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4일 목요일

신고를 고자질로 만드는 자들에 대처하는 방법

고자질 이라는 단어가 있다. 어린 시절 친구사이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어른에게 알리는 행위를 경멸적으로 일컫는 단어였다. 전형적으로 기억나는 게, 여자 애들이 뛰어노는 고무줄을 가위로 끊으면, 그건 매우 적절한 고자질의 대상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고자질쟁이라는 딱지가 붙는 일은 열 살도 되지 않는 어린 애들에게도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하지만 왜 어리다고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 없으랴. 오히려 어린 나이의 놀림은 더 도가 지나친 경우가 많고, 골목의 한 줌 무리 안에서 한·두 살의 발달 차이는 넘지 못할 물리적의 장벽이다. 지나친 놀림은 때때로 울음을 유발했고, 자연히 어른들의 관심을 집중시켜 곤란한 상황을 벗어나게 했다. 한 쪽이 울게되는 싸움질 역시 비슷했다.

학교는 재미있는 곳이었다. 특히나 아직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문교부는 아이들의 백지장처럼 하얀 머리를 반공으로 물들이는 데에 만큼은 사력을 다했다. 문교부에 의하면 어린이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반공은 “신고”였다. “여러분들 가족 중에 간첩이 있으면 어떻게 하는 것이 착한 어린이인가요?”라고 선생이 물으면, 아이들은 너도 나도 고사리손을 뻗어 들고 “경찰서에 신고하는 거요”라며 조잘거린다. 그러면 선생은 “맞아요. 우리 n학년 m반 어린이들은 다들 착한 어린이예요.”신고와 고자질의 본질 어떻게 구분할지는, 아직 좀 어려운 문제였다. 아니, 그런 비슷한 고민을 하는 어른들을 주위에서 볼 수가 없었다. 학업보다는 신고를 내면화하는 데에 더 성공적이었던 어린이들의 인생을, 정부나 국가가 어떤식으로 책임지고 있는가를 보면 기분이 착찹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학교를 졸업하던 시절까지는, 또래사이에서의 부당한 대우는 고자질에 의해서 시정될 수 있다는 일종의 심리적 안전망을 두르고 있었던 것 같다. 교사는 교실에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했기 때문이다.

중학교에서의 일과가 시작된 3월 초의 그 날을 아직까지도 나는 충격으로 기억한다. 다른 국민학교에서 온, 잘 모르는 아이들이 다른 분단에 앉아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학교 아이들은 다들 무섭게 생겼다. 그 중 뒤에 앉아있던 놈이 연필로 앞에 앉아있던 놈 등을 콕콕 찔렀다. 물리적으로 만만해 보이는 놈에게 가하는 악의적 행동. 나는 그 교실의 첫번째 희생양이 내가 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그 갈등의 진행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20분 가까이 괴롭힘이 지속되었던 것 같다. 참지 못한 앞자리 아이가, 자습 감독을 위해 들어 온 교사에게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그 교사는 대뜸 화를 내며 “그런 걸 왜 나에게 말하나? 니가 아가? '(?a32ga5/)”하고는 신고를 일축했다. 그 때 나는 직감했다. 아, 내 한몸 건사할 수 있는 건 나 밖에 없다. 말하자면 나는 이제 지옥에 들어 온 것이다.  아마 그 길로 고자질이라는 단어를 잊었던 것 같다.



이제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되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다른 말 같은 뜻으로, 어른이 되기 위해서, 어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많을 것을 배워야 했다. 세상에는 구성원들 모두를 잘 알면서 공정무사하게 갈등을 조정할 것으로 기대 되는 국민학교 담임같은 존재는 있을 수 없으며, 설사 있다 하더라도 갈등의 조정이 개인의 자의적 판단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갈등의 해결은 최악의 경우라도 법에 의거해야 한다... 세상은 나에게 신고나 내부고발 같은 행위를 어떤 측면에서는 장려했던 것 같다. 그들은 범죄행위를 예방하고 싶거나, 최소한 관리하고 싶어하는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어떤 내부고발자의 끝은 좋지 않았다. 이들의 이야기는 내가 진보계열로 분류되는 매체를 접하기 때문에 알게 된 건지도 모른다. 관료조직, 공기업, 재벌, 사학, 교회. 시민사회는 그 안에서 나왔던 내부고발자를 지켜줬던 적이 있는가? 갈등을 조정한다는 법은, 결국 신고자의 편에 서지 않았다. 법관의 자의적 판단을 시민과 상식은 제어할 수 없었다.

