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5월 10일 일요일

수학·수학



“사회 나와서 학교 수학시간에 배운 것 중에 사용하는 게 뭐가 있나? 수학은 사칙연산만 할 줄 알면 돼.
흔히 들어볼 수 있는 수학교육무용론이다. 이런 주장은 쉽게 논파된다. “알아야 써먹지.”라는 논증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세계 수학자대회가 한국에서 열렸던 것을 계기로 신문 지면에서 한국의 수학교육에 대한 주장들이 많이 실렸다. 허나 나의 생각에 딱 맞는 의견은 읽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백가쟁명의 시대에 비루한 의견을 더해본다.

한국의 수학, 보다 정확하게는 한국의 수학교육에 대해 논한 여러 주장들은, 안타깝게도 수학 교육의 목적, 즉 수학을 잘 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의하지 않고 시작하고 있다. 수학을 잘 한다는 것은 하나의 의미가 아니다. 필즈 상을 노리는 수학자들이 잘 해야 하는 수학이나, 나 같이 기존의 수학을 잘 이용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입장의 사람들이 잘 해야 하는 수학이나, (그런 게 있다면) 장사나 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잘 해야 하는 수학이나, 수험생들이 잘 해야 하는 수학은, 다 다르다. 작금에 보이는 신문들의 주장은, 앞에서 제시한 경우 중에 첫 번째 경우와 마지막 경우에 해당하는 주장들만 있다. 세 번째 경우에 해당 될 사회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일반 사람들에 대한 수학론을 찾아보기 힘들다. 아니, 그들에게 어떤 수학이 필요한가, 그렇다면 어떤 수학인가라는 질문조차 하지 않은 채, 너무나도 쉽게 “한국의 수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은 수험생의 수학에 대하여서 이야기를 하게 된다. 수험생의 수학이 가장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수학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적 사회인으로 생활하면서 수학을 잘하는 능력이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초·중·고등학교의 수학 교육은 그런 능력을 배양하는 데에 초점을 둬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수학에 실생활에 도움이 된다는 가정을 당신부터가 확신하는지? 그러므로 남는 것은 수학이 간접적으로 삶의 질에 기여하는 경우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수학은 대입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만 남을 수 밖에. 이런 결론이 속물스럽게 느껴진다면, 다른 뭔가 그럴듯한 대답을 지어내야 한다. 그런데 어떤 그럴듯한 답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흔히 말하는 대로 논리력과 사고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논리력과 사고력이 좋은 사람들이 꼭 수학을 잘 하나? 그런 사람들이 수학을 계속해서 공부·연구했다면, 나름 괜찮은 성과를 냈을 지 모르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결국 그 말은 논리력과 사고력이 수학을 통해서만 길러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꼴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다른 대답이 있을까? ? ? ? 나는 적절한 다른 이유를 못 찾겠다.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그렇다. 평균적인 대한민국 국민을 가정했을 때, 수학을 배우는 동기는 대학 입시를 빼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삶의 질 향상에 간접적으로 기여하기 위해서 개개인이 어려운 수학을 억지로 배우게 된다? 아니, 사실은 그 반대다. 사회 전체로는 수학을 어느 정도로 아는 사람들 생산해 내는 게 산업의 측면에서는 유리하기 때문에, 개개인에게는 별로 이득이나 활용될 측면이 없는 수학을 억지로 가르치는 것이다. 100명에게 수학을 가르치면, 산업에 필요한 수준으로 수학을 익히는 데에 성공하는 (개인적 느낌으로는 10여명 내외의) 소수를 길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소수 중에서 또 대부분은 수학을 이해하기 위하여 들인 굉장한 개인적 노력을, 남보다 다소간 높은 임금으로 보상받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수학 교육은 대한민국 경제 규모와 구조를 볼 때, 상당히 성공적인 것 같아 보인다. 우리나라의 산업 구조가 완전 초천재 수학 괴수들이나 그에 버금가는 천재들이 만들어내는 혁신적 아이디어를 성장동력으로 삼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수위의 경제 규모를 만드는 데에 성공했기 때문에, 현재의 될놈될 식의 수학교육구조를 바꿀 필요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는 않는다. , 그런 혁신적 아이디어들이 굳이 수학을 잘 해야 튀어 나오는 건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뛰어난 수학적 해법을 보면, 혁신적 사고와 통하는 어떤 느낌적인 느낌이 들 때가 많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고등학교 때 배운 수준의 수학조차 실생활에 필요한 경우가 생길지 모르겠다. 사실 이건 좀 다른 방법으로 증명된다. 수학이 사회에 소용이 없다는 것은, 성인을 위한 사설 수학 교육기관이 없다는 점에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수학을 잘하는 능력이 곧장 돈을 벌고, 일의 부담을 줄이는 데에 이용될 수 있다면, 당장에 어른들을 위한 수학 학원이 곳곳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것이다. 영어를 봐라. 영어가 업무 능력을 증명하지는 못하지만, 영어 능력은 임금과 교환할 수 있는 대단히 범용성이 높은 매개체이다. 하지만 수학 능력은 매우 제한된 직업영역에서만 임금으로 환산될 수 있다. 그래 솔직해지자. 전국민이 수학을 잘 해서, 수학 능력이 높아져서, 뭐에 쓸텐가?

