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26일 화요일

무게

소득과 행복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면서 항상 나오는 나라가 방글라데시이다. 솔직하게 까놓고 이야기해서, 나의 소득과 방글라데시의 행복을 교환하라고 하면, 나는 쥐꼬리만한 지금 나의 소득을 계속 고집할거다. 나는 아닌척 하지만 속물이고, 방글라데시인의 행복은 동굴에서 느끼는 편안함이라고 확신한다.

비슷하게 자유와 행복 역시 비례하지 않는다. 무한한 자유가 주어지면 행복할 것 같지만, 대신에, 폼나게는 고독, 찌질하게는 외로움이라는 반대 급부를 지불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도 그에 따른 책임도 오로지 자신에게 귀속되기 때문이다. 권력을 쥐면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 자유를 얻게 되고, 또한 출세를 바라 우글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외로울 새가 없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권력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다른 더 큰 힘이나 권위에 코가 꿰는 것 아니던가. 그것이 자유겠는가.

오늘은 뭘 해야할지 몰라서 무기력한 날이었다. 이런 날이 제일 싫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에, 막상 무얼 해야할지 몰라서 멍청하게 시간을 보냈다. 의무를 수행하지 못할 때 느끼는 무력감과는 좀 다르다. “나는 결국 주체적일 능력이 없는 인간인가” 하는 의심은, “넌 왜 이것 밖에 못했어” 하는 질책보다 더 무거운 무게로 다가온다. 후회를 담은 하루가 지나갔다. 비슷하게, 감당하지도 못할 자유를 찾아 사소한 행복을 포기한 것을 후회하면서, 한 번 뿐인 생을 마감하는 순간을 맞이하지 않을까. 무섭다. 그리고 두렵다.

그렇지만 나는 확신한다. 부자유스러움이 주는 편안함은 마약이다. 그 왜 유명한 말 있지 않는가, Die Religion ist das Opium des Volks.라고. 종교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도, 여전히 이 유명한 문구는 유효하다. 종교를 믿는다고 죽고 나서 불지옥에서 고통스럽게 그슬릴지 모른다는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에 종교처럼 헌신한다고 해서 최소한 일신의 안녕이 보장되는 시기도 지난 것 같아 보인다. 주변사람들과 잘 지내고 항상 착하게 살면 해코지 안받는다는 말만큼 어린 나이에 부정하게 되는 문구도 없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살면서 뭔가 잘못 되었을 때, 그 책임을 뒤집어 씌울 내가 아닌 대상들이다. 신이건 직장이건 이웃·가족들이건. (그것에 복수를 할 수 있든 없든) 그것이 우상 아닌가 한다.

나는 자유롭게도 살고 싶지만, 행복하게도 살고 싶다. 책임이라는 무거운 족쇄가, 자유라는 날개와 함께 주어질 수 밖에 것이라면, 역시 어쨌든 족쇄와 함께 날아오르는 수 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 내가 아는 한, 자유와 책임은 그 크기가 항상 같아야 한다.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게 당위라는 생각을 깨세요. 사고의 틀을 깨고, 자신을 둘러싸는 굴레를 벗어나는 거지요.)
(네이버에는 굴레를 한참 벗어나신 분들 뉴스가 항상 톱이랍니다.-_-)

2010년 10월 14일 목요일

신뢰는 돈이나 힘으로 살 수 있는게 아닐텐데.

몇 달의 시간차를 두고 두 분이 좀 믿어 달라고 읍소를 했다.

먼저 분은 국방장관이고,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65324

나중 분은 “공인” 스텐포드 출신 힙합가수이다.

http://www.vop.co.kr/A00000322395.html

(구글에서 찾아보니까 가장 먼저 나오는 매체들이 각각 요 둘이었다.)



흥정을 하면서 물건을 사야 할 때, 뻔히 보이는 구라를 치는 상인에게서는 물건을 사지 않는다.
당연하다.

