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20일 화요일

유치원 단상

1987년, 아침 8시 30분. 학생들의 등교가 끝난 늦은 아침. 동네 목욕탕 앞, 뽀뽀뽀를 보고 나온 유치원 꼬마들이 미니버스에 올라탔다.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해지는 동네를 돌아 버스가 유치원이 있는 비탈진 골목의 막다른 곳에 서면 유치원 아이들은 내려서 건물로 들어갔다.

유치원에는 사슴반, 토끼반, 병아리반 이렇게 세 반이 있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한 해만 유치원을 다녔던 나는 사슴반이었다. 유치원에서의 일과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달에 한 번 정도는 어디로 어디로 견학을 갔었던 걸로 봐서, 도시 변두리의 허름한 유치원이었지만, 의외로 내실 있는 곳이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점심시간에는 집사님이라는 사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었고, 밥 먹기 전에는 기도를 했었고, 발목 높이 정도 오는 단상은 선생님만 올라갈 수 있는 곳이라, 아이들이 올라갔다가는 손바닥을 맞았었다. 바닥에 깔아 놓은 카펫에는 딱 아이들이 앉을 만한 크기의 정사각형 격자무늬가 그려져 있었는데, 거기에 줄을 맞춰 앉아있었던 기억이 나는 것으로 보아 무슨 수업을 했음이 확실하다. 옆에는 힘 좋고 잘 치는 놈이 앉았었고, 왜 반에 하나씩은 있는 예쁜 여자애는 내 뒤에 앉았었던 것 같다. 이런 저런 동요를 배우기도 했었다. 한 번은 선생님이 칠판에 줄 다섯개를 그어 놓고, 계이를 도를 그리라고 키크고 퉁퉁했던 어떤 아이를 시켰는데, 그 놈은 말귀를 못 알아듯고 칠판에 한글로 '도'를 적었다. 그 필체가 어른의 필체를 닮아 휘갈겨 썼던 지라 어린 나는 내심 놀랐다. 또 1000원 짜리를 세로로 두 번 꼽쳐 접으면 딱 맞는 손바닥 만한 백원짜리 자꾸 달린 지갑에 한 달에 한 번씩 1000원 씩 가져 와서 모의 저축을 하는, 저축 습관을 들이는 교육을 하기도 했었다. 1학기 때 선생님은 예뻤었는데, 2학기가 시작될 때에는, 지금 떠올려보면 귀엽게 생긴, 다른 선생님으로 바뀌었었다. 원래 선생님은 엄마한테 듣기로는 미국으로 시집갔다고 했다.

나는 김치를 싫어하는 아이였다. 점심 때 콩나물무침은 그래도 먹겠는데, 김치는 정말이지 먹기 힘들었다. 당연하게도 잔반을 남기지 못하게 하는 것은 내가 다니던 유치원에도 마찬가지였다. 꾸역꾸역 입에 밀어넣었던 기억이 난다. 콩자반은 바퀴벌레나 콩벌레를 떠올리지만 않는다면 맛있는 음식이었고, 오뎅무침 같은 것도 나왔던 것 같다. 나는 편식이 심한 아이었기 때문에 특히나 더 곤욕스러웠다. 어른의 입장에서 볼 때 먹기 싫은 음식은 억지로 처 먹이는 건 심각한 수준의 인권유린이다. 하지만 어린이들에게, 애들이 좋아한다고, 단 것만 먹도록 놓아 두는 것도 역시 아동학대이다. 교육의 관점에서 음식을 억지로 먹여야 하는 것인가? 입맛은 나이에 따라 변하니까 식성에 대한 아이의 기호를 인정해야 할까?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초래하지 않을 한 두가지 음식에 대한 편식은 관용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직도 나는 오이는 죽어도 입에 못 대지만, 그게 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 같지는 않다. 보육원 학대에 대한 기사의 댓글에서 잔반강요에 대한 분노를 보면서 억지로 김치를 삼켜야 했던 유치원 시절이 떠올랐었다. 김치의 맛은, 혼자 대학다닐 때, 식당 음식을 돈아깝다고 반찬까지 싹 먹기 시작하면서부터 알게 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시각이 언제였는지는, 이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교길에 있었던 일에 대한 유일한 기억은, 양정에서 거제리로 오는 복개천 옆으로 아침의 그 미니버스가 지나가는 장면이다. 창 밖으로는 어느 미장원이 지나쳤었고, 그 길은 매일 가는 길보다 훨씬 더 돌아가는 길이었다. 양정까지 가다니. 비가 오려고 해가 높은 구름에 가린 날씨였고, 나는 자리에 앉지 않고 팔걸이에 걸터 앉아 있었기 때문에 기사 양반이 내 허벅지를 아프도록 꼬집었었다. 초여름이었다. 87년 초여름. 역시 불완전한 기억이지만, 그 해 유치원에서는 여름방학이라는게 좀 길게 있었던 것 같다. 그 여름 방학 때 무엇을 했는지는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원래 유치원에는 그런 게 없는데, 올해는 특별히 여름방학이 있다고,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졸업은 아마 88년 2월이었을 것이다. 졸업식 동안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날은 맑았고, 유치원과 집 사이에 있던 새로 생긴 아파트단지를 통과해 집으로 엄마와 함께 걸어왔다. 거기는 원래 공장이 있던 자리였는데, 그보다 더 어릴 때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는 공터에서 놀기도 했었다. 사실은 그 때 우리 집이 있던 주거지역도, 그 공장 종업원들이 주로 살던 곳이라고 했다. 졸업 선물이라고 받은 것은 치약걸이었다. 나는 그걸 어떻게 치약으로 쓸 수 있는지를 궁금해 했었다. 치약걸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 치약걸이는 내가 집을 떠날 때까지 집에 걸려 있었다.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구글 스트리트뷰를 켰다. 건물은 도색을 다시 했지만 아직 거기 서 있었다. 다만, '마', '리', '아', '유', '아', '원' 이라고 한 글자마다 따로 간판에 써서 건물에 걸어 놓았던 그 간판은 사라지고 없었다.

