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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0월 24일 수요일

행성간 전쟁의 승패

행성간 종족끼리 싸우면, 누가 유리할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스타를 조금이라도 해 본 사람은, 본진에 미네랄이 한 칸만 더 가까이 있거나 멀거나 한 작은 차이가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따라서 행성간 종족 전쟁에서 승리하는 종족은 멀티를 뜨지 않는 한, 보다 큰 행성에서 진화해 나온 종족일 확률이 높다.

행성이 크면, 그 행성의 종족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도 많아질 것이다. 표면적이 넓어지니까. 인류가 태양계에 있는 암석 및 얼음 덩어리(행성이나 위성)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은 여기까지이다. 안타깝게도 태양계에서는 지구가 가장 큰 암석행성이기 때문에, 지구보다 더 큰 암석 덩어리가 어떤 지구조활동을 보일지는 이론적인 예상만 할 수 있다.

지구에서는 인류 같은 지적 능력을 가진 종족이 진화되어 나올 때까지 약 45억 년이 걸렸다. 이 시간이 다른 행성에서는 좀 줄어들 수는 있을까? 지적 생명체가 진화를 통해 나오기 위한 조건으로 당장 생각나는 것들은 진화 속도와 다양성이다. 진화속도는 세대가 바뀌는 속도이므로 그것은 종에 달린 문제이지, 그 생명을 품는 행성이 주는 영향은 적은 것 같다. 그러나 다양성은 행성의 환경과 직접 관련된 문제이다.

지구에서 생명의 다양성이 급속히 빨라지게 된 것은 겨우 5억 4300만 년 전의 일이다. 그 전 지구의 환경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바다는 생명을 품고 있었지만 균질했고, 육지에는 알고 있는 한 아무 생명도 없었다. 식물에 덮히지 않은 육지를 상상해 본다면, 그 경관이 지금의 극단적으로 건조한 사막과 화성의 한 중간 쯤 되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 육지가 거의 그러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지금 지구가 보이는 다양한 경관은, 생물과의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나는 이것을 `경관공진화(景觀共進化)'라고 부르고 싶다. 식물 없는 상태에서 지표면은, 위·경도 좌표마다 주어지는, 표고와 암석의 종류로 특정할 수 있었다. 토양은 식물이 있어야 만들어 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바다에서 진화해 왔던 식물은 육지로 올라와 그 표면을 뒤덮었고, 동물은 식물이 만들어 놓은 환경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특수화했다. 식물은 동물의 파괴적인 영향에 맞서 또 다시 진화했다. 그러한 공진화의 꼭지점에 열대우림이 있다. 열대우림의 남벌은 비단 탄소저장소의 감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 다양성의 감소와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지금 키보드를 두드리는 내 손가락은, 영장류가 숲에서 가지를 잡아 쥐고, 열매를 따먹고, 나무 구멍에서 애벌레들을 후벼파기 위해 진화한 특수한 형태이다.

육지를 뒤덮은 식물은 지표면에서 풍화의 양상을 바꾼다. 화산이 대기중에 뿌려놓은 이산화탄소는 식물에 의해 고정된다. 그러나 이들이 퇴적층으로 완전히 고정되기 전까지는 아직 완전히 대기에서 제거되지 않는다. 나무가 죽으면 탄소는 대기로 돌아간다. 식물은 무엇보다 강력한 산화제인 산소를 만들어 뿌렸다. 식물과 거기 공생하는 미생물이 만드는 유기산과 이산화탄소는 산도를 변화시켜 풍화를 촉진시키고, 킬레이트 리간드를 만들고, 표면 거칠기가 변화하고 일사량이 줄어들면서 광물들이 물에 접촉하는 시간이 길어지게 된다. 이산화탄소는 이전보다 더 빨리 고정된다. 지역적으로도 물이 순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고, 사태 같은 작용에 저항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지형과 생물의 상호작용에 의해 지역적, 광역적, 전구적 경관이 다듬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작용을 `경관공진화'라고 부르고 싶은 것이다.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자. 지구보다 큰 암석형 행성은 보다 다양한 형태의 경관 공진화가 가능한가? 그래서 더 다양한 종류의 생물들이 진화해 나올 여건을 더 빨리 마련해 주는가?