너무 비관적인가? 그렇다면 좀 다른 이야기를 해 보련다. 3때 담임선생님은 수학선생님이셨다. 선생님께 추천 받아 일본의 필즈상 수상자가 쓴 《학문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읽었었다. 사실은 책을 두 번이나 샀었는데, 두 번 다 빌려준 다음 돌려받지 못했다. 저자는 정합적으로 이어지는 학문의 체계와, 그를 이용해서 아직 모르고 있었던 문제에 내재되어있는 질서를 파악하고 답을 찾아내는 그 순수한 즐거움과 성취감을 담담하게 술회했던 것 같다. 그 느낌과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일반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느낌을 고르라면, 퍼즐을 완성했을 때 느끼는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맨 처음 어릴 때에는 해법과 답이 정해진 문제를 풀다가, 다음에는 해법을 자기가 골라서 문제를 풀어보고, 다음에는 문제가 무엇인지, 어떤 해법을 사용할지를 자기가 결정해서 문제를 풀어보고, 맨 마지막으로 자기가 문제를 만들고, 자기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새로 고안해서 문제를 푸는 식으로 지적작용의 단계가 올라간다. 사실 이 단계는 앞서 말한 수학의 레벨 네 단계와 거의 상응한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문제와 해법은 더더욱 추상화되고, (상식과는 반하게) 일반화된다.

이런 식의 추상화된 사고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과연 모두에게 필요한가? 사람이 행하는 다른 모든 분야의 기예에서도 마찬가지다. 재능이 있고, 환경이 뒷바침 되고, 노력을 한다면, 가능할 것이다. 사실 수학 시험 문제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연산 문제는 현재 중고등학교 정도의 환경, 연필로 알파벳을 쓸 수 있는 재능만 있다면, 정말로 노력만으로 거의 누구든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때 나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애들이 이런 애들이었다. 머리 속으로 문제 풀려는 애들. 논리가 까다로운 집합이나, 좀 기하학적인 타고난 머리가 필요한 도형이나, 진짜로 특별한 수학적 머리가 필요한 것 같은 증명이나, 또 그걸 해 내는 애들이 신묘해 보였던 부정적분이나, 이런 좀 더 구체적인 부분에서 한계를 느껴서 수학을 포기했다는 경우는 드문가 보다. 사실 나는 주변에서 보거나 들어보지 못했다. 그럴 수 밖에. 이런 것들은 모의고사에서 한 문제씩 밖에 나오지 않거든.

