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31일 목요일

독도

독도가 다시 화두가 되고 있다. 일본의 중학교 교과서들이 독도가 일본의 영토이지만 한국측에 의해 점거당해있다는 식의 서술을 검정했다고 한다.

일본측의 주장은 별로 경청할 가치가 없는 주장이다. 손쉽게 반박가능한 주장들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팽창야욕은 꽤나 깊은, 그리고 건전하지 못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19세기 말 메이지정부는 영토확장에 대한 심각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영토확장이라면 닥치는 대로 먹어댔다는 비유가 적절한 것 같다. 심지어 확인되지 않은 신뢰할 수 없는 주장에 기대어 있지도 않은 섬을 자국 영토라고 고시를 내렸으니, 이 섬이 나카노도리시마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이미 2005년에 경향신문과 무려 국정브리핑에 기사화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철두철미한 역사지우기공정 때문인지 참여정부의 국정브리핑 페이지는 현재 존재하지 않고, 네이버 뉴스아카이브에서 검색이 된다. 구글 검색에서 맨 앞에 나온 것은 네이버 독도블로그이다.

네이버 독도 블로그의 국정브리핑 기사 펌(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o2sky0&logNo=110025865200&viewDate=&currentPage=1&listtype=0)

경향신문의 나카노도리시마 기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503221806251&code=960201)



메이지 정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구세력의 정치적인 희생이 필요했다. 그 중 한 무리가 하급무사계층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신정부에 대하여 무장항쟁을 벌이기도 했으나 진압당한 후, 자유민권운동이라는 방법으로 메이지 과두정부세력에 대항했다. 입헌체제가 성립되고 의회가 만들어진 후, 이들은 정부의 외교방침을 문제 삼는 것이 좋은 효과를 거둠을 알게 되었다. (피터 두으스, 김용덕역, 일본근대사, p.136) 그러나 이들의 원대한 꿈에 비해, 실현 가능성에 대한 관심은 별로 였다. (p.137)

이런 서술을 한다고 내가 이명박 정부의 외교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외교문제가 국내 정치의 이슈가 되는 것은, 그 주제에 대하여 사회 내부에 합의 된 목표나 방법이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한 세기 전 일보의 예를 든 것이다. 아무리 정치적 의도 명백하더라도, 국민적 합의에 거슬러 외교정책을 비판하기란 쉽지 않다. 메이지 후기 일본의 외교방침에 대한 일본 내 정치인들 사이의 알력은,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위상에 대하여 메이지 과두정부 측과 민권운동파 측 사이에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독도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국민들은 정부가 더 일본에 강력하게 대응하기를 바란다. 특히 지금까지 이명박 정부가 일본에 대하여 보이는 태도는 조롱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현 정부의 외교는 대미굴종이 기본전제로 깔려있다. 그걸 외교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일단 별개의 논의로 치자. 그런데 대일외교는 (대북문제와 마찬가지로) 대미굴종이라는 전제에서는 해답이 나오지 않는 주제이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는 느낌이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정신은 없는데, 손발은 아직 움직이고 있어서 척추반사 수준의, 건드리면 꿈틀하는 수준으로 보인다. 2년 전 요미우리 신문에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기사가 났는데, 일본은 정말로 조금만 기다려 준 건지도 모른다. 현 이명박 정부는 메이지 정부와는 달리, 일단 맛탱이가 가 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국민들은 실현 가능성에 촛점을 두지 않고 강경한 대응만을 주문하는 것일까? 글쎄, 사실 더 강경하게 뭔가를 할 수도 없다. 지금 독도는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데, 뭘 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완전한 대한민국의 영토로서, 군인도 아닌 경찰이 그 섬을 지키고 있다. 독도 앞바다에 시멘트와 공구리를 부어 길이 3 km의 활주로를 만들어 동해에 떠 있는 불침항모를 만들면 될까? 더더욱 자위대가 그 곳을 점령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는 꼴이다.