먼저 표고. 요즘은 참 과학이 발달해서 오만 걸 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가 있다. 암석행성이 지탱할 수 있는 산의 높이에 한계가 있는가? 당연히 있다. 암석의 강도가 유한하기 때문이다. 지구보다 큰 어떤 행성이, 이른바 왕지구라고 하자, 규산염 광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암석의 강도는 지구와 비슷한 정도일 것인데, 중력가속도가 지구보다 크므로, 산의 높이가 낮아져야 산 아래의 암석이 그 산의 압력을 지탱할 수 있다. 따라서 큰 행성일수록 표고차는 작아진다. 지구의 가장 높은 산은 9000 m이지만 금성의 맥스웰 산은 11000 m이고, 더 작은 화성의 올림포스 산은 24000 m이다. 비록 이러한 관계가 달까지는 잘 적용되지 않지만, 행성이 충분히 크고, 지사의 영향이 완전히 제거된다면, 앞서의 가정은 잘 적용될 것이다. 왕지구는 지구보다 표고차는 작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경관의 다양성은 지구보다 적을 수 있다.

두번째는 판구조이다. 행성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열을 내부에 감싸쥘 수 있으므로 더 오래동안 지표 표정연기를 지속할 수 있다. 왕지구는 분명 지구보다 더 많은 열을 가지고 있고, 지질학적으로 역동적일 것이다. 그러나 왕지구들이 지구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판구조활동을 보일까? 인류는 아직 지구 외에서 판구조활동을 보이는 행성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왕지구가 어떤 판구조활동을 보일지는 잘 모른다. 이론적인 연구들은 완전히 상반되는 결과를 보여주는데, 내부의 가열찬 에너지 덕에 더 활발한 판구조활동을 보일거라는 견해가 있는 반면, 강한 중력때문에 지각이 더 강해져서(왜?) 지각이 판으로 쪼개지지 않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아직까지 행성의 크기와 판구조 사이의 관계를 한 칼에 정리하는 이론이 나온 것 같지는 않다. 단만 판구조활동은 휘발성 분자들을 순환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행성의 대기가 막가파식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를 예방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한 점에서 나는 행성 사냥꾼들의 소위 거주가능영역이라는 주장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한 관점은 행성을 단지 수동적인 암석덩어리로 볼 뿐이기 때문이다. 행성은 암석 덩어리 그 이상이다. 행성이 생명을 품을 수 있는지 보기 위해서는 그 지질학적 역동성과 그 엔진의 지속시간을 보는 편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세번째는 수륙분포이다. 사실 수륙분포는 판구조론과 강력하게 관련될 것 같은데, 먼저 액화된 대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판구조활동이 그 행성의 대기를 안정되게 관리해야 하고, 반대로 광물에 포함되어 암석으로 들어간 물이나 이산화탄소같은 성분들은 암석의 강도를 약화시켜 판구조활동이 일어나기 쉽게 한다. 지구는 상당히 넓은 부분이 바다로 덮혀있는데, 사실 육지는 지구의 역사와 함께 성장한 부분이다. 가장 가라앉기 힘든 가벼운 암석원소들이 지구의 가장 바깥부분에 찌꺼기 같이 모여 쌓인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왕지구가 판구조를 유지하고 있다면, 같은 원리로 육지가 서서히 자라왔을 것이다. 육지의 면적은 그 행성의 지질학적 나이를 가리키는 척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어떤 왕지구가 지적 생명체를 키웠다면, 그 행성의 수륙분포는 지구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행성의 판구조가 내부의 뜨거운 열 때문에 지구보다 활발하다면, 육지가 더 빠른 속도로 성장했을 수 있다. 지구에서 식물의 상륙에 육지의 면적이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굉장히 우연한 일이 그 행성에서는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그 행성의 생물이 식물 비슷한 거랑 동물 비슷한 식으로 진화한다는 보장이 없어서 뭐라고 쓸 말이 없다.

그러나 어떤 왕지구에 일단 동물형 지적생명체가 발생한다면, 그들은 지구의 인류보다 더 많은 자원을 힘들이지 않고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의 발달과 그 최고 수준이 지구에서 나타나는 바에 비하여 더 높을 것이다. 누누히 이야기 하지만, 문명이란 소비하는 물질과 에너지의 종류, 그것을 생산하는 방법, 분배하는 제도, 소비하는 염치에 따라서 그 색깔이 정해진다. 그 피라미드의 높이는 제공 가능한 물질과 에너지의 양에 따라 결정되는다. 만약 지구의 어떤 대도시 상공에 지름 10 km짜리 비행원반이 정지한다면, 그 원반을 만든 자들은 지구보다 큰 행성에서 진화해온 생명체일 확률이 높을 것이다.

