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23일 수요일

사람의 능력

어떤 사람을 더러 능력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평을 가끔 들을 때가 있다. 능력.

인간의 능력을 제한하는 요소들은 거의 대부분이, 그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것들이다. 신체적인 능력은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유전자에 의해서 많은 부분이 결정되고, 사회적인 인간관계 역시 어릴 적에는 거주 지역, 성인이 되어서는 부모의 직업이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상당부분이 결정된다. 그리고 재산의 상속이 있다. 여기까지가 기본 베이스고, 그에 더하여 게으름·부지런함, 신중한가 즉각적인가, 인색한가 방탕한가, 자폐끼가 있는가 푼수끼가 있는가 따위의 개인적인 성향이 나머지 부분들을 결정한다. 요즘에는 이런 말까지 들었다. 아이의 제로 베이스는 부모의 교양이라고.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자기의 능력이고, 어디까지가 부모를 잘 만난 덕일까. 세상의 많은 모순들의 근원은, 누구도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는 것이 있다. 어쩌면 모든 모순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어떤 인간도 그 둘이 분리되어서 평가될 수 없다. 원래부터 클래스가 달랐다는 말. 무한경쟁·무한책임·적자생존·약육강식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차라리 위안을 주는 말이다.

최근 능력이 대비되는 두 분을 봤다. 두 분 다 같은 사람에게서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되었는데, 국회의원이었던 한 분은 무혐의로 결정이 났고, 다른 한 사람은 지사직을 박탈당했다. 먼저 번의 사람은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능력, 혹은 죄의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능력자였고, 불행히도 두번째 사람은 그런 능력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있다. 부자아빠 거지아빠 열풍이 나라를 휩쓸던 시기였다. 그 열풍이 몰아치기 시작할 때 즈음부터, 부동산 폭등의 진원지에서 새로 주택을 구입하는 고위공직자의 모습을 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주택을 구입한 사람들은 그만큼 큰 재미를 보지 못했거나 큰 빚을 떠안게 되었다.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지금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는 두 층위가 있다. 관대한 층과 서든데쓰 층이다. 관대한 층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경쟁 보다는 담합을 한다. 그것이 장려된다. 한 두번의 실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얼마든지 재기의 기회가 주어지고, 그 동안은 쉬면서 취미를 즐기고 특기를 가다듬을 수 있다.

그 아래에 서든데쓰 층이 있다. 이들에게는 연대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들에게 연대는 실정법 상의 범죄이거나, 경쟁에서의 탈락 둘 중의 하나이다. 이들에게는 단 한 번의 실수나 패배가 용납되지 않는다. 그들은 쉴 수 없다. 더 나쁜 조건으로 밀려나기 때문이다. 그 경쟁을 이긴 자들에게는 경쟁한 시간만큼의 생존이라는 망극한 댓가가 주어진다. 그리고 이제는 태어날 때부터 관대한 층, 서든데쓰 층이 결정되어 있다. 드문 역전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그것을 더러 아직 우리 사회가 계층간 출입이 일어나는 건전한 사회라는 증거라고 하는 이도 있고, 그게 뉴스거리가 되는게 이미 우리 사회가 신분제 사회가 되었다는 증거라고 하는 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칙이라는 게 있다. 법이라고도 하더라. 그 규칙 어디에도 관대한 층과 서든데쓰층을 구별하라는 말은 없다. 공평하다. 법 앞에서는 만민이 평등하지 않던가. 어디에 관대한 층이 있고, 서든데쓰 층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관직을 통해서 자신의 음주 뺑소니 치사 같은 죄를 씼을 기회가 서든데쓰 층의 사람에게 주어지는 일 따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걸 보면서 배운다. 나에게는 추상같은 규칙인데 그 위에 빽과 힘이라는 게 존재하더라는 것을. 이제는 사람들이 그 힘과 빽을 사람의 능력이라 부르더라.

1월 말 쯤에 쓰다가 정리가 되지 않아 놓아 두다가, 김형을 보고 마음에 스치는 바가 있어 급하게 나머지를 체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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