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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13일 금요일

또 다른 양극화의 양상

총선 결과에 대하여 나도 한 마디 거들고 싶다.

선거 결과를 보고 거의 하루 내 멘탈붕괴상태였다가, 서서히 회복되는 느낌이다. 먼저 총평을 하자면 일단은 참패다. 나는 야권성향이므로, 민주통합당-통합진보당 연대의 입장에서 썰을 풀 것이다. 일차적인 목표였던 영남지역 교두보 마련에 실패했고, 더하여 강원과 충청권에서도 많은 의석을 잃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더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었지만, 경합지역에서 많은 경우 근소한 표 차이로 석패했고, 무시할 수 없는 수의 지역구를 놓쳤다. 조금만 투표률이 높았더라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조금 더 속을 들여다 보면 개털린 것은 또 아니다. 일단 서울에서 어쨌든 무난하게 이겼다. 회자되는 이야기지만, 서울 총선에서 참패한 정권은 “사라졌다.” 물론 새누리당이, 그렇게까지 좆망 수준의 참패를 한 것은 아니다. 또 다른 긍정적인 부분은 전체 득표는 오히려 야권이 여권을 능가했다는 점이다. 다음 싸움은 대선이다. 더 이길 수 있었지만 못했던 것은 사실이고, 존나 아쉽다. 하루의 멘붕에 충분히 갑할만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158:142라면, 나쁘지 않다고 본다. 지금까지 야권이 이렇게까지 의석을 먹어 본 적 별로 없지 않는가? 탄핵의 충격 때, 열린우리당이 먹었던 의석의 꽤 많은 수의 퀄리티는, 푸핫, 말을 말자. 의회 상황은 20년래 최선이다. 얻을 수 있었던 맥시멈은 아니지만, 괜찮은 거다. 17대 국회에서 한나라당은 120여석으로 칠 수 있는 모든 깽판을 쳤다. 일례를 들자면, 전효숙 대법관 임명무산 파동을 들 수 있겠다. 별로 안좋은 상황에서도 멕시멈 유틸리티를 끌어 내는 저들의 능력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참패했다고 볼 수 있는 요인들은 부정적이다. 아직까지 시뻘겋게 살아있는 지역주의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나마 우리에게 위로를 준 요인들은, 장기적으로 미래에 야권에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은 요인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가. 여기부터 다 내 생각이다.

이번 선거에서 나타났던 두 가지 특징: 1) 전체 야권득표가 여권득표를 앞선 점, 2) SNS와 온라인에서의 뜨거운 정권심판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투표률이 높지 않았던 점에 주목하게 되었다. ㅆㅂ 왜 그렇지? 인구동력학적 관점에서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먼저 관찰 1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사람은 다 죽는다.” 87년부터 극명하게 나타났던 지역주의의 볼모 세대들이, 자연사하고 있다. 이들의 투표성향은 재생산률이 생각보다는 높지 않다. 제시했던 관찰 1에서 이와 같은 결론이 내려지기 위해서는 지역주의의 볼모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선거에서 무조건 여권에 투표하지 않는다라는 가정이 성립되어야 한다.

영남지역에서 지역주의의 재생산을 견제하는 요소는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중학교 3학년 사회 교과서, 고등학교 1학년 일반사회 과목에 지역보고 투표하라는 말은 없다. 지역사회를 휩싸고 있는 분위기가 광기에 불과함을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교육을 통해서 익혔는가 하는 부분에서 개인의 교육 수준을 논할 수 있다. 나는 가카의 심판 여론의 원인이 되었던 이번 정권의 비행이, 결코 옹호할 수 없는 수준의 범죄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교육의 효과가 나오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지역주의 세대보다 어린 세대의 경우, 소수의 세습귀족을 제외하면, 고자산계급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기회가 축소되었다. 대부분의 경우, 계급적 이익을 떠나 현 정권에 대한 평가가 이번 선거에서의 투표여부 그리고 투표의 성향을 결정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관찰 2는 SNS 열풍이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트위터, 페북 등의 SNS 서비스는 누구나 다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단 계정 관리를 위해서는 시간이 든다. 둘째로 할 말이 없으면, 쓸 말이 없다. SNS의 활발한 사용은 시간적 여유가 있음을 뜻하거나, 정렬적인 상황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 만큼 계속적인 동기부여를 받고 있은 상황을 뜻할 수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사회활동을 통해 자극을 받고 있고, 그 자극을 타인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앞서 제시한 교육의 성공 여부가 흔히 말하는 교육 수준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상관관계를 보일 것임은 짐작할 수 있다. 단순히 이야기하자면, SNS는 (경제적∪지적∪사회적 자산이) 있는 놈들의 사치품이다. 어제 나왔던 매일경제의 새장에 갇힌 트위터라는 기사는, 끓어올랐던 가카 심판 분위기가 트위터 안에서 만의 난리굿통이었음을 지적하는 부분까지는 동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 기사에 포함되었던 악의에 찬 인터뷰나 야권에 대한 조롱은 그 신문의 밑바탕과 근본을 잘 보여주었다. 소득수준에 따라 정보접근에 있어서도 격차가 벌어짐은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대강의 스케치를 상상해 본다.