생각의 확장이다. 우주의 어딘가에는, 한 태양계가 두 개 이상의, 판구조활동을 하는 암석형 행성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또는 판구조 활동을 보이는 얼음 행성이거나. 소행성 충돌의 파편을 통해서 양 행성간에 생명체, 적어도 유전물질의 교환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러한 태양계의 행성들은 어쩌면 훨씬 빠른 진화를 보여줄지 모른다.

가장 극적인 경우라면, 쌍행성계이다. 달은 지구에 비하여 매우 큰 위성인데, 그런 정도를 넘어 행성급의 두 천체가 상당히 가까운 거리를 쌍성처럼 서로 회전하고 있는 경우이다. 혹은 궤도가 상당히 이지러진 타원이라면, 한 쪽이 달 정도의 크기라도 충분히 기조력을 통해 행성 내부의 동력을 오랜기간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에너지는 어디서 벌충되지?) 그렇다면 그 두 행성간에는 정말로 극적인 생명의 교류가 있지 않을까? 밤에는 태풍 소용돌이가 흐릿하게 보이는 푸르스름한 빛의 달이 뜨고, 가끔은 화석이 박힌 퇴적암질 운석이 떨어지는 어떤 행성에 가 보고 싶다.



지난 주 읽었던 《작전명 충무》에, 전투기 이륙 중량이 18,XXX 톤이라는 오타가 있다는 글을 읽고 망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다.

2010년 8월 15일 일요일

망국 100년, 나만의 핑계

500년을 지속했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 조선이 망하고, 백성들은 망국노로 전락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났다. 오늘은 광복절이다.

대학에 와서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짬밥이 오를만큼 오른 4학년 때, 나는 동양사학과 과목이었던 개관일본사를 신청해 들었다. 수업 첫날 받은, 손으로 흘겨 쓴 수업소개 프린터에 쓰인 수업 제목은 개판일본사처럼 보였지만, 수업은 흥미로웠고, 일본사는 개판수준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개판. ㅋ

수업시간에 딱히 교과서가 주어지지는 않았지만, 읽어볼 책 목록의 많은 책 중에 피터 두으스의 일본근대사를 사서 읽었다. 일본의 고대사나 중세사에는 그 때까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 수업을 들은 이유도, 근대사를 읽은 이유도, 단 하나의 의문을 풀기 위해서였다. `왜  조선이 망하는 동안 일본은 안 망했지?'

문명의 발상지에서 멀리 떨어져있어, 청동기·철기의 전래도, 농업의 시작도 늦었던 일본, 율령국가를 세우기까지 한반도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에 있던 일본,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제대로 경영해 본 경혐이 일천했던 일본이, 어떻게 근대 질서에는 성공적으로 적응할 수 있었고, 그에 비하여 앞서 말한 조건들에서는 우위에 있었던 조선은 왜 멸망할 수 밖에 없었는지.

혹시 땅의 문제일까?

한양과 에도를 비교하면서 볼 수 있었던 많은 차이점 중에 솔깃하게 보였던 것 중 하나는 외국과의 교역에 대한 태도였다. 분명하다. 양 쪽 모두 쇄국을 기반으로 하였다. 그러나 에도 쪽이 좀 더 열려있었던 것 같다. 나가사키의 데시마에 해당하는 것은 조선에는 없었다. 그래서 데시마에서 시작된 난학,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하여 얻은, 신문물을 이용할 수 있는 태도가, 흑선 이후 일본의 성공을 설명할 수 있지 않는가.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쇄국은 기조로 했던 에도 막부가 데시마를 열었던 것은, 네덜란드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지 않는가. 왜 유럽세력은 조선에 관심을 두지 않았는가. 그리고 또 다른 의문이다. 그렇다면 서양 문물에 훨씬 더 열려있었던 청조는 결국 서구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던가.

