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30일 금요일

흥, 대한민국이 누구껀데, 누구더러 법을 지키라는거야?

국가기구가 사유화되면, 누구도 손을 델 수 없어. 우리가 조선 말의 시궁창에서 배워할 건, 개화니 뭐니 하는 것 이전에 나라가 그짝이 된 이유, 국가기구의 사유화, 그거야.

하물며 개인의 작은 권리에도 책임이 따르는데, 어찌 권력을 잡고서는 책임에서 이리도 쉽게 벗어나는가. 또한 어려서부터 그런 특권이 내면화된 자들에게 대체 무슨 책임을 기대하겠는가.

특권이 통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하신 대통령이 우리 곁에 있었다. 그리고 국민은 그를 죽였다. 당해 싸지 않는가.

잊지 마라, 한일전 축구 전날은 그 분의 1주기이다.


사족: 선거·선거·선거를 통해 심판합시다.

동학 농민운동때, 부적들고 나가면 총 맞아도 안죽는다고 소문이 돌고, 사람들이 부적을 들고 뛰쳐 나갔다. 그리고 기관총에 맞아서 우수수 쓰러져 죽었다. 나는 투표 잘하자는 말이, 동학농민군 사이에 돌았던 그 말과 크게 달라 들리지 않는다. 이미 선거 따위를 통해서는 정상화 될 정부가 아니다. 방송과 언론, 선관위가 중립을 지킬것이라 생각한다면, 지성에 문제가 있는 사람임을 의심해야하는 상황이다. 투명한 선거. 말 참 좋다. 한나라당이 그 정도 못 되돌릴까? 이미 자유당때부터 해 오던 세살버릇인데? 선거 되돌리면(이걸 현 정부에서는 정상화, 선진화라 부른다는 것을 떠올리자.), 다음은? 고문의 부활이지!

폭력조직으로 거듭나고 있는 신흥 한나라파가 선거에서 크게 지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만약 그렇다 해고, 별별 시나리오가 다 준비 되어 있을 것이다. 당장 월드컵이 있고, G20까지는 시간이 붕 뜨는데, 이북이 미사일 하나만 동해에 발사해도 한달은 우려 먹을 수 있다. 그리고 야당 당선자 여럿 수사하겠지. 특히 서울·경기. 당선취소형까지 가는게 그리 어려울까? 마음만 먹었다면. 그러면 어쩔건데? 또 선거해야 해?

강도 들었을 때, 안방에 들어오면 보자. 강도가 안방에 들어오면, 서랍 뒤지면 보자. 서랍 뒤지서 털고 있으면, 마누라 건들면 보자. 마누라 자시고 나면?? 그 땐 뭐할껀데? 아마 2012년에 보자고 하겠지. 이미 마누라 자셨잖아, 마누라만 자셔? 딸래미들까지 줄뽕으로 다 꿰고 난 다음인데?

정권심판이라. 참 여유롭구나. 내가 느끼기로는 정권씹판이고, 정권씹창이다.



사족2:
다시 제목이다. 대한민국이 “de facto” 누구꺼냐는 거지. 지껄 지 마음대로 하겠다는 마음가짐이라면, 어떤 짓을 할 건지 헤아리기 그리 어렵지는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정권은 은꼴사가 아니라 대놓고 보여주기로 승부하는 정권이니까. 가끔씩은 얘들이 아예 딴생각이 들지 않게끔 겁을 주려고 이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10년 4월 20일 화요일

자연적 억제, 예방적 억제

낙성경제연구소의 연구논문집인 《수량경제사로 본 조선후기》를 연초를 전후해 읽었다. 첫 논문은 조선후기의 인구변화 시계열적 분석한 것인데, 족보를 이용한 접근이라는 점에서 참신한 연구라고 했다. 족보를 통해서 추정되는 인구는 19세기 동안 증가하지 않거나 감소한다. 그 이후 논문를에서도 계속해서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19세기는 정체 내지는 퇴보의 시대였다.

