된다. 상국의 황제께서 일개 번국을 기특히 여기며 이를 배워야한다고 반복해서 말씀하시는데, 왜 청현직의 인사들이 꺼뻑죽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는 많이 불편하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도 오바마의 그런 발언이 불편한 분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 이유가 한국의 “지나친” 교육열이 오히려 교육을 황폐화시키고 있는 마당에, 불완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오바마의 인상비평이 한국의 교육현실에 역효과를 내지 않을까하는 걱정일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미친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교육을 통한 계층 고착화에 오바마의 설익은 언급이 이용되지나 않을까하는 불안감이 그것이다.

난 아직까지 자식이 없다. 말하자면 그 불편함이 사교육이나 경쟁 같은 이유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한국 교육이 괴물이고 기형이라는 의견에는 백번 천번 동감한다. 그러나 오바마의 한국 교육열 운운에 내가 불편해지는 이유는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 내가 언짢아지는 이유는, 단순히 말하면 자존심 상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쓸 이야기가 범인류적인 상식과 괴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혼자 생각만 하고 있으려고 했던 것들이다.



나는 한국이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할지에 대하여 많이 생각한다. 한국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국내에는 크게 두가지 견해가 있는데, 한국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켜온 혈통있는 나라라는 견해와, 한국은 그저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신생독립국 중의 하나라는 견해가 있다.

당연히 첫번째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불행히도 두번째 견해는 우리나라에 상당히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일례로 8월 15일을 건국절로 만들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으로부터, 저 두번째 견해란 것이 내가 썰을 풀기 위해 실체도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사실 두번째 견해를 뒤바침할 만한 요소는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다. 한국의 사회 시스템은 실재 일본 것을 많이 복사했고, 요즘은 고급 지식을 얻기 위해, “오로지” 미국에만 의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공부한 사람들이 의사결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뿐인가, 영어공용화론이 나름 진진하게 논의 되는 모습은 식민지 지식인들이 했던 고뇌들과 많이 비슷해보인다.



12년 전에도 그랬다. 사람들의 자존감이 낮아져서 사회가 동요하는 것을, 그 위에 올라타 있는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불만과 자존감을 투사할 허상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불만을 투사하기위해 외국인 노동자와 빨갱이가(요건 딴지일보 독자불패에서 읽었다), 자존감을 투사하기 위해 국가가 동원된다. 웬만해서는 민족을 동원하는 것이 한단계 더 심원하겠지만, 그러면 빨갱이를 끌어 안아야하기 때문에 민족보다는 국가가 전면에 나서게 된다. 따라서 나같이 자존감을 어딘가에 투사해야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1948년에 시작하는 역사를 강요받는 것이다. 극도의 혼란속의 단독정부 수립, 전쟁, 계속되는 혼란, 지수함수적인 경제성장, 민주항쟁, 올림픽,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 부도극복, 월드컵. (어? 뭐가 빠졌네?) 이 모든 과정을 다 지켜 본 사람이 한 둘도 아니고, 국민 중에 예순 넘은 사람 전부다. 캬, 내가 써 놓고 봐도 정말 멋지고 간지철철 대한민국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면 자문해 볼만하다,

“대한민국 대박친거 아냐?”



이제 내가 학교에서 배운대로 줄세우기를 해 보겠다. 사실 전쟁 후의 폐허에서 재활한 나라를 성공적인 순서대로 써 보자면, 그 첫번째는 소련이다. 그 다음에 독일과 일본이 있고, 그 다음 등수로 프랑스, 이탈리아를 들 수 있겠다. 소련은 히틀러 때문에 우랄산맥 서쪽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됐고, 전쟁으로인한 인력손실도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종전직후부터 소련은 최소한 본토에는 폭탄하나 떨어지지않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월드투톱이 된다. (아 사실 미국에는 일본이 풍선에 매달아 날려보낸 폭탄이 몇 개 떨어지고, 일본 잠수함에 의해서도 태평양의 항구가 공격받은 적이 있다고는 하네요. 별 의미를 두지는 못할 것들입니다만.) 독일은 어떤가. 독일은 본토가 전쟁으로 사실상 폐허가 되었고, 분단까지 당했다. 서독만 치면 나라가 그야말로 반토막이 났다. (1938년의 국경선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 상황에서 서독은 금방 세계 수출의 넘버 2가 되었다. 일본은 본토가 공격받지는 않았지만, 패전후의 상황은 정말 참담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는 국토가 전장이었다. 아, 이따위 순위메기기가 말도 안되는 거고, 그리 될 수 밖에 없는 많은 정치·경제적 이유들이 있었다는 것, 알고 있다. 그러나 일단 한국까지는 해야되지 않겠나. 한국은 전쟁이 유럽이나 미국과 비교하면 한 8년 후에 끝났다는점을 고려해도, 이들에 비하면 좀 늦은 편이다. 그리고 최종적 성취 역시 이들과 비교되기에는 모자란다. 이런 비교를 하면 당연히 불만이 터져 나올 것이다. 불공평한 비교라고. 왜? 우리나라는 식민지에서 출발했으니까.


그렇다면 우리와 비교를 할 나라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나라들이다. 가까이 아시아의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인도. 이라크, 시리아, 사우디. 좀 멀리 아프리카의.. 음.. 여러 나라들. 이들 중에서 최소한 전쟁의 피해를 입었던 나라만을 꺼내 봐도, 필리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요 두 나라에는 베트남 전쟁때 꽤나 폭탄이 떨어졌었다) 정도가 되겠다.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는 우리보다 상태가 더 좋았네. 전쟁의 참화는 비켜갔으니까. 자, 이들과 비교하는 것은 그렇다면 이제 공정한 비교이겠는가.

