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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4일 월요일

先 클로비스 문화

아메리카 대륙의 가장 오래된 구석기 문명으로 클로비스 문화가 알려져 있다. 빙하기에는 해수면이 낮아졌다. 그러자 얕은 바다였던 베링 해협이 수면 위로 드러났고, 이제는 지협이 된 땅을 걸어서, 클로비스 문화를 만든 사람들이 아메리카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들은 알라스카에 머물다가, 동쪽의 로렌시아 빙상과 서쪽의 코디예라 빙상 사이의 통로를 통해 (또는 연안을 따라 배로) 남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나중에 클로비스 문화라고 이름 붙여질 유적들을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 남긴다는 가설이 있다. 이 가설에 따르면, 빙상 사이의 통로가 열린 것은 13,000년 전이기 때문에 이 시기 이전에는 클로비스 문화를 비롯하여 일체의 유적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 이전 시기 유적이 미국과 남미에서 발견된다. 최초에는, 이들 유적들에 대한 연대측정의 신뢰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으나, 이제는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다. 빙상 사이의 통로가 열리기 전에 이미 아메리카 대륙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클로비스 문화를 남긴 사람들이 베링 해협을 통해 건너왔다는 가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 유적들을 남긴 사람들이, 대서양을 건너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주장이 있어 왔다. 예전에 포스팅을 남겼던 《1491》에서는, 그런 유적들의 존재만 언급되었었다.

사실 베링해협 설이 공격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클로비스 석기와 비슷한 유물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이주해 왔을 시베리아나 빙상이 녹기 전까지 머물렀을 알라스카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2만 년 전 프랑스와 이베리아 반도 일대에는 솔뤼트레 문화라는 구석기 문화가 꽃피고 있었다. 이 문화는 특별한 방법으로 얇게 가공된 뗀석기가 특징이다. 유명한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벽화를 남긴 사람들이기도 하다. 몇몇 학자들은 클로비스 석기와 솔뤼트레 석기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하지만 솔뤼트레 문화가 번성했던 프랑스·스페인에서 북아메리카까지는 수 천 킬로미터의 바다가 가로놓여있다. 어떻게 이들이 건너갔겠는가? 그리고 솔뤼트레 문화의 유물 중에는 해양활동에 관련된 것들이 나오지 않는다.

솔뤼트레 가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한다. 빙하기의 최전성기 때 해빙은 비스카야 만부터 뉴펀들랜드까지 남하했다. 당시의 사람들은 해빙을 따라서, 지금의 에스키모들이 사용하는 방식으로 바다사자 따위를 사냥하면서 대서양을 건널 수 있었다. 또한 빙하기 당시의 해수면은 지금보다 낮았기 때문에, 당시 바닷가에서 생활하던 솔뤼트레 문화 당시의 유적은 지금은 물에 잠겨있다. 따라서 해양생활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상승한 해수면에 유적이 잠기는 문제는 아메리카 대륙 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석기의 가공 방법 외의 유사한 특성이 북미의 유적에서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이주해 간 사람들이 솔뤼트레 문화의 일부만을 자신의 문화적으로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가설에 대하여 지구과학자들은 난색을 표한다. 기후모델에 따르면 당시의 북대서양은 지금의 에스키모들이 사냥하는 지역과는 달리 생태적으로 매우 빈약했으리라고 한다. 원양의 생태계는, 풍부한 영양이 공급되는 근해와는 상당히 다른데다가 그 때는 지역에 따라서 온도가 10도 낮은 빙하기였다. 따라서 사냥을 통해 식량을 조달하면서 바다를 건너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빙하기가 극에 달했을 무렵에는 북미대륙의 빙상과 유럽의 빙상이 대서양으로 뻗어나가 연결되면서, 지금 남극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거대한 빙붕을 형성하였을 것이라는 논문도 찾아볼 수 있었다. 춤베르게 빙붕이론인데, 빙붕을 걸어서 건너는 일은 카약 같은 배를 타고 유빙이 떠다니는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안전할 수는 있었겠다. 그러나 이 빙붕이 실존했다 하더라도, 솔뤼트레 사람들이 생태학적으로 사막보다 빈약했을 빙붕을 100일 넘게 걸어서 건널 수 있기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솔뤼트레 가설의 가장 큰 취약점은 유전학적 증거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아시아계라는 사실은 반론의 여지가 없이 명확하다. 미토콘드리아 디옥시리보핵산 검사에 따르면, 원주민중의 일부는 비록 좀 계통이 멀긴 하지만 하플로 군 X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플로 군 X는 유럽과 서아시아에서 높은 빈도로 발견된다. 그렇다면 이 유전자가 솔뤼트레 인들의 아메리카 상륙 흔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근래의 논문들은 이 하플로군 X가 솔뤼트레 가설을 지지해 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고 한다.