허풍이 세고 구라를 잘 까거나, 핑계나 구실이 늘 따라 붙는 친구는 자동적으로 乙種이나 丙種으로 분류된다.
당연하다.



내가 자라온 문화적 배경에서는, 가정과 학교·지역사회들을 포함해서, 남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으면, 남탓을 하기 전에, 자기 자신이 평소 믿을 만한 행실을 해 왔는지 되돌아 보라고 가르쳤다. 나는 이것이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국적과 계급을 막론하고, 이런 비슷한 인성 교육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걸걸한 목소리로 “나 이 사람, 믿어주세요” 라는 말을 남긴 노태우를 마지막으로, 믿음과 신뢰를 강요하는 세상은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찌질하다 못해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믿으라고 협박을 하는 모습을 다시 보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다.



천안함 검증단의 발표 내용은 거의 모든 언론에 기사화되지 못했다. 타구라의 학력이 사실로 입증되었지만, 그의 나머지 미심쩍은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발언들마저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타구라 사건을 통해 여론을 몰아가려는 냄새가 나는데, 아마도 정부의 “의견”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면, 그 의문이 아무리 합리적이라 하더라도,  “열등감에 쩐 사회부적응자들의 불만”으로 매도할 수 있는 기초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전두환 때, 기자 생활을 시작해서 받아쓰기 기사질로 커리어를 시작한 기자들이 지금은 언론의 중추가 되었는데, 이들은 정부의 발표를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은 하나의 “의견”이 아니라, 공식적인 단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는 의견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사회에 불만있냐” ---요거는 걸작이다.

단계1. 첨예한 이성을 통한 비판적 사고의 결과가 정제된 언어로 표출된다.

단계2. “사회에 불만있냐?”

단계3.  비판을 제기한 사람의 인격이 사회부적응자로 매도된다.

여기서 멈추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좀 더 이견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면 상대는 좀 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단계4 (옵션). “억울하면 출세하든가.”

한 번 더 가면 빨갱이 드립이 나온다. 세번째에서 빨갱이 드립이 나오는 것은 굉장히 효과적인데, 직접적으로는 더 이상의 반론을 봉쇄할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나는 벌써 두 번이나 관용을 배풀었다는 “나는 관대하다” 효과도 누릴 수 있다. 이런 일이 두 세번 반복되면, 자기검열효과도 누릴 수 있다.

사회에 불만있냐, 억울하면 출세해라, 너 빨갱이냐, 넌 왜 그렇게 정치적이냐, 니 일이나 잘 하세요 따위의 상투는 “그 사회가 적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인가”에 대한 판단을 은폐하고, “그러면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가”라는 논의를 봉쇄한다. 더 나쁜 것은 제기된 문제의 원인을 (대체로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개인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결론을 내자면 다음과 같다. 평소에 구라충만한 그런 새끼를 믿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거다. 그런데 요새 보니 그걸 못하게 하겠다는 거다. “나는 평소 해왔던 대로 계속 구라칠테니, 너흰 그런 줄 믿어. 그렇지 않을 거면 혼나게 될테야.” 그런 협박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직 많이 살아있다. 생물학적 해결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의문의 제기를 막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2010년 10월 13일 수요일

좋아하는 노래들의 발표시기분포와 잡설

세벌식 자판을 익힐 무렵, 노래 가사를 들으면서 따라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몇 곡을 시간 날 때 연습했다. 그러다가 목적이 변질되어 좋아하는 노래들 가사를 텍스트로 모아두게 되었다. 가사집에 들어가서 카피 페이스트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들으면서 따라쳤다. 그렇게 모은 곡들이 시간이 흐르다 보니 142곡이나 되었다.

요 며칠동안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던 프로그래스 미팅이 끝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와서 가요들을 찾아 듣다가 문득 뻘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 노래들의 발표시기의 분포를 도시해 보자.”

검색을 해서 곡 발표년도를 찾는 것이 간단하지만은 않았지만, 어쨌든 끝을 볼 수 있었다.

짜잔


ㅋㅋ, 아 x발, x축 제목이 이상하네.