우리가 일본에 강한 대응을 하면, 일본이 꼬리를 내릴 거라는 희망섞인 분석도 있다. 그런데 강한 대응은 뭔가 자극이 있을 때 하면 된다. 허공에 좆질은 하는 놈만 우스워 질 뿐이다. 어차피 해자대가 독도를 점령할꺼라고 독도에 상륙해 점령전을 벌일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지스함을 진수하고, 해군력 증강사업하고, F-15K를 도입하고 하는 것이, 만에 모를 그런 상황에 대비해서이지 않는가. 보다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란, 그냥 찍 해봐야 꼴통 극우 말종들이 통통배 비슷한 거 타고 근처에 와서 배 위에서 현수막 펼치고 깝죽거리든지, 연구선이랍시고 침몰되도 상관 없는 배가 근처에 와서 바닷물 샘플이나 떠 가고 수심이나 제고 그러고 말 것이다. 그럴 때, 그들이 선을 넘으면, 일본 영해로 도망치기 전에 나포해서는 출입국 관리법 위반 같은 거로 망신 좀 주거나 하면 되지 않나? 서해에서 불법조업하는 중국 어선들은 많이들 잡아오지 않는가.

물론 모든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기술을 하는 것은 당사자 입장에서 굉장히 도발적인 행동이다. 그런데 반대로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입장을 바꿔 보는거다. 부산 앞바다에 남형군도라는 작은 바위섬이 있다. 완전한 상상이지만, 그 섬이 전후처리과정에 이상하게 일이 꼬이는 바람에 (이를테면 일본군이 최후 방어선 비슷하게 시설을 만든 게 연합군이 보기에는 확실한 일본영토의 인증으로 보여서), 일본 영토가 되었고, 거기 지금은 자위대 레이더 기지가 건설되어 있는 상황을 상상을 해 보는 거다. 당연히 우리 교과서에는 그 섬이 우리땅이라고 서술되어있겠지만, 실재로는 일본이 점유하고 있다. 내가 교과서에서 그 서술을 배운다면? 일본에 대한 증오와 함께, 자기 땅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굴욕감을 동시에 느낄 것 같다. 한국이 점령하고 있는 땅이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교과서를 본 일본 애들은 좀 다를까? 선진국이니까? 오히려 저따위 춍들한테 땅을 빼앗기고, 얼씬도 못하고 있다는 걸 안다면, 오히려 더 심각한 자존심의 상처를 가지게 되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왜곡된 적대감을 가진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그것은 동아시아의 평화에 위협이 된다. 일본의 관료들이 굉장히 위험한 불장난을 한 것 같다. 그 뒤에서 아마 정치인이 손을 썼을게다.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 국민에게 독도는 완전한 국권회복의 상징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두고두고 곱씹을수록 울컥해지는 문장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게 독도는 나카노도리시마처럼, 있으면 (되면) 요행, 없어도 (안 되도) 그만 정도인 섬일테다. 단지 만만한 춍들이니 건드려보는 것이고, 곰같은 로스케들은 화나면 무서우니까 그냥 잠잠. 이병맛 정부는 정말 전 정부랑 비교된다. 지지리도 못났다.

2011년 3월 27일 일요일

방문자가 늘었다.

텍스트큐브에서 블로거로 옮긴 후에 원래부터 인기가 없던 블로그에 사람들 발길이 뚝 떨어졌었다.

그러다가 후쿠시마 원전을 보고 상념을 적은 글이 네이버 검색결과 상단에 뜨는 모양인지, 근래 들어 방문자 수가 많아졌다. 한켠으로는,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번 더 읽어보고 더 깔끔하게 쓸 걸 하고 후회를 하지만, 다른 한켠으로는 게을러서 수정을 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사실관계가 잘못된 치명적인 오류도 있는데 말이다. 독일에서 가동을 일단 멈춘 원전은 9기가 아니라 7기이다.