솔뤼트레 가설이라는 것을 접하게 된 기사는, 이 가설의 주창자인 데니스 스텐포드와 브루스 브레들리의 새로운 책을 소개하면서, 이 가설을 상당히 설득력 있는 가설로 묘사했지만, 좀 더 찾아본 영미권 자료들은 매우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로렌시아 빙상과 코리예라 빙상 사이의 회랑이 열리기 이전 시점으로 소급되는 유적들을 설명하는, 현재로서의 최선의 설명은, 회랑의 개통 이전에 사람들이 배를 통해 아메리카 대륙의 연안을 따라 이동해 들어갔다는 설명인 듯 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클로비스 석기의 조상이랄 만한 석기의 흔적이 시베리아와 알라스카에서 발견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완전한 결론을 내리는데 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모른다.

2010년 12월 12일 일요일

몽턴 경을 신문에서 읽었다

예전에 프레시안에서 지구온난화 구라설을 발바닥에 땀나게 소개한 적이 있다. 그 때 좀 당황해 하며 쓴 포스팅이 있는데(http://jolysses.textcube.com/8), 그 때 몽턴이라는 사람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프레시안의 기사에 언급된 내용을 인용하면서 몽턴을 소개하게 되었다. 지금은 시스템 에러라고 그 기사가 검색이 되지 않는다. 그 기사를 처음 읽고 몽턴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철자를 몰라서 못 찾았던 것 같다. 아니면 내가 기사를 주의 깊게 읽지 않았던가.

금요일에 차이트紙에서 자칭 지구온난화회의론자들이 칸쿤 근교의 슬럼가에 가서 무슨 썰을 풀었는지 써 놓은 르뽀 기사 비슷한거를 읽었다. (http://www.zeit.de/politik/ausland/2010-12/cancun-skeptiker) 아하, 거기에 몽턴 경이 나왔다. 그런데 거기 나온 몽턴 경이 좀 우스꽝스러웠다. 그 몽턴경이 라리베르다드라는 칸쿤 근교의 슬럼가에 있는 한 학교에서 했던 행동들을 옮겼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몽턴 경이라는 사람이 기후변화 문제에서 진지하게 언급되기에는 객관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내가 읽은 기사가 충분히 객관적이라면, 그의 주장이 합리적 사고의 결과라고 이야기 하기도 힘들어 보인다.

자, 진보매체 프레시안이, 기후변화라는 주제가 자본권력과 과학권력의 결합이 만들어 낸 거짓임을 주장하는데 사용하였던, 몽턴이란 사람의 의견을 잘 보도록 하자.



번쩍이는 흰색 셔틀버스 세대가 칸쿤에서 20km떨어진 슬럼가의 덜컹거리는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콘크리트 바닥에 달랑 건물 둘이 서 있는 허름한 초등학교에 차들이 섰다. 수백명의 학생들과 몇몇 부모들이 대표단들을 환영했다. 그 대표단은 영국자작 한명, 방금 칸쿤에서도 보았던 카자흐스탄의 UN 기후회의 대표 두명, 티파티운동 편에 서 있다고 밝힌 미국 여자 2명, 대표단 몇 명 더, 그리고 비정부기구 대표 몇 명인데, 이 비정부기구의 이름은 CFACT이다. 독일 기자도 하나 있었다. (아마 기자 자신을 말하는 듯)

질문: 작금의 기후변화에 대하여 무엇을 해야 하나?