장기추세 1) 87년에 유권자였던 사람들을 지역주의 세대라고 하기로 한다. 이들은 투표률이 높고, 또한 투표 성향이 균질하다. 이들보다 어린 세대는 투표률이 이들 보다 낮고, 투표 성향도 균질하지 않다. 시간이 가면서 지역주의 세대는 자연사하고, 이에 따라 전체 투표률은 점차로 낮아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들의 지역주의적 성향은 자식세대에게 전해지기도 하고, 그러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지 못하는 경우를 교육의 성공이라고 이름붙이겠다. 지역주의 성향 역시 시간과 함께 서서히 희석된다.

장기추세 2) 97년 이후로는 영남의 젊은이들 마저 수도권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할 만큼 지역경기의 장기적 하강추세(이라고 쓰고 좆망이라고 읽는다)가 계속된다. 더불어 수도권의 여권성향이 짙어진다. 고자산계급에 진입하는 인구의 증가와 영남출신 인구의 유입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일자리 질의 악화로 인해 지방출신 젊은이들에 대한 자연선택이 강요된다. 일자리 찾기 경쟁에 성공한 출신 젊은이들은 수도권에 남고, 그러지 못한 젊은이들은 귀향한다.

단기추세) 2010년대 들어 SNS가 등장했다. 2000년대부터 시작된 인터넷 및 통신기술 발달의 연장선 상에 있는 현상이다. SNS는 그 동안의 어떤 온라인 통신서비스보다 계급차별성이 짙다. 따라서 교육에 성공한 사람들이 이 기술을 향유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총선에서) SNS상에 불었던 정권심판 바람은 SNS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나 그 주변에서만 제한적인 투표률 상승을 가져왔다. 수도권에서는 그 역할을 했지만, 영남에서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가설은 완전히 검증될 수는 없으므로 과학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교육의 성공이라는 표현 자체가 상당히 주관적이고, SNS가 가진 자들 만의 장난감이라는 부분도 나의 추정 이상의 근거는 없다. 지방출신 젊은이들의 분별이 일어났다는 가정 역시 개인적 경험 이상의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또한 선거전에서 사용된 전술이라는 변수를 완전히 무시하였기 때문에, 편차가 포함되었다. (그게 뭔지는 저도 모르죠.) 단, 한 달 정도 후에 나온다는 투표률 통계에서 영남지역 젊은이들의 투표률이 수도권 젊은이들의 투표률보다 낮게 나온다면, 위 가설이 어느 정도 모델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한 가지 반드시 병행되어야 할 부분은, 이번 선거에서 투표를 하고 싶었으나, 생업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사람이 누구인지,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SNS 차별가설은 투표불참을 자발적 행위로 설명하게 된다. 이런 분석은 투표권을 박탈당했던 사람들에게 모욕을 더할 뿐이다. 양자의 영향을 함께 분석해야 한다.

덧) 보다 감성적인 언어로,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4월 16일 추가)

2012년 1월 13일 금요일

누가 짐승일까, 아니 나는 짐승이 아닌가?

지난해 12월 2일 대전에서 여고생이 왕따를 당하다가 집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두 주가 지나고 20일 이번에는 대구에서 남자 중학생이 학교폭력을 견디다 못해 눈물겨운 유서를 남기고 자신의 집에서 투신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보수 언론이 뛰어들었다. 그 중 삼류로 여겨지는 동아가 초조함에 선빵을 내질렀다. 한동안 포털 사이트의 메인 기사는 동아의 학원폭력 가해자를 성토하고, 그 실태를 까발리며, 강한 처벌을 주문하는 기사로 채워졌다. 해가 지나자 이제는 조선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틀 전 조선은 학교폭력 가해자들의 사회 계층을 보여주었고, 오늘은 그 원인을 게임 등의 폭력물로 돌렸다.

이들은 청맹과니일 수도 있고, 눈을 가리고 아웅을 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진실을 마주하는 데에는 용기와 지성이 필요하다. 그 두가지를 마음에 품고, 우리 자신의 십대를 뒤돌아보자. 교실이 평등한 우정의 공동체였던 적이 있었는가? 안 그랬잖아. 원래부터 안 그랬잖아.

엄기호의 말을 빌리자면, 교실은 촘촘하게 구축된 위계질서였다. 그 위계의 꼭대기는 돈이 많은 아버지의 자제분들과 특별하게 싸움을 잘하는 자들의 연합 내지는 동맹이었고, 그 위계의 가장 아래에는 위생에 신경쓰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거나, 아무 특징도 없으면서 공부마저 지지리도 못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씨발, 짜증나게 이상한 것은, 부자면서 싸움도 잘하는 놈들은 대체로 잘생겼고 공부도 잘했다. 가장 아래에 있던 아이들은, 역시 대체로 생긴 것도 비호감이었고, 지금 돌아보자면, 표가 나지는 않지만 분명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교실에서 공부하던 십대의 마지막 해이던 고3의 한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지나가는 듯한 말로 경고했었다.
느그들 이 중에 우리집도 함 잘 살아봤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놈들 있제? 지금 공부 한하면 평생 우리집도 함 잘 살아봤으면 좋겠다 생각만 하면서 살게 된다.
그 발언이 비교육적이라는 단면적인 인상비판은 사양한다. 그것은 공갈도 협박도 아니었고, 단지 높은 개연성을 가지는 두 사건을 나란히 놓아 그 대비를 선명하게 했을 뿐이었다. 교실은 그냥 사회였다. 사회의 계급이 그대로 투영되고, 그 계급이 거의 변화없이 재생산되게 만들고, 혹은 그것을 정당화하는 기제였다.



