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가 끝나고, 로마 시내를 구경하기 위해 일행과 헤어졌다. 학회장 근처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밀라노에 온 또 다른 학회 참석자와 만나게 되어 좀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 양반 역시 기차를 타려면 시내까지 가야 하니까.
내가 주제로 잡고 있는 부분은 간단한 행렬로 그 문제가 기술될 수 있다. 즉, 간단한 선형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학회에서 사람들이 그 주제로 한참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나는 이것이 간단한 선형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무엇이 문제이길래 이것이 계속 이야기되는지. 그 사람은 전자 전공이었기 때문에, 내가 잘 모르고 서툰 부분들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의 대답은 요약해서 이야기하자면, “감지기는 자극에 선형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선형성을 줄이기 위한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보정계수나 식을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다.
진부한 표현으로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풀고 있었던 것은 그렇다면 연습문제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니까. 하하.
수학으로 계산되는 깔끔한 모델에 심취해 이를 좋아했었는데, 그것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기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가끔 쓰는 state of art라는 용어, 기술적 노하우들이 쉽게 전달이 안되는 이유는 그런 비선형성들이 이론화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기술들은 한 사람의 경험자에 의해서 유지될 수도 있겠지만, 다양한 분야의 경력자들을 조화롭게 조직하는 것을 통해서만이 유지될 수도 있다. 외국의 석학을 모셔와 강의를 맡긴다는 기획들은, 재대로 된 기술적·학술적 경험을 해 본 사람의 아이디어는 결코 아닐 것이다. 미국의 연구기관에 많은 외국인들이 활약하고 있지만, 그들이 고국에 돌아가서 같은 수준의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것은 단지 기자재가 빈약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기술과 과학은 다르다고. 맞다. 합리적인 의문을 품고, 객관적인 실험과 관찰을 통해 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체계적인 지식을 쌓아가는 방법인 과학은, 뭔가 멋진 것을 만들어 내어야 할 것 같은 기술과는 격이 다른 것 같아 보인다. 그런데 기술은 객관적인 실험과 관찰의 다른 말이다. 실재로 유명한 과학자들 중에는 의문을 풀기 위해 스스로 기구를 고안하여 실험을 한 이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그런 기구들의 성능은 당대의 기술적 수준에 의해 제한된다. 의문->관측·실험->지식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관측과 실험이 빠지게 되면, 의문은 신화가 되고, 종교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된다.
요즘에도 대학에서 실험·실습이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언론만 보면 요즘 대학생들은 그저 취업준비에 미쳐서 영어와 쉬운 학점에만 목멘다고들 한다. 그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대학은 이미 현장에서 활동할 사람들을 키우는 기관이 아니라, 단지 다시 한 번 젊은이들의 카스트를 파인튜닝 해주는 기관으로 변질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뭔가를 배우고 알게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시스템의 비선형성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2011년 2월 8일 화요일
2011년 1월 17일 월요일
학회 논문
곧 학회가 있다. 그 준비때문에 무척 바쁘다. 프리젠테이션은 당연히 발표시점까지 준비해야 하는 건데, 문제는 이번 학회는 풀 페이퍼를 학회 마지막 날까지 제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해야 할 일이 둘이나 되다 보니 바빠지는 것이다.
논문을 쓰는 흉내를 내 보면서 몇 가지 배운 것 중에 요긴한 것이 있다면, 그림을 준비하는 방법이다. 보통 웹상에서 문서를 읽을 때는 jpg나 gif 정도의 그림이면 충분했다. 당연히 처음에 학회 논문을 준비할 때도 그리 하였었다. 문제는 화면에서는 충분해 훌륭해 보이는 해상도의 그림들이 종이에 출력되고 나면 형편없는 품질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불만스러웠지만, 그림의 해상도를 높이는 임기응변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다가 석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eps포멧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이제, 그래프 따위를 그릴 때, jpg나 gif같은 래스터 형식은 개나 줘버리라지.