CFACT가 뭔지 안다면,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쉽다. CFACT는 워싱턴에 본부를 둔 단체로, 스스로 “건설적인 내일을 위해” 일하는 단체임을 표방하면서, 석유산업과 함께 일하고 있다. 그들의 생각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기후 변화에 맞서 싸워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 될 수 있는 한 화석연료의 사용을 제한해야 한다는, 한줌의 좌파환경주의자들의 황당한 주장만큼 건설적인 미래의 도래를 방해하는 것이 없다고.

버스가 라리베르다드의 학교에 도착했을 때, 함께 여행을 온 사람들은 여러 질문을 통해 이미 몽턴 경이 기후 변화와 세계 정치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CFACT는 때때로 석유산업과의 협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하여 명확하지 않았다. 몽턴 경은 자신이 일행 중에서는 사실상의 대변임임을 숨기려하지 않았다.

몽턴 경이 자신의 세계관을 이상하게 언급할 때 말고는, 그가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어 보인다. 그는 마르크주의 주류 매체들이 마르크스주의 정치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마르크스주의 과학자들을 부패시켜서 거대한 기후음모를 계획했다, 그 목적은 세계정복 이하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몽턴 경에 따르면, 가난한 나라들의 모든 기후 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이라는 것은, 사실은 나이브한 동시대 개인들이 정말로 지원이 필요한 곳에 쓸 수도 있는 그런 지원들은, 사실은 비민주적인 UN이라는 기구의 손이 쓸 수 있는 폭력적인 한 장의 카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가 발견하고 영구사회주의라고 이름붙인 이런 현상은 거대하게 자라버렸고, 합법화할 수도 없고, 제어할 수도 없는 지배기구이다. 전형적인 예로 그가 독제자라고 이름붙인 EU를 들 수 있겠다.

이보시오, 몽턴 경! EU는 민주적인 국가들의 자발적인 연합이오. 그리고 칸쿤에는 선거로 뽑힌 정부들의 대표들이 어떤 경우에도 민주주의 이름으로 토론을 하고 있소. 자작님은 이런 반대의견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여기 기후회의에 오는 대표들 중 누구 하나라도 선거를 통해 뽑혔나? 아니요.

그러나 슬럼가 라리베르다드에 있는 허름한 초등학교가 기후변화에 대하여 무엇을 할 수 있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기후변화문제에 있어서도 몽턴 경의 의견은 그의 정치적인 발언들과 비슷한 수준에 머무른다. 그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전문성이 필요하다. 일군의 과학자들이 노력을 했지만, 그를 고치기 위한 모든 노력들이 별 성과가 없었다고 한다.

우리는 다시 라리베르다드로 발을 옮겼고, 한편 세명의 기타연주자들이 관타나메라를 연주하는 동안 몽턴 경이 운동장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왜 아이들이 그를 환영했을까? CFACT가 학교에 조명을 달아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럼 왜 CFACT가 그런 짓을 하지? 기후보호에너지는 불필요하게 비싸지고, 그러면 전기에너지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전원을 끌 수 밖에 없어진다는 것이 그 단체의 의견이다. 그리고 CFACT의 사람들은 이런 관계를 UN-기후변화 화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바란다.