사실 더 정성을 들여 쓴 글은 그 다음에 있는 메신저 수성 도착에 대한 글인데, 이 놈은 별로 인기가 없네. 아마 그 포스팅을 이틀 전에 썼다면, 방문자들이 많았을 것이다. 비슷한 의미에서 낚시는 타이밍이라는 말도 있다.

과학은 반복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재현가능성이라는 척도가 따라 붙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일본인들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이지만, 몇 달 안에 큰 여진이 있을 확률이 높다. 큰 지진 이후에는 또 상당한 크기의 여진이 수 개월 내에 발생한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위성 발사 스케쥴은 대충 잡혀 있으므로, 그 때 적절하게 포스팅을 한다면, 방문자를 늘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 대한 정보가 넘쳐나는 블로그가 되지는 못하리라.

전에 어디에선가 방문자가 많은 블로그가 되려면, 꾸준히 게시물을 올리고, 다른 블로그들을 방문해 트랙백을 걸고, 등등의 조언을 읽은 적이 있었다. 나는 게으르고 숫기도 없고 게다가 불친절하고 무책임한 블로거이기 때문에, 그런 조언을 실천하지는 못한다. 단지 넘쳐나는 오류로 점철된 포스팅들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소소하게는 ㅐ 와 ㅔ 를 구별 못하는 철자 잘못부터, 용어를 잘못 쓰는 예들, 게다가 아까 본 것처럼 사실 관계가 잘못된 것과 논리적이지 못한 구성까지.

하, 방문자들이 많아져서 기분이 좋은 점도 있지만, 바닥이 고스란히 들여다 보이는 것 같아 부담도 되고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비록 졸렬한 생각들이되 내 생각을 표현하고 싶은 그런 욕망이, 부끄러움보다는 좀 더 큰 것 같다.

2011년 3월 23일 수요일

사람의 능력

어떤 사람을 더러 능력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평을 가끔 들을 때가 있다. 능력.

인간의 능력을 제한하는 요소들은 거의 대부분이, 그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들이다. 신체적인 능력은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유전자에 의해서 많은 부분이 결정되고, 사회적인 인간관계 역시 어릴 적에는 거주 지역, 성인이 되어서는 부모의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상당부분이 결정된다. 그리고 재산의 상속이 있다. 여기까지가 기본 베이스고, 그에 더하여 게으름·부지런함, 신중한가 즉각적인가, 인색한가 방탕한가, 자폐끼가 있는가 푼수끼가 있는가 따위의 개인적인 성향이 나머지 부분들을 결정한다. 요즘에는 이런 말까지 들었다. 아이의 제로 베이스는 부모의 교양이라고.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자기의 능력이고, 어디까지가 부모를 잘 만난 덕일까. 세상의 많은 모순들의 근원은, 누구도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이 있다. 어쩌면 모든 모순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어떤 인간도 그 둘이 분리되어서 평가될 수 없다. 원래부터 클래스가 달랐다는 말. 무한경쟁·무한책임·적자생존·약육강식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차라리 위안을 주는 말이다.

최근 능력이 대비되는 두 분을 봤다. 두 분 다 같은 사람에게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국회의원이었던 한 분은 무혐의로 결정이 났고, 다른 한 사람은 지사직을 박탈당했다. 먼저 번의 사람은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능력, 혹은 죄의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능력자였고, 불행히도 두번째 사람은 그런 능력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있다. 부자아빠 거지아빠 열풍이 나라를 휩쓸던 시기였다. 그 열풍이 몰아치기 시작할 때 즈음부터, 부동산 폭등의 진원지에서 새로 주택을 구입하는 고위공직자의 모습을 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주택을 구입한 사람들은 그만큼 큰 재미를 보지 못했거나 큰 빚을 떠안게 되었다.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는 두 층위가 있다. 관대한 층과 서든데쓰 층이다. 관대한 층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경쟁 보다는 담합을 한다. 그것이 장려된다. 한 두번의 실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얼마든지 재기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동안은 쉬면서 취미를 즐기고 특기를 가다듬을 수 있다.