이렇게 그리고 나니까 뻔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들었던 곡들이 남은 인생과 함께 가지 않겠는가.



1997년 봄은 맑은 날이 많았다.
그 해 토요일 시간표는 예술이었는데, 1교시 교육학, 2교시 기술, 3교시 음악/한문 격주, 4교시 체육. 이랬었다. 담임선생님이 체육선생님이라서 운동장에서 종례하고 끝. 아예 교복을 넣은 가방을 운동장 구석에 숨겨놓고, 축구 뛰고, 체육 끝나면 교실에 들르지 않고, 운동장에서 옷 갈아입고 바로 귀가하곤 했었다. 조용한 오전 수업시간에 들려오던 부산항의 뱃고동 소리가 아직도 기억나고, 그렇게 토요일에 귀가하면서 서면에 들러, 번화가를 기웃거리다가 동보서적에 가서 책들을 구경하다가 집에 오곤 했다. 그렇게 강렬한 기억을 남긴 주말들이 많아 봐야, 12번이었다니. 세번 이상이면 그냥 많다라고 느끼는 것이 인간인가보다.

야자를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승환의 《가족》을 들으면 마음이 울컥했고, 넥스트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들으면서, 천사같은 첫사랑 그녀에게 고백을 거절당했을 뿐만 아니라, 심한 모욕을 받았던 기억들을 곱씹었다. 《뿌요뿌요》가 5월께 히트곡이었던가? 웃지못해 이 부분 따라하면서 키득거렸었다. 젝스키스가 데뷔해서 HOT와의 더비가 시작되기도 했었고, 가을에는 자우림 1집 (지금은 이선규가 부른 《예뻐》만 찾아 듣는다.), 임창정《결혼해줘》, 태사자 《타임》, 영턱스의 《타인》(이거 둘 꽤 흥했더랬다) 등이, 그리고 겨울에는 터보의 《회상》, 박지윤의 《하늘색 꿈》. ㅎㅎ 이거 여자랑 노래방 갈 일이 없었겠지만, 다들 랩은 꿰고 있었던 듯하다.

그냥 그 때는 그랬다. 꽃집 주인이 되는 것이 장래 희망이었던 친구들이 있었던... 딱 그 때까지. 그 해 봄에 DJDOC가 세상 좆같다고 《삐걱삐걱》을 목놓아 불러재꼈었는데, 그 해 겨울 IMF가 왔고, 에디아카라의 낙원은 끝났다. 마침 《거위의 꿈》이 발표된 해도 이 해네.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더 와닿았다. 아, 그리고 《삐걱삐걱》 이후로 사회비판 내용의 가요가 히트하는 것은 씨가 마른 것 같다. 내가 잘못알았나요?



이제는 저 그래프의 긴 꼬랑지처럼 열정과 감수성이 사그라들어간 들고, 뭔가 남긴 남았는데, 2009의 빈도수 3중에 하나를 《뽀삐뽀삐》로 채우게 하는 그 뭔가가 남았다. 젠장.

어쨌거나 나는 90년대 가요를 좋아한다. 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냥 내 감수성이 90년대에 거의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직업도 그런 감수성을 연마할 필요가 있는 직업군이 아니고, 감수성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는 것이 정치적·도덕적 당위가 아닌 이상, 나는 지금 상태로 만족한다. 비론 존나 촌스럽다는 지적을 자주 받곤 하지만. 뭐 따지고 보면 촌스러울 것도 없잖아. 리메이크 자주 되는데 뭐. 당연히 그래도 원곡을 찾아 듣지만.



아, 그리고 서면 동보가 폐점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다. 부산은 왜 부산인가. 동보서적이 없고, 해운대에 솔밭이 없고, 영도다리가 철거된 부산은, 또 거제역이 박살나고 없는 부산은, 좀 많이 부산답지 않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

2010년 10월 4일 월요일

글리제581

무식한 소리를 지껄여 보았다. 따끔한 지적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