인구의 자연적 억제와 예방적 억제라는 개념이 그 첫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 제시되었다. 쉽게 말해 자연적 억제는 일단 낳고 난 다음에 살놈은 살고 디질놈은 디지게 놓아 두는 것이다. 식량 생산과 무역을 통해 부양할 수 있는 인구만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생산성이 정체된 사회에서는 인구가 극한값에 수렴하게 된다. 조선 후기처럼. 예방적 억제는 인구를 미리 줄이는 것이다. 만혼화, 피임, 낙태, 영아살해 등이 이용된다. 그 논문은 조선 후기의 인구 억제는 자연적 억제에 머물렀고, 동시기 일본과 유럽에서는 예방적 억제가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고 했다. 내가 과민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조선은 미개했다는 말을 하는 듯 한 뉘앙스가 느껴지는 것 같아 좀 불편했다.

그들이 용을 써서 창출한 신개념(무개념?) 정부는 역설적이게도 선진적 인구조절 기법인 예방적 억제를 불법화하기 시작했다. 그 극단적인 경우를 여기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Story.do?movieId=43763 에서 볼 수 있다. 그 영화를 아직 보지는 않았는데, 찾아서 봐야겠다.

묻는다. 종교적 신념에 도취해 남의 인생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는 성스로운 분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태어날 아기들의 인생에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시설아동으로 커 간다면 운이 좋은 축에 들 그들에게. 그리고 산모에게도 평생 엄청난 짐을 지울 당신들. 그들이 어른이 되어 사회의 맨 바닥을 깔아 줄 때, 그들에게 대고 생명의 은인이라고 으스델 것인가? 불쾌한 인간들 같으니.

난데 없는 바른생활사나이들 때문에 공포와 불안 속에 있을 젊은 산모들과, 또 태어나 고통의 세상을 살아야 할 아이들이 너무너무 불쌍하다. 불쌍해 미치겠다. 왜 원인이 명확한 동정과 안타까움이 분노로 연결되지 않겠는가.

짜장면은 짜장면이다

언어는 개인마다 고유하다. 개인의 내적언어는 인격을 구성하는 큰 부분이다. 반면 내적 언어의 무한한 다양성을 언중이 모두 수용할 수는 없다. 따라서 언어에도 표준이 필요해진다. 대한민국에서는 표준어가 이 역할을 하고, “교양있는 현대 서울사람들이 두루 쓰는 말”이라고 그 범위가 규정되어있다.

어떤 개인의 언어를 비표준으로 낙인 찍는 것은, 그 개인을 구성하는 인격의 일부분을 비표준으로 규정하는 것이므로 공격적인 행위가 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언어의 표준은 엄격한 기준을 통과하여 정해져야하고, 정합적 논리성을 유지해야 하며, 가장 많은 언중을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기준으로 언어의 표준이 정해진다면, 저항이 생길 수 밖에 없다.

나는 표준어를 규정하는 사람들이 어떠한 기준으로 표준어를 정하는 지 알 수 없다. 짜장면은 중국어기 때문에 외국어 표기에 된소리를 사용하지 않는 원칙 상 짜장면이 될 수 없다? 짜장면이 외래어인지도 의심스럽지만, 그럼 자장미엔이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아니면 황허 강 같이 자장미엔 면이 되든가. 멀리 갈 것도 없이 짬뽕은 왜 짬뽕인가. 어원을 살려 적는 것이 원칙이라면, 삭월세는 웨 사글세가 되었는가. 다들 사글세로 발음하기 때문이란다. 좆까. 정말이지 사글세라는 말을 왜 예외적인 표준으로 만들어서, 적어도 내가 살던 지방에서는 들어보지도 못한 것을 받아쓰기 맞추려고 10살짜리가 외워야 했는지 아직도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그 이후로도 사글세라는 형태의 주거임대방식을 들어 본 적 없다. 그러면서 어떤 예외없는 원칙이 있길래 언중 대다수가 사용하고 발음하는 짜장면을 짜장면이라고 쓰지 못하느냔 말이다.