노력 부족으로 성적이 나오지 않는 것은 수학뿐만이 아니라 모든 과목이 다 그렇다. 그래서 10여년 전에는 보이지 않았고, 또 다른 과목에는 지금도 잘 보이지 않는 영포자니, 국포자니 하는 말 대신, 유독 수포자라는 말이 작금에 자주 보이는 것은, 수학 과목의 본질이 변했다기 보다는, 초·중·고 학생이 수학을 학습하는 방법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선행학습. 그런데 왜 선행학습이 이렇게 횡횡하게 되었나? 도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지 않나?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에 대한 태도이다. 그 재능이 뛰어난 것이든, 평범한 것이든, 우리는 그것이 합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잘 보지 못했다. 평균적인 스펙으로 기술될 수 있을 어떤 젊은이는 평균적인 삶이 아니라, 비참 내지는 바로 그 윗선의 삶을 살게 될 것임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반대로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한 아이가 수학만을 파서 그 재능에 걸 맞는 삶의 질과 지위를 누릴 수 있을 지는, 또 잘 확신이 서지 않을 것이다. 아마 자라는 동안에 더 환금성이 좋은 다른 진로를 끊임없이 회유·강요·협박 당할 것이다. 낮은 임금이 단지 생활이 질이 떨어뜨릴 뿐이라면, 어느 정도는 양보할 수 있겠다. 그런데 아예 인간의 가치가 그걸로 메겨져 버리니… 수학 뿐이랴. 우리는 작년부터 암기에 약간 뛰어난 재능을 가졌을 한 의사가, 걸출한 재능을 가진 한 음악가를 사실상 살해하고도 그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만큼의 인간적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법적으로 확인 받는 과정을 보아 오고 있다.  
모든 이들의 모든 무해한 재능을 받아 주기에도, 사회는 너무 안정적이고, 세상은 또 너무 인색하다.

2015년 5월 5일 화요일

고대중국어



박스터와 사가르의 Old Chinese 읽었다. 같은 문외한들이 읽으라고 책은 아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런 부분들은 단어들을 번씩 묵독하고 넘어갔다는 데에 의의를 있었다. 반면 이해할 있는 부분도 상당했고, 거기서 엄청나게 많은 놀라운 지식을 얻을 있었다.

중국어의 발음이 시대에 따라 변해 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중국인들은 틈틈이 자기 언어의 발음 사전을 만들어 왔고, 외에도 오랜 시간 동안 남겨진 문헌을 통해 당시의 한자 발음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유추하는 일이 가능하다. 송대에는 《廣韻》 集韻》이라는 발음 사전이 지어졌기 때문에 송대의 중국어 발음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에 어려움이 없다. 그 전 수나라에서는 《切韻》이라는 발음 사전이 편찬되었는데, 사실 《廣韻》 集韻》은 《切韻》의 체제를 따른다. 국어 시간에 들어 봤을 반절법이 바로 《切韻》에서 사용 된 그 발음 기술 방법이다.

그렇다면 그 전 시대의 중국어 발음은 어떻게 재구성하는가? 인터넷에서 “상고음” 또는 “상고한음”을 열쇠말로 하여 검색해 보면, 몇 가지 재구성들을 볼 수 있다. 허나 무슨 근거로 고대에 그 한자가 이런 발음으로 읽혔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은 잘 찾아지지 않았다. 재작년에 영문 위키피디아에서 Old Chinese 항목을 좀 자세히 읽어 본 적이 있다.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아래에 차차 적을 것이다)에 놀라, 뭔가 더 알아볼 수 없을까 하여 주석에 달린 문헌들의 저자를 살펴 보니, 의외로 몇 되지 않았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두 사람이 있었으니 그들이 BaxterSagart였다. 아마존에서 그들의 책을 검색해 보았는데, 호기심으로 구입하기에는 (, 정독 여부가 불확실한데) 너무 비쌌다. 그러다가 작년 연말에 혹시 싼 중고품을 살 수 있을까 하여 다시 검색을 했더니 그들의 새 책 《Old Chinese》가 상당히 싼 값으로 출간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나 파본을 싸게 팔기에 무리가 가지 않은 가격에 구입하여 천천히 읽을 수 있었다.