일단 흰 바탕에 선이 몇 개 있고, 점이 몇 개 있는 그래프는, eps포멧이 훨씬 더 경제적이다. 래스터 형식은 모든 점에 대한 정보를, 그것이 흰바탕이라도, 저장하고 있어야 하는데, eps는 그런 낭비를 하지 않는다. eps는 벡터이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선을 긋고, 좌표 얼마에 점을 찍고, 그 밑에는 내장 폰트에서 글자 아무개를 읽어서 찍어라. 이런 식으로 정보가 저장되므로, 정보의 양에서 훨씬 이득을 본다. 게다가 eps는 아스키 형식으로 되어있어서 사람도 그 내용을 해석할 수 있다. eps는 그래서 (인캡슐래이티드) 포스트스크립트 “언어”이다. 정 급하면, (이론상) 메모장을 열어서 축의 숫자를 바꾼다든지 할 수 있다. 훨씬 적은 용량에도 불구하고, 종이에 출력했을 때, eps형식의 그림은 jpg나 gif에 비해 품질이 탁월하다.
처음에 학회초록을 쓸 때였다. 내가 직접 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영문들을 타임스 뉴 로만으로 폰트만 바꿔주니, 웬지 그럴듯 하게 보여 우쭐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에게 제출한 다음에는 완전히 빨갛게 되서 돌아왔지만. 한 몇 년 있다가 텍을 알고 난 뒤에는, 역시 멍청한 영문들이지만, 웬지 텍의 article 서식에 맞추어져서, 컴퓨터 모던 폰트로 찍혀 나오는 문서들이 또 역시 그럴듯하게 보여서 한참 우쭐해 하던 적도 있었다. 학회서식은 그보다 좀 더 멋진데, 거기에 샤프한 eps그림들이 박혀 있으면,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어쨌든 미적으로는 상당히 만족스러워진다.
eps의 또 다른 좋은 점은 ppt에서 자유로운 편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jpg로는 좀 어려울 것이다. eps를 그림 삽입을 통해 불러 들여서 그룹 해제를 하면, eps파일을 이루는 선분 요소들을 개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 그래프 같은 것을 자동적으로 일단 그리고, 강조해야 할 부분을 편집할 때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MS의 eps 불러오기 루틴이 썩 훌륭하진 않아서, 선분이 지나치게 많은 eps파일을 불러들이면 깨지는 현상이 발생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eps가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당연히 없다. 사진 같은 그림이 들어가야 할 경우에는 eps는 그것을 지원하기는 하지만,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각 화소마다 값들을 넣되, 그 저장되는 형식을 아스키로 취하기 때문에, 용량이 엄청나게 불어나게 된다. 요즘이야 컴퓨터 저장장치가 워낙에 방대하다보니, 방만하게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는데, A4용지 한 구석에 들어갈 8cm x 8cm짜리 그림이 10메가가 된다거나 하는 것은 썩 효율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놈의 학회는 풀 페이퍼를 여덟장이나 써 내야 한다. 글자도 작고. 아, 아주 죽어나겠다.
논문을 쓰는 흉내를 내 보면서 몇 가지 배운 것 중에 요긴한 것이 있다면, 그림을 준비하는 방법이다. 보통 웹상에서 문서를 읽을 때는 jpg나 gif 정도의 그림이면 충분했다. 당연히 처음에 학회 논문을 준비할 때도 그리 하였었다. 문제는 화면에서는 충분해 훌륭해 보이는 해상도의 그림들이 종이에 출력되고 나면 형편없는 품질을 보여준다는 것이었다. 불만스러웠지만, 그림의 해상도를 높이는 임기응변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다가 석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eps포멧이라는 것을 알아버렸다. 이제, 그래프 따위를 그릴 때, jpg나 gif같은 래스터 형식은 개나 줘버리라지.