2015년 1월 12일 월요일

사기를 읽었다.



사기를 읽었다. 10년 만이다. 그 때는 서해문집에서 나왔던 것을 읽었었는데, 내용이 너무 낮 선지라, 쉽게 읽히지 않았다. 이번에 읽은 것은 서울대학교 출판부에서 나온 편집본이다. 주제 별로 전·기를 묶었기 때문에 확실히 읽기 수월했다.

사기가 역사책으로 분류되는 것은, 어찌 보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사기는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기를 읽으면서, 그 사람의 삶과 나의 삶을 대비시킬 때, 두려워졌다. 불확실한 미래가. 이런 느낌은 국사 교과서나, 여타 다른 역사책을 읽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다.

편역자도 강조하고 있는 부분인데, 사마천이 사기에 담으려고 했던 문제의식은 이것이다. 어떤 사람은 옳은 일을 했는데도 비참하게 살다 죽어야 했고, 어떤 사람은 많은 사람을 고통에 빠트리고도 영화를 누리면서 산다. 사마천 자신도 억울하게 당하지 않았던가?

왜 그런가?

편역자가 해설한 사마천의 해답은 다음과 같다. 사람은 각자 자기가 추구하는 바를 위해서 사는 거라고. 인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인의를 위해서 살면 그만이고, 부귀를 위해 사는 사람은 부귀를 위해 살면 그만이고, 그만이고, 그만이고, 그만이고......

그런데, 잘 모르겠다. 납득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되는 건가 하는 도덕률의 질문.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그 잘난 “추구하는 바”라는 족쇄에 묶여 말도 못하게 비참해져도, 혹은 다른 사람들을 말도 못하게 비참하게 만들어도 되는 것인가 하는 가치의 자격이나 조건에 대한 질문. 마지막으로 그런 것을 인용했을 때 정말 사회가 유지되겠는가 하는 구조적인 질문. 누구나 자기 나름의 추구하는 바가 있다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과연 사마천은 이런 고민 없이 그런 답을 냈을까? 아니면 이런 고민 끝에 내린 답이 “각자의 추구하는 바”인가?



이번에 사기를 새로 읽으면서 눈에 뜨였던 부분은 물질적인 부에 대한 사마천의 긍정이었다. 편역자는 말하기를, 사마천의 죄는 꽤 큰 돈을 내면 사면 받을 수 있는 죄였으나, 그 돈이 없어서 치욕적인 궁을 당했던, 그런 개인적인 경험 때문일 수 있다고 한다. 또 화식열전에는 돈이 없으면 예를 지키지 못한다는 말이 명확하게 나와있다. 돈 없으면 친구도 떨어져 나간다는 현대의 말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말이다. (의 최소치)는 부와 비례한다. 시민들에게는 정신력과 국격을 강요하면서, 시민들의 소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썩은 여당과 정부는 쪽팔린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사마천은 유학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번잡하고 장황하지만 건질 건 별 게 없다고. 사실 공자부분을 읽어 보면, 공자는 지 잘난 맛에 입맛에 맞지 않는 군주나 사람들을 디스하거나 피해 다녔고, 늘그막에 가서는 자뻑도 좀 심해져서, 제자들이 “샘, 그건 좀 에바 같은데요?” 하면 “내가 하면 그게 인()이다.” 이런 드립이나 치고 앉았는, 고서나 옛 음악 막 좋아하는 안티끄 덕후 같은 느낌이 든다. 유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공자에 대한 기록을 길게 남긴 것은, 사마천이 공자를 단순히 유학의 거두 정도로 본 게 아니라, 학문 분야의 영웅, 그러니까 아카데믹 히어로 정도로 여겼기 때문인 것 같다. 사기가 춘추의 계승이라는 생각도 사마천이 했다고는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춘추에는 왕 까는 내용도 많은데, 사기를 저술하는 게 불충 아니냐”고 누가 물으니까, 둘러댄 내용을 머리말 같은데 써 넣기도 했다. 어째 요즘 유행하는 “너 종북이지?“하는 거랑 비슷해 보인다.