고대중국어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문헌은 《詩經》이다. 일단 당대에 쓰여졌음이 확실하고, 오랜 세월 동안 계속해서 읽기에 대한 주석이 달려왔고, 무엇보다도 시경의 시들은 각운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고 무리 없이 가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이 시경을 통해 고대중국어를 연구하기 이전에 이미 청대의 고증학파가 이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당연히 고전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 넣은 것이, 當代의 중국어는 시경의 각운을 맞추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청이 멸망 전후부터 중국 대륙은 최소 한 세기 동안 생지옥도를 연출하였고, 고대중국어 연구는 유럽인들이 넘겨받을 수 밖에 없었다. 20세기 초반 유럽의 학자들은 인도-유럽어족의 실체와 계통을 밝혀내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당연히 이 놀라운 방법을 다른 언어에 적용하려고 했고, 중국어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이 때 활동했던 사람이 Karlgren이고, 이후의 학자들은 그의 연구를 인용할 수 밖에 없다. 고대중국어는 티베트어나 버마어와의 비교뿐만 아니라 민난(閩南)방언 같이 중세중국어 이전에 분리되어 나온 것으로 여겨지는 중국어 방언, 또 묘족의 언어(Hmong-Mien, Kra-Dai)나 베트남 말 등에 매우 일찍부터 차용되어 들어갔던 단어들로부터도 추정할 수 있다. 당연히 중세중국어의 발음을 정리한 발음 사전들도 중요한 가이드라인으로 사용되고, 기존에 알려져 있던 갑골문, 금문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나오는 목간·죽간에 쓰여진 한자의 형태로부터도 추정할 수 있다.


이 책의 짧은 서문과, 앞 문단에서 정리한 근거들을 상술하는 2장이 이 책의 앞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이어 등장하는 3·4·5장에서 본격 재구성을 보여주는데, 3장은 고대중국어 어절의 형태를 설명하고 있고, 4장은 어두의 자음 (, 성모), 5장은 모음과 받침 (, 운모)의 재구성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짧은 6장은 결론이다. 그 내용들을 하나 하나 정리하는 것은 마치 전화번호부를 요약하는 것 같은 짓이다. 대신에 내가 한자와 그 발음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뿌리 깊지만 어디에 물어보고 답을 얻을 수 없었던, 의문에 대한 해답이나,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들을 인상에 남는 대로 열거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한자들 중에는 모양은 비슷한데, 그래서 연관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발음이 완전히 다른 그런 관계를 가지는 것들이 꽤 많다. 예를 들자면 尹/, /, /, ()/, /, //, /, (/), 使/, ///, /, /(/), ///, /輿, /, /, /輿, /, /, /, /, /, /祿, /會 같은 것들이 있다. 이런 것들의 관계를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羔는 책에 없었고, /尹은 완전히 다른 발음이었다.

저자의 기여 중에서 놀라운 것 중 하나는 고대중국어의 모음을 6가지로 추정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놀라운 이유는, 시경의 각운만으로는 이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r로 끝나는 음절의 존재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음절은 이미 중세중국어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특히나 한국사와 관련해서 흥미를 불러 일으키는데, 鮮의 발음을 *sar로 재구성했고, 韓의 발음을 *gˤar로 제시하여 일본어 훈독 kara와 연관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單于의 발음이다. 현재 한국어로는 이것을 선우라고 읽는데, 사실 단우라고 읽을 수도 있다. 이들이 제시한 고대중국어 발음은 *darɢʷ(r)a이다. 이것이 재미있는 게, 몽골제국의 관직 다루가치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烏桓을 Avar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들의 재구성에 따르면 朝鮮의 발음은 *trawsar 정도이다.

고대중국어 음절은 현재의 크메르어와 비슷하게 부음절이 있는 언어였다고 하더라. 책에서는 전음절(presyllable)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접두사 역할을 했다. 이 외에도 접두사로는 자음이 올 수 있어서 어두자음군 비슷한 걸 형성하는 단어도 많았다. 그렇다. 고대중국어는 접사를 붙여서 파생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냈던 것이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한자의 운용과는 완전히 다른 그림이다. 앞에서 예를 든 비슷한 모양-딴판의 발음 짝들이 사실은 그 파생의 흔적을 보여주는 두드러진 예시들이다. 파생은 접사 뿐만 아니라 유/무성의 구분, 인두음화의 유무, 운미(coda)의 변화 등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반면 모음은 변화하지 않았다. 책에는 접사와 의미의 파생에 대한 여러 예시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운미는 중세중국어 시대에 들어서 성조로 발전했기 때문에, 고대중국어에는 성조가 없었다.