일단 흰 바탕에 선이 몇 개 있고, 점이 몇 개 있는 그래프는, eps포멧이 훨씬 더 경제적이다. 래스터 형식은 모든 점에 대한 정보를, 그것이 흰바탕이라도, 저장하고 있어야 하는데, eps는 그런 낭비를 하지 않는다. eps는 벡터이기 때문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선을 긋고, 좌표 얼마에 점을 찍고, 그 밑에는 내장 폰트에서 글자 아무개를 읽어서 찍어라. 이런 식으로 정보가 저장되므로, 정보의 양에서 훨씬 이득을 본다. 게다가 eps는 아스키 형식으로 되어있어서 사람도 그 내용을 해석할 수 있다. eps는 그래서 (인캡슐래이티드) 포스트스크립트 “언어”이다. 정 급하면, (이론상) 메모장을 열어서 축의 숫자를 바꾼다든지 할 수 있다. 훨씬 적은 용량에도 불구하고, 종이에 출력했을 때, eps형식의 그림은 jpg나 gif에 비해 품질이 탁월하다.
처음에 학회초록을 쓸 때였다. 내가 직접 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영문들을 타임스 뉴 로만으로 폰트만 바꿔주니, 웬지 그럴듯 하게 보여 우쭐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에게 제출한 다음에는 완전히 빨갛게 되서 돌아왔지만. 한 몇 년 있다가 텍을 알고 난 뒤에는, 역시 멍청한 영문들이지만, 웬지 텍의 article 서식에 맞추어져서, 컴퓨터 모던 폰트로 찍혀 나오는 문서들이 또 역시 그럴듯하게 보여서 한참 우쭐해 하던 적도 있었다. 학회서식은 그보다 좀 더 멋진데, 거기에 샤프한 eps그림들이 박혀 있으면, 내용은 차치하고서라도, 어쨌든 미적으로는 상당히 만족스러워진다.
eps의 또 다른 좋은 점은 ppt에서 자유로운 편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jpg로는 좀 어려울 것이다. eps를 그림 삽입을 통해 불러 들여서 그룹 해제를 하면, eps파일을 이루는 선분 요소들을 개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 그래프 같은 것을 자동적으로 일단 그리고, 강조해야 할 부분을 편집할 때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MS의 eps 불러오기 루틴이 썩 훌륭하진 않아서, 선분이 지나치게 많은 eps파일을 불러들이면 깨지는 현상이 발생하기는 한다.
그렇지만 eps가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당연히 없다. 사진 같은 그림이 들어가야 할 경우에는 eps는 그것을 지원하기는 하지만,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각 화소마다 값들을 넣되, 그 저장되는 형식을 아스키로 취하기 때문에, 용량이 엄청나게 불어나게 된다. 요즘이야 컴퓨터 저장장치가 워낙에 방대하다보니, 방만하게 사용하지만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는데, A4용지 한 구석에 들어갈 8cm x 8cm짜리 그림이 10메가가 된다거나 하는 것은 썩 효율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놈의 학회는 풀 페이퍼를 여덟장이나 써 내야 한다. 글자도 작고. 아, 아주 죽어나겠다.
2010년 5월 20일 목요일
閑談
오늘까지 프로젝트의 중간 발표 준비를 끝냈다. 원래 뭔가 이렇게 중간이든 끝이든 매듭지어야 할 때가 오면, 똥줄이 타기 마련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주제의 특성상, 그럴싸한 그림이 전부터 좀 나와 있었기 때문에, 포멧을 변환하고, 예쁘게 모아서 프리젠테이션을 만드는 수준에서 끝이 났다. 그래도 마감은 마감이니까 정신없었다. 이번에 갈무리한 것을 바탕으로 논문이 한 편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만의 생각인 것일까. 그래서 아직 학생인가보다. 프로젝트는 끝났지만, 2주 후에 또 학회가 있어서, 그거 준비 때문에 또 바쁠 것 같다. 빨리 8월이 와야 쉴 수 있다. 7월 말에 또 학회다. 가지도 못할 학회지만, 프리젠테이션은 만들어야한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지난 주말까지만 해도, 《마지막 사랑》을 박기영이 불렀는지 몰랐다. 그 멜로디가 갑자기 생각나서 가사를 검색해 보니까 그거 제목이 《마지막 사랑》이었고, 가수는 박기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시작》과 같은 엘범에 실렸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유튜브에서 찾아 듣고 난 다음으로는 계속하여 듣고 있다. 그렇다고 가사에 감정이 몰입되는 상태는 아니고, 그냥 멜로디가 너무 좋으니까. 낮에 발표자료 준비할 때도, 속으로 흥얼거리며서 일했다.