CFACT가 학교에 태양판넬을 달려고 계획했다는 이론은 잘 맞지 않는다. 그들에 따르면 태양판넬은 혐오스러운 녹색기술로 전기료를 올릴 뿐이기 때문이다. 혹은, 유럽 나라들의 기후보호정책은 이 기술들을 값싸게 만드는데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그 결과 전력망에 포함되지 못한 라리베르다드 같은 곳에는 다른 어떤 전기조명방법보다 값이 싸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로 불이 들어올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운동장을 떠나는 동안 CFACT의장 데이비드 로트바드에게 물었다. 학교에 다는 태양광 조명은 단지 작은 계획일 뿐이라고 했는데, 다른 무엇을 할 계획은 무엇인지. 라리베르다드에 대한 해법은 CFACT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CFACT가 기후변화회의의 변두리에 있는 작은 동네에서의 쇼를 위해 적절한 연결고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돕고싶다면, 구호품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어쨌든 회사를 세워야한다.

또 다른 질문이 생겼다. 이 연출의 결과는 무엇인가. 티파티운동을 한다던 그 여자 둘은 이미 전부터 CFACT쪽에 서 있었다. 카자흐스탄에서 온 두 대표는 스페인어는 전혀, 영어는 거의 못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불쌍한 사람들인 라리베르다드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도 도와줘야 한다고, 나중에 말했다.



여기가 기사의 끝이다. 고백하는데, 몽턴 경의 개그콘서트 이후 부분은 번역이 힘겨웠고, 무슨 이야기 하려는지 감을 잡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돈 많으면 뻘짓도 참 재미있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우울해졌다.

전에 누군가 캡춰해서 올려 놓았던, Climate Swindle을 본 적이 있었다. 끝까지 보고 있기에 힘들었음을 미리 일러둔다. 그 다큐멘터리의 맨 마지막 쯔음에 캐냐였던가? 아프리카 모처에 태양광발전소를 설치한 이야기가 나왔다. 불안정해서 별 도움이 안된다고. 그 연출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환경과 기후를 들먹이며 아프리카의 꿈을 짖밟는 저주스러운 것들. 누가 정말로 아프리카의 꿈을 갉아먹는지는 구지 여기서 따지지 않겠다. 다만 여기서 보이는 모순. 칸쿤에 다는 태양전지는 지구온난화구라론자들의 선물이 되었다.

그리고 두번째 짜증. 기업의 사회봉사. 여기 나오는 CFACT는 명목상 비정부기구이지만 사실은 석유회사의 수족이듯 하다. 조그마한 마을의 학교에 조명시설을 달아주고는 생색을 낸다. 이런 거 많이 본다. 광고든 뭐든. 어릴적에 선행은 남 모르게 하라 그랬는데. 기업의 사회봉사 광고를 볼 때마다, 아침에 지하철 계단의 거지한테 500원 던져줬다고 생생내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자랑하고 다니는 모습을 나에게 뒤집어 씌워보고는, 수치심에 몸을 떤다. 이것이 바른 삶의 태도에 비추어 보는것이라면, 다른 측면의 질문도 가능하다.

기업입장에서라면 사회봉사는 기업의 홍보를 위한 수단이고, 같은 돈을 쓴다면 광고효과가 높은 사람에게 쏟아붙는 편이 이익이다. 불쌍한 사람들 중에서도, 광고효과가 뛰어난 사람들이 구호를 받는다면, 그것이 무슨 구호냐, 미친. 예전에 한 번 어디서 봤다. 사랑의 리퀘스트인가, 거기서 출연자를 모집할 때, 심사를 받고 그 중에 가장 불쌍한 경우만 출연이 가능하다고. 그래서 출연희망자 중에는 구라를 치는 경우도 있다고. 불행한 운명 또는 상황이 상품이 되어 거래되는 것이 정의로운가? (ㅎㅎ 책좀 읽었다.) 혹은 불쌍한 사람들 중 일부만 구호를 받는것이 공정한가?

불운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도움은 ARS 띡띡 눌러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복지를 추구할 대표에게 선관위 도장을 꾸욱 찍어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더더욱 확실해지는 요즘이다.

잠시 이야기가 샜지만, 어쨌든 기후변화구라설이 요즘들어 많이 잠잠해진 것 같아서 참으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