기존의 한자의 어원은 갑골문과 금문에 기초하여 설명해왔다. 그래서 형성자와 회의자에 편중된 경향이 있었고, 한자의 독음은 완전히 임의적이었다. 이 책이 재미있는 점은, 곽점본이나 상해박물관본 같은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에 나타난 글자들까지 연결시켜서 그 발음을 재구성하려고 한 예시들이 나온다는 점이다. 전에 읽었던 도올의 《중용·인간의 맛》에 나오는 그 목간이 그 곽점본임을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곽점본 한자폰트가 나와도 그 미려함이 요즘의 개발새발 장식폰트의 뺨을 후려칠 것이라는 별 상관 없는 생각이 들었다. 가독성이 문제이긴 하다.

저자가 제시했던 성모, 즉 어두자음은 그 수가 매우 많았다. 대체로 생각할 수 있는 조음지점과 조음방법에 대하여 유기·무기/유성·무성/인두음·비인두음의 구분이 기본으로 깔리고, 연구개와 이보다 깊은 곳에서 나오는 자음에 대하여서는 입술의 원순화 유무로 또 변별되는 자음들이 상정되었다. 이게 한자 발음에 “건”과 “권”의 짝은 있지만, “번”과 “붠”의 짝 같은 것은 없는 이유다. 자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고대중국어의 쓰기시스템은 알파벳을 사용하는 것을 애초에 포기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또 다른 상상이다. 원래 진짜 원시적인 초고대중국어를 생각해봤다. 한 개념을 한 어절에 실어도 될 만큼 단어의 수가 적은 언어로 시작했을 터이다. 시간과 함께 점차 세상이 복잡해지면서 이리 저리 파생을 시키기 위해 자음이 복잡해지고, 전음절이 붙고 하던 상황이 商代 정도나 그 살짝 이전의 상황이지 않았나 싶다. 그러다가 그걸로 더는 안 되니까 두 음절을 쓰는 단어들이 점차 생겨났고, 그런 돌파구가 생기자 어두 자음들이 변별력을 지킬 필요성이 약화되면서 점차 익숙한 중국어로 변해갔을 수도 있지 않나 싶은 상상을 해 봤다.


이 책을 관심 있게 읽은 이유 중의 하나는, 한반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중국인들에 의해 남겨질 때, 그들이 한반도의 지명과 인명을 어떤 소리로 알아들었을 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그 지명들은 “지금”의 한국어 발음으로 읽었을 때, “지금”의 한국어 단어들과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좀 이상하지 않나? 예를 들면, 부산은 2000년 전에 거칠산국(居漆山國)이라고 쓰였는데, 이는 곧 거친 산 곧 황령산이다. 거칠산국은 이들의 재구성에 따르자면 *k(r)a [tsʰ]i[t] s-ŋrar인데, 오히려 더 멀어진 느낌이다.

사실 청나라 사람들이 시경을 연구했던 이유는 해석이 명확하지 못한 문장을 더 정확히 이해하고자 함이었다. 고대중국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은, 고전문헌의 해석에도 도움을 주고 있는데, 그 예시가 하나 소개되어 있다. 《春秋》의 桓公편과 定公편에는 비 때문에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는 비슷한 기사가 나온다. 각 기사에는 똑같은 위치에 乃와 而가 섞여서 나타난다. 하나는 乃를 쓰고 하나는 而를 쓴 것이다. 왜 같은 상황에 다른 글자를 썼을까?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에는 乃가 而보다 어려운 거라고 주가 달려 있고, 한대의 何休는 乃을 읽을 때는 깊고 안쪽에서, 而를 읽을 때는 얕고 바깥에서 소리를 내라고 주를 달았다. 이런 재미있다. 저자는 둘의 발음을 각기 *nˤəʔ *nə 재구성했다. 그렇다면 좌전을 썼던 사람은, 읽는 맛까지 생각하면서 썼다는 아닌가? 그리고 적어도 한대에는 구별이 남아 있었다는 아닌가? 삼국지 동이전이 쓰이기 바로 직전의 일이다.


, 한자를 배우다 보면, 일본어 독음도 야금야금 알게 되고, 중국어 독음도 조금은 알게 되지 않는가? 성조를 외우기 힘들어서 그렇지. 그런데 베트남어 독음은 깨치기 힘들다고 하더라. 그렇다. 고대중국어 발음은 갑골문·금문·과두문자와 연계하여 무궁무진한 덕질의 세계가 있음을 지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