첫 번째에 대하여 생각해야 할 요소는 판구조론이다. 일본은 새로운 대지이다. 활발한 화산활동은 필연적으로 많은 무거운 원소들을 지각에 쌓아두게 된다. 금속이다. 전통적으로 교역에 이용되는 금속원소 금·은·동이 조선보다는 일본에서 흔하게 채취되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유럽세력이 조선 보다는 일본과의 접촉에 더 관심을 가졌을 것이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좀 관심을 가지고 찾아본 바에 의하면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에도 막부시대의 일본은 멕시코에 이은 세계 제 2의 은 수출국이었다. 일본의 구리는 동남아시아로 흘러들어갔다.

그렇다면 조선은? 조선에도 은광·동광이 있다. 일본의 은 채취가 에도시대에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된 데에서는 조선에서 개발되었다고 하는 회취법의 전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재 조선 후기에는 금·은광이 사적으로 많이 개발되었다. 그런데 조선은 정책적으로 금·은광의 개발을 막아왔었다. 귀금속의 생산이 늘어나면 그만큼 조공으로 바쳐야 할 것이 많아져서 힘들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문제는 부존량의 문제가 아니었다. 조공 바치기 싫다고 중국과 맞장을 뜰 유인 동기가, 귀금속을 매개로 한 서양과의 교역에 있었을까. 지나친 흑백논리인가. 조선 후기 청과의 관계는 적대적이었고, 서양과의 교역에서 얻을 것은 조총 뿐이라고 생각했을 당시의 사대부들, 그리고 사치를 배격하는 유교 이데올로기는 충분히 귀금속 광산의 개발을 저지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더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농민을 있는 대로 쥐어 짜기만 하면 되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체제를 완성한 조선 후기에는 은의 개발이 정책적으로 뒤바침되기에는 무리였을 지도 모른다. 더하여 왜란과 호란 양란으로 외국에 대한 피해의식에 쩔어있었을 사대부들이지 않는가.

하지만 조선 후기에도 국제무역은 중요한 경제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인삼은 조선의 주요 수출품이었고, 인삼을 팔아서 얻어진 부가 조선 후기 영·정조 때의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한 기반이라고 한다. 일본의 은은 서양의 범선 뿐만이 아니라 조선을 통해서도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조선의 인삼조차도 서양 세력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조선도 이에 대하여 결코 적극적이지 않았다. 아까 언급했듯이 이들은 피해의식과 두려움에 쩔어있었을 것이다. 동아시아 질서의 큰 변동이 있었던, 그래서 서양세력이 침입해 들어 올 작은 틈이 생겼던 16세기에, 조선은 양란의 충격을 가까스로 수습하는데 그쳤던 것 같다. 서양 세력이 함께하는 새로운 질서는 동아시아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들에 영향을 줄 만큼 아직 강한 힘을 가지지 못했고 (그래서 분열되어 있던 전국시대의 일본은 그 이후의 에도 막부에 비하면 서양에 활짝 열려있었다.), 내부적으로도 그닥 웰컴은 아니었다. 조선에게 있어 중국을 너머서는 작은 창을 열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첫 번째 기회는 그렇게 지나 간 것으로 보인다.

풍토가 문제일까?

석유(플라스틱 포함)·철강·콘크리트가 없는 현대 사회를 상상할 수 있는가. 전근대사회에서 이 세 가지 자원은 모두 목재에 대응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목재는 많은 경우 문명의 운명을 좌우하는 자원이었다. 조선 후기에 목재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은 명확하다. 18·19세기는 산송의 시대이다. 일반적으로는 유교사상의 확산으로 조상의 무덤자리를 차지하고 지키기 위하여 산송이 활발해졌다고 이야기하지만, 아마도 산소에 딸린 숲에 대한 배타적 재산권을 행사하기 위한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음이 근래에 밝혀지고 있다. 목재의 부족은 가옥의 구조와 크기를 축소시켰다. 곧게 뻗은 큰 목재는 서까래를 위해서 중요하다. 이런 목재가 희귀해지면서 집의 크기가 작아지거나, 나무를 잇대어 만들 수 있도록 구조가 변화하였다. 조선 정부는 금산령을 내리거나 불법적인 벌목을 단속하려 하지만, 실효를 거두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경우 삼림자원의 관리는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받는다. 일본에서도 에도시대의 인구증가는 목재 수요의 급증을 가져왔고, 삼림자원에 대한 관리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조선의 경우만큼 구체적인 사례는 알기 어렵지만, 약탈적 삼림 이용에서 관리형 삼림 이용으로의 전환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 받는다. 조선과는 달리 지방분권적이었던 에도 시대에는 각 번에게 삼림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관리에 대한 책임이 돌아가는 것도 일종의 압력으로 작용했다는 해석도 있다.