이렇게 눈을 낮춰보면, 대한민국은 대박쳤다. 진짜다. 2차대전후에 독립한 나라들 중에 어데 지금 성한 나라 있더뇨. 신생독립국들 가운데 한국만큼 경제적으로 번영한 곳도 없고, 신생독립국들 가운데 한국만큼 형식상의 민주주의나마 작동하고 있는 곳도 그다지 많지 않다. 신생독립국들 가운데 한국만큼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도 별로 없고, 신생독립국들 가운데 한국만큼 과학·기술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는 나라도 없다. 신생독립국들 가운데 한국만큼 치안이 안전한 곳도 없고, 신생독립국들 가운데 한국만큼 대중문화든 전통문화든 독립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는 나라도 별로 없다.

그렇다. 대한민국의 기적은 2차대전이후의 신생독립국으로서의 “기적”이다.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이라면, 이것도 별로 공정하지 못한 비교라고 느낄 것이다. 그리고 웬지 무시당하는 느낌이지 않을까. 내가 오바마의 한국 교육열 운운을 들었을 때 받는 느낌은 그 느낌과 같은 종류의 찝찝함이다.

이들 나라와의 비교를 통해 보면, 우리가 “기적”이라 부르면서 가슴벅차했던 것들이 상당한 측면에서 그럴 수 밖에 없는 것들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성공 순위의 우리 앞자리에 있던 나라들이 거기 설 수 밖에 없었던 것 처럼 말이다. 한국은 오랜 역사를 통해 행정, 경제, 군사, 문화 등을 발전시키고 경영해 본 “경험”이 있는 나라였다. 그 말은 그런 시스템을 운영해 본 사람이 있다는 측면보다는, 이미 그 국민이 그러한 조직적 행정의 “피경험인”이었다는 것에 중점이 주어진다. 한국은 필리핀은 할 수 없었던 일사분란한 동원체제를 만들어 경제성장을 향해 나갈 수 있었고, 시험이라는 미끼를 만들어 학교를 통해 현대국가가 국민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를 철저히 교육할 수 있었다. 과거시험의 전통이 없었던들 이것이 그리 쉬웠을까. 한국에는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같이 지역별 호족가문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아프리카의 여러나라들처럼 부족간 갈등이 있는 나라도 아니었다. 한국인이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일본의 식민지배는 매우 다른 형태를 보였을 것이다. 그 예를 바로 일본의 타이완 지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나마 베트남이 가장 근접한 형태의 중앙집권을 시도해 본 역사적 경험이 있는 나라고, 그 경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에도 그리고 중국에도 이겨본 적이 있는 나라가 되었다. 그 외의 나라들은 어떤가. 그렇다면 한국전쟁 이후의 한국은 기적의 발전을 보인 것이 아니라,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또는 보다 공격적으로 말해서, 대한민국의 기적을 강조하는 것은 그 반동력으로 식민지 경험을 정당화한다고 볼 수 있지 않는가.



내가 오바마에게서 느끼는 불만을 보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한국의 성공을 교육만으로 이야기하려는 단순함에 대한 불만이다. 거기에는 한국이 20세기의 쓰디쓴 실패 이전에 성취했던 높은 수준의 사회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있다. 한국의 경제적 성공의 주요한 요인으로 교육열을 본 것은 현명하지만, 그 교육열의 연원이 무엇인지는 찾지 않는 단견(그런데 누구나 다 그렇다)에 대한 아쉬움이다. 그리고 오바마의 발언을 열렬히 옮겨대는 매체들이 정말 이런 생각을 못해서라기 보다는, 역사의식의 단절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계급적 이익에 복무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 때문이다.

어찌보면 식민지 35년은 짧은 시간이다. 이미 독립 후로 그보다 2배 가까운 시간이 흐르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많은 식자들은 아직 남아있는 식민지의 해독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리고 내가 이야기하는 것 또한 식민지의 해독에 관한 이야기이다. 식민지는 자립적인 성장이 되지 못하도록 방해를 받는다는 점이 가장 나쁘다. 강점기를 통틀어 조선인의 자본축적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었고, 정치참여 또한 얼마나 제한되어 있었던가. 그런 것에 비하면 신사참배강요나 창씨개명같은 어거지 짓은 악세사리에 불과해 보일 정도이다. (그만큼 질과 수준이 낮은 짓이었다는 뜻임. 마치 금상께서 하시는 짓처럼) 그리고 해방이 되어서도 그 마름들을 죽이지 못한 것은, 어쩌면 오랜 역사동안 한번도 왕의 목을 쳐날린 경험이 없던, 민족의 경험 또는 역량 부족 탓일 것이다. 하지만 조선조동안 국제무역이라는 스킬을 잃어버렸던 한국인이 근래 다시 그런 경험을 익힌 것처럼, 곧 왕목따 스킬을 익히게 될지도 모른다.

더불어 미국에 필요한 것은 한국의 교육열이 아니라 실체에 기반한 계급간의 통합성을 높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봐도 미국은 아직도 신화를 만들어야 유지될 수 있는 초기국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아직도 사라 페일린을 필요로 했다. 여기서 신화는 거짓말의 은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