좀 이해가 안 가던 부분인데, 전국시대에는 왕들끼리 신하를 서로 빌려주곤 했다. 도대체 뭘 믿고? 저 놈이 세작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런 교환을 통해서 왕들이 별로 이득을 보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편집본은 그야말로 편집본이라서 당시 시대상에 대하여서는 사마천의 말을 옮기는 것 외에는 어떠한 추가적 설명도 없었기 때문에, 이해하기 곤란했다.

그 외에, 한나라에 대한 로망 비슷한 게 좀 있었는데, 사기를 다시 읽으면서 거품이 좀 내려앉았다. 매관매직이 아예 규범화 되어있었고,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마음대로 토착 호족을 멸족시키곤 하거나, 혹은 반대로 지방 유지들은 법 위에 있기도 했다. 황제라는 것들은 불로불사의 방법을 찾겠다면서 무당 같은 것들에게 고관대작을 내렸다가 약발이 안 서니까 또 마음대로 죽이고, 신선을 찾고 제사를 지내겠다면서 국고를 탕진하는 등등, 전통적인 관점에서 평가를 하더라도 이건 뭐 개판 아닌가? 그런데도 그 개판 황제는 흉노를 박살내고, 조선을 처바르고, 남쪽으로는 운남에 군현을 설치하고 막 그런다. 42 년 이전의 일본 느낌? 그런데 그 전통적인 관점이라는 게 별로 전통적인 것이 아니라는 게 함정이다. 아직 과거제는 700 년 후의 일이고 (그 사이 구품관인제가 귀족과두체제를 지탱하면서 400여년 가까운 암흑기가…), 관리에 의한 자의적 혹형은 시간과 함께 서서히, 고통스러울 만큼 서서히 개선되었고, 독자적인 비인격적 형이상학을 세우는 데까지는 1100 년이 더 걸렸다. 한나라는 그야 말로 동양사회의 프로토타입이었지만, 그야 말로 프로토타입까지만이었던 것 같다. 동시대의 한과 로마를 동등하게 비교하는 것은, 로마한테 미안한 느낌이다.

인물 위주의 서술이 가지는 한계가 있다면, 전국시대에서 한나라로 넘어 오면서 있었던 사회·경제 체제의 변화를 인물이 처한 환경으로부터 유추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평준서에는 당시 한나라의 경제 상황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나, 그것은 사기가 완성되었을 당시 현대사의 범주에 들어가는 내용으로, 전국시대부터의 변천에 대한 서술은 아니라서 전국시대와 한대 보통 사람의 삶이 어떻게 달랐는가를 생각해 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마무리이다. 다시 처음에 했던 인간의 삶에 대한 답으로 돌아와 보자. 각자가 추구하는 바를 사는 것이 인생이다. 고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에 나온다.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사실은 그 추구하는 바가 뭔지도 알지 못하고 끝나는 게 대다수의 인생이지 않는가? 그 추구하는 바가 명징했던 사람들만이 사기 같은 것에 기록되어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실천적 질문이 남는다. “미래는 얼마나 정해져 있는가”이다. 비참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빈곤해서 예를 잃고 싶지는 않다. 부로 덕을 행하고, 선을 쌓고 싶다. 미래의 한 시점에 이렇게 되게끔 하는 선택. 하지만 선택이 미래를 좌우한다는 믿음은, 미래를 살아가는 주체의 성질을 간과할 수 있다. 신해철의 노랫말에서 유독 자주 나오는 단어가 있다. “생활”과 “일상”이다. 나는 그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려는 의지와 그 귀찮고 피곤한 걸 피하고 싶은 마음과의 갈등이 일어나는 전장이 생활과 일상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선택이 미래를 결정한다는 생각은, 사회와의 상호작용 속에 만들고 쌓아 온 삶의 행태이 만들어 온 현재와 그 결과 만들어질 미래에 대한 책임을 순간의 선택에 전가하는 태도일 수 있다.

글을 쓰다 보니 조금은 정리가 된 것 같다. 미래를 결정하는 건 선택이 아니라 속성에 있다, 정도? 그렇다면 사마천에 해답에 대한 편역자의 해석을 이해할 수 도 있을 것 같다. 자기가 추구하는 바를 생겨먹은 대로 추구하는 것. 그리고 그것에 대해, 비참하든 행복하든 책임을 질 준비가 되어 있는 것. 하지만 아직 풀리지 않는다는 다른 질문들은, 잘 모르겠다. 온전히 나만 바라보고 살 수 있는가?

부분적인 답은 아예 답이 아닐 수 있다. 잘려진 신체는 생믈일 수 없고, 부분적인 사실은 대체로 진실을 왜곡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