내부고발을 고자질로 만들어 고발자를 좆되게 만들지, 아니면 신고로 만들어 고발자를 포상할지 결정할 수 있는 권위는 법보다 더 상위계층에 있다. 그들은 기존의 법을 무시할 수 있고, 혹은 없던 법을 만들 수도 있다. 그들은 자의적으로 합법적 권위를 휘두른다. 어른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배웠던 대한민국에는, 서로 긴밀하게 서로 협조하는 소수의 무리가 그 권위와 권능을 폐쇄적으로 독점하며 세습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권위의 원천이 무엇인지 궁금했었다. 어리석은 나는 얼마 전에야 겨우 나름의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그들의 권위는 실용주의에서 나온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실현한다.  그러면 그들의 그 능력은 다시금 그들의 권위를 강화한다. 직접적으로는 그들이 차지한 자원의 지대로부터, 그리고 부차적으로는 강화된 대중적인 지지로부터이다. 그들의 성공을 볼 수록 그 권위를 공유하지 못하는 소외되 자들은  놀랍게도 그 권위에 대한 경외와 복종을 내면화하면서 권위의 자의적 전횡에 더 순응한다. 피지배자들은 복종할 수 있는 권위에 목말라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해방직후 그들의 최급선무는 생존이었다. 그들은 교육받은 관료, 교양있는 자본가임을 미군정에 어필하면서 그들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독립운동 세력을 척결하고, 생존이라는 퀘스트를 높은 점수로 클리어한다. 한국전쟁을 기회로 삼아 남아있던 반대세력을 절멸시키면서 명실상부한 지배계급으로서의 지위를 구축한다. 그들의 권위는 도덕성에서 나오지 않는다. 살아남고 권력을 탈취한, 그 “능력”이 그들의 권위를 보장하는 것이다. 자유당 시절들은 어떤 수를 써서라고 선거에서 이겼었다. 4·19로 빼앗겼던 권위는 5·16으로 되찾았고, 다시금 그들의 능력을 보여줬다. 한·일협정도 유신도 그들의 의지대로 실현시켰고, 10·26이나 6월항쟁 같은 고비가 있어도, 12·12 쿠데타나 87년 총선 등을 이용해 결국은 그들은 그들의 능력을 실현시킴으로서, 권위를 시전하고 자발적 복종에 대한 유혹을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그들을 약화시키는 유일하고 효과적인 방법은, 그들을 좌절시키는 것이다. 그들의 의지가 현실이 되는 것을 막는 일이다. 일단 그들의 의지가 분쇄되면, 먼저 지엽적으로는 피지배민들의 자율적으로 권위에 복종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약화된다. 그들의 전리품이었던 마름들은 서서히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다. 그리고 내부적으로 그들은 타락한다. 그런 일이 실재로 있어났었다. 1998년부터 2004년까지 6년 반동안 그랬었다. 시민들 사이에서 보수는 조롱의 단어가 되어 갔다. 매체·기관·자본은 제 살길을 각자 찾았다. 방송은 정권과의 연을 끊어갔고, 매체들은 자기의 컬러를 보이기 시작했다. 기관의 장들은 능력에 따라 임명되었고, 대통령은 국정원장과의 독대를 중단했고, IT 같은 새로운 형태의 산업이 대두했다. 반면 주류의 질은 추락했다. 그 전까지 조선일보는 시정잡배의 언어를 언어를 빌어가면서까지 분노할 이유가 없었다. 보수진영이 내 놓는 대권후보는 어쨌든 민주화운동을 했던 김영삼에서 보수의 꼭두각시 이회창으로 전락했다가 종국에 가서는 꾼 이명박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4대 개혁입법의 좌절은 그들에게 재생의 기회를 주었다. 뉴라이트라는 신생의 마름집단이 생기고, 매체들은 다시 주류의 의지에 복무하기 시작했다. 흐름이 바뀌고 아슬아슬한 균형이 깨어지자 추는 원래부터 기울어져 있던 방향으로 급속히 쏠려가면서 이명박 씨발놈(이하 악귀히로)을 꺼리낌 없이 개통령으로 밀어올렸다. 그는 모든 그의 의지를 현실에 투사할 준비가 되어있었으나, 초반에 터진 촛불시위로 겁을 먹고 비열한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악귀히로의 시대에 그들은 하고 싶은 걸 다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그러지 못했다. 악귀히로의 가장 큰 실패는 후계정립의 실패이다. 개구더기당 계열의 차기 주자 쌍두마차였던 서울시장 오세훈, 미디어법 마녀 나경원은 나꼼수에 차례 차례 정치적으로 사살당했다. 그랬는데도 이명박은 겨우 정봉주 하나 1년 감옥에 집어넣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여담이지만 핵심 경력을 쌓고 있는 정우택도 그 음모 때문에 뜻대로 되긴 어려울 것이다. 그게 실패했기 때문에 성공한 것처럼 보였던 다른 악귀히로의 의지 역시 위태위태하다. 국정원의 정치개입은 매개로 활활 타오르고 있고, 4대강 건은 박근혜(이하 마사꼬)가 쥐고 있다.

따라서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는 명확하다. 그들의 의지를 꺾는 것이다. 그들은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덮고 싶어한다. 그것을 분쇄시키는 것이 지금 시민이 해야 할 일이다. 진선미 의원, 박범계 의원같은 분들이 사력을 다 했기 때문에, 그리고 한겨레와 경향, 시사인 같은 언론이 끊임없이 보도해 왔기 때문에 그나마 이 건들이 알려질 수나 있었던 것이다. (무분별하게 민주당을 욕하면서 새정치 주술 외시는 분들,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지요? 그거에 침묵하면서 새정치 주장하신다면, 그런 새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닌 겁니다.) 보수라는 거적을 뒤집어 쓴 반 헌정무리를 패퇴시킴으로서 시민은 자신감을 얻게 되고 그 자신감은 진보진영에 대한 지지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현 민주당 지도부는 시민의 힘을 두려워한다.

《이끼》에 나오는 말이다. “시간의 밀도는 같지 않다.” 김어준이 말했다. “타이밍이 모든 것이다.” 국정원 정치개입건이 마사꼬의 정당성에 닿아있는 일인만큼, 지금의 싸움은 향후 5년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싸움이다. 그런데 지금, 8년 전 열린우리당에게서 맡았던 안이함의 비릿한 냄새가 흐릿하게 나는 것 같다. 민주당의 지도부가 지금 뭘 해야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 보여서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