이 차이에 대하여 재미있는 개인적인 경험이 있다. 수 년 전에 일본인 친구와 함께 서귀포에 간 적이 있다. 천지연 폭포 아래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걸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의 숲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짧은 말이었지만, 나에게는 충격적이었다. 그가 일본의 숲이라고 말하는 그 숲이 내 눈에는 이국적인 난대림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봄에 벗꽃구경을 간다는 일본의 삼림은 한국의 삼림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 것이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본인이 느끼는 한국의 숲은 좀 더 건조하고, 추운 지방의 숲이었던 것이다. 그의 고향은 가나자와이므로 일본에서도 위도상으로 보자면 딱 중간 즈음이다. 지형적으로도 강우가 많았으면 많았지, 기온은 한국의 평균과 다르지 않은 곳이다. 전에 한 번 나리타에서 도쿄로 들어갈 때 보았던 숲이, 심지어 부산에서 자란 내가 보기에도 좀 열대스러워 보였던 기억이 새삼스럽게 났다. 그 때가 여름이라 내가 착각한 것이 아니구나 싶기도 하고, 일본과 한국의 숲의 차이가 개인적인 느낌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모노노케히메》에 묘사된 일본의 수해(樹海)를 떠올려 보라.

이것은 아마 숲의 생장 속도 역시 일본 쪽이 더 빠르거나 월등할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이 숲을 관리하려는 시도의 성패에 꽤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삶의 질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경제적 풍요로움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더하여 조선 후기는 북반구에 소빙하기가 덮쳤을 때로 조선은 잦은 기근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이러한 경제적 제한이 조선 후기에 새로운 사상, 새로운 문화적 시도의 싹을 말려버렸다고 생각한다. 문화의 부흥은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부흥을 필요로 한다. 조선이 충분히 풍요로운 사회였다면, 성리학이 제아무리 다른 사상을 배척하고, 그로 인하여 정치적인 통합을 완수했다 하더라도, 경제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사상의 대두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정치에서 배제되었지만 경제적으로는 부유했던 중인계층에서 중국의 신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으나, 결국에는 이들도 경제적인 기반을 통하여 성리학 및 기존 질서에 대응할만한 새력으로 대두하지는 못했다. 양명학과 고증학의 영향에 철저한 현실 인식이 더해져 만들어졌던 새로운 학문 경향인 실학은 자립적인 경제적·정치적 기반을 만들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왜 망했다는 말인데?

여러 개선의 기회들이 물리적인 한계로 인하여 도래하지 못했다. 17·18세기에는 희망적으로 보이는 몇 가지의 시도가 있었으나 조선은 완전히 성공하지도, 완전히 실패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조의 급작스런 죽음과 함께 19세기가 도래하였다. 이명래 고약이 한 세기만 일찍 만들어졌더라도, 세도정치라는 악마의 강림을 좀 더 미루거나 막을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정조가 추구했던 탕평책을 통한 붕당정치의 해체가 세도정치가 성립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정조가 얼마나 개혁적인 생각을 가졌는지는 고민이 필요하다.)

조선이 결정적으로 썩게 된 데에는 세도정치의 탓이 크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세도정치는 그야말로 최소한의 명분도 사라진, `권력의 사유화'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쇄도정치를 겪으면서 조선이라는 나라는 백성을 삥뜯는 양아치로 전락했다는 말이다. 관료는 조선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자기 자신 또는 가문을 위해 일할 뿐이다. 붕당정치에서도 관료들은 자기 자신 또는 파당을 위해 일할 뿐이었으나, 최소한 파당의 일원이 되는 문은 조금이나마 열려 있었다. 그러나 세도정치에서는 모든 가능성이 닫혀버린다. 요즘 명성황후라 불리는 그 사람은 아무리 다시 봐도 민씨 일족의 이익을 위해 조선이라는 국가를 이용했다고 밖에는 해석되지 않는다.