그렇지만 1999년 봄은 역시 핑클 2집의 계절이었다. 7교시와 8교시 사이의 쉬는 시간, 서쪽으로 난 교실 창문에 쳐 놓은 블라인드 사이로 나른한 햇볕이 들어왔다. 서쪽으로 뉘였뉘였하는 해에서 나오는 광선은 긴 대기를 통과하면서 단파장 성분이 꽤나 흡수되기 때문에 조금 노랗게 보이고, 그래서 나른해 보인다. 다음 시간 책을 빌리러 갔는지 화장실에 갔는지 자리를 비운 옆자리 놈의 의자까지 차지하고 누워서, 영어듣기하라고 사주신 카세트에 핑클 2집 테이프를 넣고, 교실 뒤의 소란으로 여신들의 목소리가 차마 침식당할까 이어폰을 귀에 꽉 꼽고 소리를 높여 듣고 있으면, 나른함은 사라지고, 그저 정신이 아찔해 올 따름이었다. 핑클 2집의 속지는 하얀색 바탕에 각 멤버의 여신 컨셉 2등신 커리커쳐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걸 보면 존슨이 기립했다. 다분히 제작자의 의도가 아니었던가 한다. 그 때가 5월이었다.
5월은 참 좋은 계절이다. 5월의 또 다른 기억은 중학교 때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동래 분지의 시가지를 굽어볼 수 있었다. 머리 위 높이 떠 있는 태양에 회색 도시조차 하얗게 비치고, 황령산, 배산의 푸르름이 짙어지고, 하늘은 새파랗고, 뭉개구름이 조금씩 피어오르는, 상큼한 오전의 3교시 국어시간이었다. 나는 6반이었고, 국어선생님은 4반이었다. 국어시간에 어쩌다 보니까 “바르고 고운말을 써야 합니다.”라고 국어선생님이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는 그 순간, 4반에서 난생 처음 들어보는 희한한 욕설의 고성이 창문 밖에서 들려왔다. 고환과 자식을 찾는 내용이었는데, 너무나 생소한 나머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자기 반 학생임을 아는 국어선생님은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미친놈입니다.”라고 하시고 말았다.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내용은 반사회적일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일이 하나 마무리되어서 기분이 좋고, 한가로운 여유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지난 주말까지만 해도, 《마지막 사랑》을 박기영이 불렀는지 몰랐다. 그 멜로디가 갑자기 생각나서 가사를 검색해 보니까 그거 제목이 《마지막 사랑》이었고, 가수는 박기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시작》과 같은 엘범에 실렸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유튜브에서 찾아 듣고 난 다음으로는 계속하여 듣고 있다. 그렇다고 가사에 감정이 몰입되는 상태는 아니고, 그냥 멜로디가 너무 좋으니까. 낮에 발표자료 준비할 때도, 속으로 흥얼거리며서 일했다.