그 아래에 서든데쓰 층이 있다. 이들에게는 연대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들에게 연대는 실정법 상의 범죄이거나, 경쟁에서의 탈락 둘 중의 하나이다. 이들에게는 단 한 번의 실수나 패배가 용납되지 않는다. 그들은 쉴 수 없다. 더 나쁜 조건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그 경쟁을 이긴 자들에게는 경쟁한 시간만큼의 생존이라는 망극한 댓가가 주어진다. 그리고 이제는 태어날 때부터 관대한 층, 서든데쓰 층이 결정되어 있다. 드문 역전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그것을 더러 아직 우리 사회가 계층간 출입이 일어나는 건전한 사회라는 증거라고 하는 이도 있고, 그게 뉴스거리가 되는게 이미 우리 사회가 신분제 사회가 되었다는 증거라고 하는 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이라는 게 있다. 법이라고도 하더라. 그 규칙 어디에도 관대한 층과 서든데쓰층을 구별하라는 말은 없다. 공평하다. 법 앞에서는 만민이 평등하지 않던가. 어디에 관대한 층이 있고, 서든데쓰 층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관직을 통해서 자신의 음주 뺑소니 치사 같은 죄를 씼을 기회가 서든데쓰 층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일 따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걸 보면서 배운다. 나에게는 추상같은 규칙인데 그 위에 빽과 힘이라는 게 존재하더라는 것을. 이제는 사람들이 그 힘과 빽을 사람의 능력이라 부르더라.

1월 말 쯤에 쓰다가 정리가 되지 않아 놓아 두다가, 김형을 보고 마음에 스치는 바가 있어 급하게 나머지를 체웠다.

2011년 3월 21일 월요일

메신저 수성도착

미국의 수성탐사선이 수성에 도착했다. 18일의 일이다. 발사되기는 2004년 8월에 발사되었는데, 이제야 수성선회궤도에 들어올 수 있었다. 수성의 중력은 약하기 때문에, 탐사선이 수성의 중력권에 잡히기 위해서는 속도를 충분히 줄여야 한다. 그런데 수성은 태양에 더 가깝기 때문에 지구에서 수성으로 탐사선을 보내는 것은 높은 곳에서 물건을 아래로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당연히 속도가 빨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금성이나 화성에 대하여서는 에어브레이크 방법을 쓸 수 있지만, 수성의 박약한 대기에 대하여서는 그런 방법을 쓸 수 없다. 대신 행성들의 중력을 이용하여 속도를 줄이는 방법을 택했다. 메신저는 발사 후 그 동안 지구를 한 번, 금성을 두 번, 수성을 세 번 지나면서 속도를 줄여왔고 (그 동안 태양 주위는 15번 공전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수성선회궤도에 들어가기 위해서 600kg의 연료를 역분사 해야 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수성에 대한 지식에는 모순이 있다. 수성의 표면은, 검버섯 같은 바다가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만 제외하면, 달과 비슷하다. 충돌구로 뒤덮힌 이 작고 뜨거운 행성의 표면은, 이미 이 행성이 열적 진화가 끝난 죽은 행성임을 암시하는 것 처럼 보인다. 속이 아직 뜨거운 지구형 행성은 껍데기가 햐땩햐땩 디비지기 때문에 충돌구를 그렇게 오래동안 모을 수 없다. 그런데 반면에, 이 행성은 자기권을 가지고 있다. 지구의 자기권은 아직 식지 않은 액체상태의 핵이 대류를 하는 이유로 생긴다고 생각하고 있다. 비유를 하자면 이 죽은 것 같은 행성을 가까이 가서 보니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수성에 대한 다른 두가지 관전 포인트는 밀도와 얼음이다. 먼저 수성은 지나치게 밀도가 높다. 금속으로 된 핵이 다른 지구형 행성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크다는 이야기인데, 수성은 암석질 성분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다음 포인트는 수성의 극지에 생긴 충돌구 분지에서 발견된 얼음의 흔적이다.