왜 짜장면을 짜장면이라고 부르는 대다수의 언중을 비표준으로 몰아내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예외는 정말로 예외적이어야 한다. 한 번 예외를 허용하면, 이렇게 되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사글세라는 빌어처먹을 전례만 아니었다면, 자장면이라고 쓰고 짜장면이라고 읽는 부조리한 상황을 받아들였을 것 같다. 왜 그런거 많잖아. 누가 버스를 /버스/라고 읽는가 /뻐스/라고 읽지. 아마 그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짜장면은 외래어가 아니잖아.

무원칙하게 정해지는 표준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나는 표준에 가까운 경상방언 화자다. 표준어과 사투리가 대립하는 지점에서 표준어가 옳은 것이고, 사투리가 틀린 것이라고 의심없이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았다. 경상도 사람들은 ㅓ 랑 ㅡ 구별을 못해, 남도 사람들은 ㅔ 랑 ㅐ 구별을 못해, ㅚ랑 ㅟ는 단모음으로 발음해야 해. 등등 또, `맑은'은 /말근/이라고 읽고, `맑다'는 /막다/로 읽어야 해. 좆까. 각 도마다 각각의 버전이 있겠지. 그런 것을 보면, 이런 식의 표준어 강요는 지방민들에게 무기력을 학습시키고, 자존감을 박탈하며, 향토애를 뿌리부터 제거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못난 언어를 쓰는 못난이들이라고. 대한민국이 얼마나 많은 전통과 뿌리를 부정해 왔던가. 그리고 그 해독이 만연해 있지 않는가.

텔레비전에서 생글생글 웃는 아나운서들이 이건 맞고 저건 틀렸다고 말하는 것 보면, 예전에는 저 사람들이 잘난 사람이니까 맞는 말이려니 했는데, 요즘 보면 이것들 하는 꼴이 웃기지도 않아. `정구지찌짐'이라는 단어를 쓰면 무슨 외계에서 온 사람 보듯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는데, 나도 면상에 똥을 싸갈겨주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부추부침개' 난 이 단어를 들으면 아무런 맛도 떠오르지 않는단 말이다. 대체제가 이토록 부실하기 때문에 나는 정구지찌짐을 부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다른 경상방언의 특징에 대하여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욕도 마찬가지다. 짜파게티 끓일 때, 실수로 스프를 끓는 물에 바로 넣은 직후, 아차 싶지만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 씨발”이라고 외마디 한탄을 하는게, 막되먹은 쌍놈이라 그런가. 아니다. 그 감성은 그 단어가 아니면 표현할 수가 없다. “이런” 정도로 그 상황에 대한 원망이 표현되는가?

나의 언어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면, 아마도 나는 나의 언어를 부정해야 할 것으로만 바라보았을 것이다. 짜장면을 짜장면으로 부르고 쓸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나는 규범에 어긋나지만, 짜장면을 짜장면이라고 부르고, 짜장면을 짜장면이라고 `쓸' 것이다. ㅆㅂ.

2010년 4월 5일 월요일

크림을 만들었다.

오늘은 크림을 만들었다. 껄쭉한 우유를 계속 치면 크림이 된다는 설명이 적이 괴이쩍었으나, 된다고 하니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실은 이전에 이미 수차 도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거품이 둥둥 뜬 껄쭉한 우유를 만들고야 말았다. 다들 버렸다.

오늘도 반신반의 하는 상태에서 시작하였다. 하다 안되면 또 버려야지 하는 심정이었다. 최초 10분이 될 때까지 예전 실패했던 상황이 되풀이되는 느낌이라 많이 속상했다. 팔만 아프고, 또 배리는구나. 기왕 이렇게 된거 정말로 함 쎄리 쳐 보자 하는 생각이 들어 사발의 공간을 모두 사용하여 퍽퍽쳤다. 잠시 후 전체적으로 점성이 높아지고 성상이 좀 달라지는 것 같아 신이 나서 더세게 쳤더니 결국 크림이 되었다. 하하. 하지만 팔이 많이 아프고, 힘이 든다. 한 20분 정도 쳤던 것 같다.



바닐라 가루를 좀 넣고 더 친 다음에 만들던 티라미수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