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5일 수요일

나쁜 상사



이야기든, 소설, 영화, 만화, 드라마든 뭐든, 집중력 있는 서사에 흠뻑 빠져있다가, 이야기가 끝나고, 이상 세계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라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순간 느끼는 아쉬움의 크기가 서사의 감동에 가장 직접적으로 비례하지 않을까 싶다. 권승규가 채영조와의 사랑에 빠져가는 뻔할 밖에 없는 스토리를 보면서도 이들의 행복이 마지막에 가서는 이루어지기를 바랬는데, 이야기가 끝나고 안타까움이 너무 컸다.

문방구매니저때부터 네온비·카라멜의 작품을 챙겨보고 있었다. 다이어터 이후 본격 장편이 나올 때가 되었다 싶었던 이미 재작년 즈음이었던 같다. 당시 처음 선보였던 레진에서 네온비의 작품이 연재된다는 알고, 알고, 알고만 있었다. 레진에 발을 들이기 시작할 작년에 가후전부터였는데, 근래 들어 레바툰까지 보게 마당에, 이번 주말에 200코인을 카드로 긁고 언젠간 봐야지 봐야지 하고 벼르고 있던 나쁜 상사 몰아 봤다.

나는 복수극을 좋아한다. 복수극이 계속해서 쓰여지고 읽힌다는 자체가, 인간의 본성에 인간관계상의 균형을 맞추고자 하는 정의감 비슷한 것이 들어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덮어씌우고 김민이 나빠 보였다가, 필요 이상으로 3자까지 엮어 들어가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권승규가 나쁜가 싶었다가, 중반 정도가 지나고부터는 캐릭터들이 정렬될 만큼 이야기가 쌓이면서 인물들의 행동을 이해할 있었다. 스토리와 연출이 훌륭했기 때문에 이야기 속에 빨려 들어갈 있었던 것이 일단 기본이고, 내가 네온비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복수극에서는 피해와 보복이 적당히 비례해야 한다는 것도 중요한 같다. 권승규의 복수에는 (어느 정도) 동의가 되면서도, 세연의 복수는 그냥 개지랄로 보이는 단적인 예일 것이다. 그리고 김대리 썅년, 계속 되던 배경 푼수 짓이 막판 발악을 위한 떡밥이었을 줄이야. 년은 타이밍을 잡아서 끝까지 멀쩡하고.

네온비의 작품에서 느끼는 건데 무심한 시크한 대사들이 있다. “병신 지랄하네. 이제 슬슬 들어가 볼까? (승규)”, “처음 봤을 때는 어리버리해 보였는데 오늘은 미친놈 같아. 빨리 피해야겠다. (리오) 라든지 “아주 지랄들 났네. () 같은 대사들인데, 그런 대사를 치는 인물의 특성이 그런 아니라, 네온비의 모든 작품에서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너는 너고 나는 나다”의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쿨하다. (이런 개그의 절정은 기춘씨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셔틀맨》이 더 노골적이다.) 인물들이 만들어 내는 난리 굿판에 나도 모르게 묻어가다가, 이런 대사를 마주치게 되면 냉정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반성하게 된다.

작품에서 한가지 명확하게 밝혀져야 했지만, 끝까지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다면, 권승규의 남다른 정력의 근원일 것이다. 어차피 실재 적용 가능한 (?) 실재적이고 실천적 해답을 작품에서 기대지는 않는다. 하지만 무슨 약을 먹은 후유증이라든지, 아니면 원래부터 타고 났다든지, 아닌 하지만 호빠 생활 도중에 배웠다든지 이런 제시되었어야 했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이야기의 중반까지, 권승규 놈은 잠은 언제 자지? 하는 궁금증이 일기도 했는데, 질문에 대한 답은 후반에 정신적 외상에 의한 불면증으로 명징하게 제시되기 때문이다.

네온비의 작품들은 사회비판적 내용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예외적으로 작품에서는 약간 의심스러운 장치가 보였는데, 민이가 강간은 무죄를 받았지만 폭행에 대하여 징역 3년을 선고 받는 장면이다. 김대리를 나쁘게 만들어서 영조가 독립하게 하게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서였을 있는데, 굳이 성폭력과 폭력이 선명하게 대비된 것이 우연이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전에 미디어 다음과 네이버에서 복수극 개를 봤다가 실망한 적이 있다. 딱히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아 키워드로만 쓰자면 하나는 크림슨이라는 키워드가 중에서 중요했었고, 하나는 시골 동창 몰살 모의였다. 복수에 실패했다. 게다가 복수를 하면 되는 이유를 독자를 붙잡고 설교를 대더라. ㅋㅋ 추가로 동창 몰살 모의는 연출이 개판이라 거기 모인 동창들이 왜·어떻게 거기 모였는지도 이해 시킴. 당연 실패. 그래서 이후로도 병신들 작품은 본다. 목사를 하든가 선생을 하지 무슨 그런 놈들이 만화를. ㅋㅋ 네온비의 전작인 《셔틀맨》에서도 왕따를 하던 그 놈은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 진심이었는지도 알 수 없는 (많은 경우 척추반사적인) 참회의 말 한마디에 사람의 인생을 결정했던 악행이 용서 받을 수 없다는 상식이 지켜지는 네온비의 작품을 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 전의 일이니까 됐다. 중국에서 루쉰의 작품들을 교과서에 대거 내리겠다고 발표했다는 기사를 읽었었다. 시간이 지났으니까, 아마 지금의 중국 교과서에는 루쉰의 작품이 별로 없겠지. 루쉰의 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남의 눈과 발톱을 상하게 하고는, 용서와 화해를 떠드는 놈들과는 끝까지 싸워라. 이런 비슷한 말이다. 편에서는 법치가 강조되면서 다른 편에서는 용서와 화해를 운운하는 것은, 약자에게 용서와 화해를 강요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도 용서와 화해가 필요한 사람이 많아지고 있다는 징표라고 이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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