한 나라가 삥뜯는 양아치가 되었다면, 망해야지?

세도정치를 혁파한 흥선대원군은 일단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공포정치를 펼친다. 일단는 나라가 안으로 너무 썩어있었기 때문에 일단은 문을 걸어잠그고 집안단속을 하기도 한 것이다.  집안단속은 어느 정도 성공하였다. 그러나 쑨 죽을 또 다른 돼지새끼들은 민씨 일당이 홀랑 처먹어버렸다. 그리고 때가 너무 늦었다. 그가 집권한 1860년부터 실각했던 1873년까지, 일본은 흑선 이후의 격렬한 내전을 마무리하고, 메이지 유신과 대정봉환을 통해 근대화를 시작하였다.

게다가 그 이후에 권력을 잡은 민씨 일파나 고종이나 개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올바른 생각이 이었던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자신의 친위군이 신식군대가 되고, 서울에 전기가 통하는 것을 개화라고 여겼던 것 같다. 갑신정변은 어떠했던가. 이들은 일본처럼 되는 것이 개화라고 여긴 것 아니었을까. 1894년 갑오개혁에서야 조선의 현실에 기반한 개혁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미 일본은 청을 꺾어버렸다. 구르기 시작한 돌은 멈출 수가 없었다.

무엇을 배울 것인가

조선의 멸망에는 물리적 요인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불가항력은 아니었다. 현대적이고 일반적인 언어로 기술하자면, 권력의 사유화, 배타적인 유일사상 숭배, 관념론의 절대화가 조선의 정신력을 약화시켰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하나도 고쳐지지 않았다. 권력의 사유화는 아직도 횡횡하고 있고, 배타적인 유일신 사상은 성리학에서 천민자본주의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를 개선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절대적인 신자유주의가 이 땅에 실현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모두가 예와 의를 지치면서 살게 되면, 이상사회가 실현될것이라는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생각에 이상하게 소위 말하는 사회지도층이 빠져있다. 혹은 이의 반대판으로 통일이 모든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담론도 소수 있기는 하다.

조선은 왜 망했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쇄국을 이야기하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나라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전의 꼬라지를 보면, 흥선대원군이나마 있었기 때문에 19세기에 식민지가 되지는 않은 것 같다. 세도정치로 나라는 이미 끝장났다고 봐야한다. 쇄국은 아주 맛깔 땡기는 핑계거리이다. 첫째, 간단·명료하다. 둘째, 지배이데올로기에 봉사한다. 자유무역협정에 쇄국망국론이 어떻게 이용되는지 보라.

식민지 이후의 쇄국망국론은 딴지일보에서 읽은 임진왜란 이후의 조총패퇴론과 일맥상통한다. 패전상태에서 신무기에 대한 망상과 광신. 조선은 이를 백성에게 주입하는데에 성공한다. 그럼 병자호란은요?하는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은 채. 쇄국망국론을 퍼트리는 한 못된 신문에서 임진왜란 때 선조가 조총에 각별한 신경을 쓰며 이에 대한 연구를 독려했음을 가지고 선조를 실용적인 인물로 추켜세우며 빨아준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에 기술자들에게 큰 돈을 들여 이 배를 연구하게 하여 결국 나무를 때서 추진하는 조선의 증기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이들이 모를까?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선조 역시 성공하지는 못했다. 병자호란을 기억하라.

한일합방 100년의 광복절이다. 100년이 지나도록 왜 망했는지 모른다면, 부끄러운 일 아니겠는가. 조선이 망한 결정적 이유는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권력의 사유화=양아치화 때문이다. 그런 배경을 만든 물리적 조건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다른 기회가 없었던 것 같지도 않고, 충분히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있었다.

근래 또 다른 양아치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200년의 양아치들이 권력을 잡고 시작한 일이 천주교 박해를 통해 지지기반을 공고히하고, 관직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개혁적 인사들을 시골로 쫓아보낸 일이다. 우리는권력의 변하지 않는 속성을 똑똑히 보고 있다.


PS. 위의 견해들은 주로 김기협, 김명관, 주경철, 이영훈, 제레드 다이아몬드, 피터 두으스 그리고 아외로워의 책이나 글에서 읽었던 사실이나 견해를 기초로하여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