그렇지만 1999년 봄은 역시 핑클 2집의 계절이었다. 7교시와 8교시 사이의 쉬는 시간, 서쪽으로 난 교실 창문에 쳐 놓은 블라인드 사이로 나른한 햇볕이 들어왔다. 서쪽으로 뉘였뉘였하는 해에서 나오는 광선은 긴 대기를 통과하면서 단파장 성분이 꽤나 흡수되기 때문에 조금 노랗게 보이고, 그래서 나른해 보인다. 다음 시간 책을 빌리러 갔는지 화장실에 갔는지 자리를 비운 옆자리 놈의 의자까지 차지하고 누워서, 영어듣기하라고 사주신 카세트에 핑클 2집 테이프를 넣고, 교실 뒤의 소란으로 여신들의 목소리가 차마 침식당할까 이어폰을 귀에 꽉 꼽고 소리를 높여 듣고 있으면, 나른함은 사라지고, 그저 정신이 아찔해 올 따름이었다. 핑클 2집의 속지는 하얀색 바탕에 각 멤버의 여신 컨셉 2등신 커리커쳐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걸 보면 존슨이 기립했다. 다분히 제작자의 의도가 아니었던가 한다. 그 때가 5월이었다.
5월은 참 좋은 계절이다. 5월의 또 다른 기억은 중학교 때이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는 동래 분지의 시가지를 굽어볼 수 있었다. 머리 위 높이 떠 있는 태양에 회색 도시조차 하얗게 비치고, 황령산, 배산의 푸르름이 짙어지고, 하늘은 새파랗고, 뭉개구름이 조금씩 피어오르는, 상큼한 오전의 3교시 국어시간이었다. 나는 6반이었고, 국어선생님은 4반이었다. 국어시간에 어쩌다 보니까 “바르고 고운말을 써야 합니다.”라고 국어선생님이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는 그 순간, 4반에서 난생 처음 들어보는 희한한 욕설의 고성이 창문 밖에서 들려왔다. 고환과 자식을 찾는 내용이었는데, 너무나 생소한 나머지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자기 반 학생임을 아는 국어선생님은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미친놈입니다.”라고 하시고 말았다.
여기서부터 이어지는 내용은 반사회적일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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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음에서 청소년들의 욕이 심하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런데 나는 청소년이 욕을 하지 않으면 누가 욕을 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요즘 정부 인사들은 욕 좀 하네요.) 원래 10대는 그러지 않는가? 요새는 애들이 못된 걸 인터넷에서 배운다고 하는데, 예전에도 못된건 동네 형님들이 다
가르쳐줬다. 나는 욕 안하는 10대가 더 변태스러워 보인다. 그리고 내가 10대일 때도 그랬다.
고등학교 때 욕을 정말 잘하는 놈이 하나 있었다. 임마 욕은 완전히 예술의 경지에 이르러서, 시를 듣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운율과 리듬은 기본이고, 박자와 강약, 장단, 고저까지 한국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음소적, 운소적 요소들이 아름다운(이라고 쓰고, 상대를 개쳐바르는 이라고 읽는다) 욕이라는 최종 목표를 위해 완전한 형태로 결합한, 다른 입을 통해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욕이었다. 결코 경박한 랩의 느낌이 아니었다. 좀 과장해서 이야기 하자면, 동내 똥개들이 욕에 맞춰 춤이라도 추고 나올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경상 방언의 완성된 형태에 대한 어떤 느낌을 그의 욕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욕은 나의 예술관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극단적으로 기능을 추구한 것이 결국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관점이다.
고등학교 때 욕을 정말 잘하는 놈이 하나 있었다. 임마 욕은 완전히 예술의 경지에 이르러서, 시를 듣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운율과 리듬은 기본이고, 박자와 강약, 장단, 고저까지 한국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음소적, 운소적 요소들이 아름다운(이라고 쓰고, 상대를 개쳐바르는 이라고 읽는다) 욕이라는 최종 목표를 위해 완전한 형태로 결합한, 다른 입을 통해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욕이었다. 결코 경박한 랩의 느낌이 아니었다. 좀 과장해서 이야기 하자면, 동내 똥개들이 욕에 맞춰 춤이라도 추고 나올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나는 경상 방언의 완성된 형태에 대한 어떤 느낌을 그의 욕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욕은 나의 예술관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극단적으로 기능을 추구한 것이 결국에는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관점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일이 하나 마무리되어서 기분이 좋고, 한가로운 여유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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