메신저에는 여러 관측장비들이 붙어있다. 일련의 감마선, X-선, 중성자, 자외선, 가시광선, 적외선까지를 포함하는 몇개의 분광기들이 달려있고, 자기장을 매핑하기 위한 기구, 레이저 고도계, 지표와의 상대속도를 제기 위한 레이더 (이를 통해 중력장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마지막으로 지표기복을 얻기 위한 입체시 카메라가 달려 있다.

수성을 향한 다음 미션은 ESA와 JAXA가 공동으로 2014년 발사를 목표로 추진하고 있는 BepiColombo라는 미션이다. 이 미션은 당연히 메신저의 결과를 토대로 설계된다. 베피콜롬보는 수성 표면에서 200 km 고도의 원형궤도를 돌면서 고해상도 자료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메신저는 이지러진 타원궤도를 돌고 있는데, 가까울 때는 수성 표면에서 20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멀 때는 15000 km까지 멀어진다. 고해상도 영상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케플러의 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을 기억하라)

메신저가 이렇게 긴 타원궤도을 돌게 된 것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빠른 속도로 진입하면서도 수성 중력권에 들기 위한 고육책의 성격도 있지만, 덕분에 수성에서 멀어질 때에는 태양풍에 대한 관측이 가능해지고, 또한 태양과 수성 표면 양쪽 사이에서 가열된 선체를 식히는 시간을 벌어주기도 한다.

2011년 3월 19일 토요일

안심하고 싶다!!!

인터넷에서 “원전이란 어떤 것인지 알기 바란다”라는, 원전 건설에 참여했던 일본인 平井憲夫씨의 편지를 읽게 되었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73255) 일본어 제목은 “原発がどんなものか知ってほしい”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문에 모두가 초조해하고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맨 처음 히라이씨의 편지를 접한 곳은 목요일 저녁 프레시안에서 였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110316171600&section=05) 이 기사는 편지의 내용을 요약 발췌하여 소개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두려웠으나, 안심하고 싶었다. 다행히 그 아래 댓글 중에서, 히라이씨의 이 편지가 이미 DC발 낚시라는 의견을 보았다. (2페이지 댓글의 Hans8501의 댓글) 하지만 글쓴이의 신상이 이미 명확하기 때문에 웹상에서 검색을 통해 진위여부를 간단히 확인할 수 있었다. 편지는 사실이었다. 한스는 무슨 근거로 그것이 DC의 낚시라고 한 것일까.

그러다가 다음 까페에서 (http://cafe.daum.net/kicha?t__nil_cafemy=item) 다시 한 번 이 글의 또 다른 링크를 보게 되었다.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73255) 뷰스앤뉴스의 기사는 일본어 전문을 번역해 놓았기 때문에 일본어를 읽지 못하는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다음 까페에서도 이 글이 이미 반박당한지 하세월이라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댓글이 달려 있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어디서 어떤 내용이 반박당했는지는 제시되어있지 않았다.

뷰스앤뉴스 기사에도 댓글이 많이 달려있었다. 히라이씨의 편지가 경험에서 우러나온 설득력있는 글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댓글들은 원자력발전을 우려하는 글들이었으나, 그렇지 않은 댓글들도 눈에 띄였다. 특히 푸쿠라는 사람의 댓글이 히라이씨의 편지를 반박하는 내용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나를 안심시켜주지는 못했다. 푸쿠는 “우리나라는 다른데요” 수준의, 혹은 말꼬리 잡기 식의 반박은 하지만, 히라이씨의 주장을 기초에서부터 허물 수 있는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우리나라의 원전은 시공때부터 잘못이 생길 수 없는 구조가 어떠어떠한 이유로 갖추어 져 있고, 그 증거로 어떤 것을 들 수 있다 같은 반증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냥 우리는 안전하니까 안심하세요의 그냥 좀 긴 변주랄까.



댓글 들에 따르면, 히라이씨의 편지는 DC발 낚시이기도 했고, 동시에 이미 반박된 내용이기도 했다. 내용의 진위에 대한 간단한 언급은 결국 “우리는 다르고 안전하다”로 끝맺어졌다. 내가 요 며칠 사이에 보아왔던 것은 (어떤 의견이 괴담으로 덧칠되어져 간다는 의미에서) 괴담이 만들어지는 과정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1등급 병신들의 향연이었을 수도 있다.

어릴 적에 TV에서 봤던 희미한 기억이다. 1951년 국민방위군사건이 알려져서 착복혐의를 추궁받자, “점마 빨갱인데요”라고 되받아치던 개새끼들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는 내부자의 고발로 비리가 밝혀지면, 고발의 진위 여부보다는 고발자의 인간관계가 먼저 수사된다. 어제는 X파일 기자가 유죄선고를 받았는데, 그 보도를 통해 밝혀진 그 범죄를 모의하고 실연한 사람들에게는 무죄가 이미 확정되어 있었다.



거짓은 사람을 안심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나는 여전히 불안하다.

2011년 3월 16일 수요일

원자력 발전에 대한 의견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 사태가 차차 손아귀를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현대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환경문제는 지구온난화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화력발전의 비중을 줄이는 것이 다급하게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생기는 에너지의 부족은 아쉬우나마 원자력발전으로 메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원자력발전에 반대하는 환경론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고 여겼다. 방사능에 대한 비정상적인 공포 유발에서부터 시작하는 그들의 주장은 감성에 호소하는 면이 많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나오는 여러 주장 역시 신뢰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2000년를 전후하여 초반에 원자력폐기물 저장소의 입지 선정이 문제가 되었을 때, 지질이나 단층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에서 비롯된 주장을 펼쳐나간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는 국내 환경론자들을 일종의 극단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해왔다. 더군다나 현대의 미친듯한 에너지 소비를 충족시킬 수 있는,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그런대로, 현실적인 대안은 원자력 말고는 아직 생각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일본에서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하고 있다. 시버트 단위로 표시되는 방사선량이 얼마만큼이나 뛰어오르는지 확인하면서 굉장히 놀랐다. 평소에는 시간당 나노 단위에서 놀고, 엑스레이를 찍을 때 마이크로 시버트 이러는데, 시간당 밀리 시버트가 파괴된 원전 근처에서 검출된다고 하니,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세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1-2 시버트를 받으면 한 달 내에 사망률 10%라고 한다. 일단 이정도 수준에서 대참사만은 면한다고 하더라도, 흩뿌려진 방사선 물질들 때문에 태평양에서 잡은 고기들을 마음 편히 먹기는 힘들지도 모르겠다. 태평양은 넓고, 사실은 그동안 많은 방사성 폐기물들이 버려져왔지만 말이다.

유럽은 원자력발전에 대하여 동아시아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듯 보인다. 아마도 체르노빌 참사를 보다 가까이에서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참사가 일본에서 발생한 것은 어떤 점에서는 행운인지 모르겠다. 중국에서 발생했다면, 그것은 원자력발전소가 위험해서라기 보다는, 중국이라서 그렇다는 쪽으로 해석되었을 공산이 크다. 한국이나 일본의 시민들은 보다 강력한 주장으로 원자력 발전에 반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 년 내에 중국 기원의 원전사고가 발생할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에는 중국 정부의 공식적 언급보다 한국이나 일본의 방사능 관측대가 먼저 반응할 가능성이 높다.

원자력발전이 선택 가능한 해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리스크가 크다는 것이 알려진 이상, 다른 대체 에너지원을 활발히 개발하든가 아니면 에너지소비 자체를 줄여야 한다. 중국같은 개발도상에 있는 나라, 또는 한국처럼 성장중독에 있는 나라가 선택하기에 후자는 너무나도 비싼 댓가를 치루어야 한다. 청정에너지의 모범사례로 손꼽히는 독일. 나는 한달에 60kWh정도를 소비하는 댓가로 25 유로를 매달 지불한다. 세금은 30% 정도가 붙어 있다. 한국이라면 사용료 56.2원/kWh, 기본료 380원이 적용되므로 3752원이 나오는데 여기에 부가세와 기금을 곱하면 4280원이 되고, 이를 유로로 환산하면 2.75유로 정도가 나온다. (전기요금 계산은 http://jjangfree.tistory.com/865을 참조) (처음에 30kWh라고 썼다가 정확한 통계를 찾게 되어 4월 21일에 고쳤다. 고치기 전에는 각각 2066, 2360, 1.5 였다.) 나는 혼자 살고 있으므로 이는 아주 극단적인 예시일 수 있다. 일반적인 가정을 비교할 경우 그 차이는 줄어들 수 있겠지만, 그래도 독일의 전기요금이 한국에 비해 훨씬 비쌀 것임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청정에너지를 사용하는 댓가는 이 정도로 비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이 원자력에너지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며칠 전 독일 정부가 오래된 원전 7기(처음에 9기라고 썼다가 4월 8일 수정)의 임시가동중단을 결정하였으므로, 전기요금은 더 비싸질 것이다.

다시 한국의 경우로 돌아가 보자. 지난 겨울 전기 사용량이 공급을 턱 밑까지 따라 붙자 정부에서 전기요금 현실화 카드를 살짝 꺼냈서 간을 봤다가 사람들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일단 물밑으로 접어 놓은 적이 있음을 기억하자. 그런데 원전을 폐쇄하자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짧은 인생을 돌아보건데, 국민학교·중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전등 스위치 위에는 절전 스티커가 붙어 있고, 물자절약 에너지절약 포스터 그리기 표어 짓기 따위를 했다. 절약이 미덕이 사회였던 것이다. 그랬는데 대학교 다닐 때는 이미 소비가 미덕인 사회가 되어 있었다. 그 빌어먹을 1997년 외환위기가 사회를 완전히 그리고 급속히 재편성해 버렸다. 한국의 일인당 에너지 소비량은 소득에 비하여 높은 편이다. 소득에 비하여 소비량이 적은 일본과 비슷한 수준이다. 온돌이 건강에 좋은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에너지 효율이 높은 시스템인지는 잘 모르겠다. 비슷하게 배달시켜 먹는 문화는 확실히 에너지 과소비 측면이 있고, 승용차 같은 것도 다른 나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대형이다. 한국의 자동차 메이커들이 내수용 차량을 튼튼하게 만들지 않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전철망은 일본과 비교할 경우 형편 없는 수준인데, 땅값이 너무 올라버려 네트워크를 더 이상 확충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번 지진은 확실히 인류의 역사를 바꿀 지진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일본 경제의 침체 이런 정도가 아니라,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에 어떤 제한을 걸어버린 마법같은 지진으로 기록될 것 같다. 중국이나 인도 같은 신성장엔진들이 얼마만큼 원자력의 유혹을 떨쳐버릴지는 미지수이다. 아니 개인적으로는 좀 부정적이다. 하지만 적어도 유럽에서는 거의 확실히 원자력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것 같고, 그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나라나 다른 중간보스 급의 나라들에서도 원전에 대한 사회적 비용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하리라 예상한다.

사회적 비용이 그냥 웃기고 자빠진 소리가 아니다. 후쿠시마 원전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의 인터뷰에서 읽은 이야기다. 자기는 조상 대대로 거기서 살아 왔다고. 그런데 정부가 그 근처에 원전을 지었고, 이제는 위험하다고 밖으로 나가랜다. 어디로? 그리고 그가 살아왔던 땅과 마을에서 계속해 살아갈 당연한 권리는 어디로? 우리나라에서도 보상금으로 땅투기 해서 부자되라는 속삭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다들 좀 불편하게 살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다. 아니,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