중학교 때의 한 해, 우리반의 정치지형은 특별히 인상적이었다. 싸움 잘하고, 공부 잘하고, 잘생기고, 집도 부자인 놈이 나와 한 반이었고, 자연스럽게 반장이 되어 나머지 52명을 장악하는 권력을 사실상 독점하게 되었다. 그는 또한 현명하기까지 했다. 그와 코드를 최소한 맞출 수 있는 정도로 놀 수 있는 대여섯 놈들은 일종의 이너써클을 형성했고, 이들에게 권력의 일부를 떼어 주었다. 예를 들자면 이너써클의 일탈은 담임에게 보고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다른 5년동안 나는 한 번도 이런 철저한 계급화와 효율적인 권력의 사유화가 학급에서 실현된 경우를 목격하지 못했다. 어쨌든 그는 함께 중학교를 다니던 3년 동안 교사들 사이에서 능력있는 반장이라는 평가를 받는 듯 했다. 나는 이너써클에 들어갈 만큼 자원(자본, 운동신경, 외모)이 충분하지 못했고, 부당한 대우에 상황파악 못하고 몇 번 “개념없이” 도전했고, 그 결과 그 존재감 있는 놈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특히나 그 중 한 마름 비슷했던 놈과 빈번히 충돌했으나, 나는 주로 맞는 편이었다.

그 경험은 학원 폭력을 내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전문가들을 불러놓고 하는 인터뷰나 토론을 보면, 좀 병신같다. 먼저,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알리지 않는댄다. 그래서 소통을 늘려야 한다고. 요즘 병신과 병신이 아닌 사람들 구분하는 방법은 소통에 있다. 소통을 떠드는 놈들은 십중팔구 병신이다. 준비가 되지 않은 소통은 병림픽 데쓰메치이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 고주알 부모나 교사한테 말하는 10대 사춘기소년은, 비정상이다. 걔네들이 얼마나 자존심이 센데.

둘째 교사가 반에 더 신경을 써야한댄다. 제발. 빈다. 부탁이다. 걔네들에게 잡무 맡기지 마라. 아니면 교사를 더 뽑아서 둘 중 하나는 생활지도에, 나머지는 행정 처리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해라. 걔네들 시간 없고, 또 역시나 가정을 가진 생활인이다. 애정과 관심 또한 제한된 자원이다. 피해자가 병신이 되거가 죽고 난 다음에도 자기 책임 없다고 발뺌하는 교사들도 효수감이지만, 감당이 되는 만큼만 책임을 져야 시스템이 돌아간다.

셋째 폭력물 탓 하지마라. 슬램덩크에서, 정대만이 농구부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체육관에서 양아치들과의 피터지게 싸워야 했다. 서태웅은 출혈과다로 쓰러져 죽을 뻔(?) 했으므로, 대단히 위험한 폭력장면이다. 그런데, 그래서 슬램덩크가 쓰레기 폭력물인가? 그 장면이 잘려 나가면 슬램덩크의 정대만이라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살아날 수 있을까? 내가 체육관 장면을 폭력물과 연관짓는 게 오바 같은가? 천만에. 실재로 1993년 당시 이 장면을 두고 폭력물 시비가 있었다. 게임과 폭력물이 없으면, 테스토스테론이 넘쳐나는 10대 남자애들이 얌전히 있을 것 같나? 요즘 중학생들이 온라인 게임에서 몹과 몬스터들 때려 잡는다는데, 내가 고만하거나 좀더 어렸을 때도 오락실에서 스트리트파이터II, 철권 따위를 했고, 용돈 떨어지면 개미, 잠자리 잡아서 다리 떼고, 날개 떼고 놀았다. 폭력물을 접해서 폭력적으로 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좀 폭력적이기 때문에, 폭력물을 좀 보고 즐기는 것이다. 중학교 생물에 붕어, 개구리 해부는 아직 있나 몰라.

넷째, 많은 경우 일대다의 충돌이다. 여럿이서 하나 따돌리는거. 이걸 언급하는 전문가를 본 적이 없다. 개별 행위는 정말 사소하다. 결코 범죄를 성립시켜서 처벌할 수가 없다. 사람 둘 있으면, 하나 바보 만드는 거 식은 죽먹기이다. 이건 직장에서도, 군대에서도, 사회에서도 항상, 늘 존재한다. 대상이 학생일 경우에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걸 적용해서 사회의 많은 문제도 함께 해결할 수 있겠다. 안된다는 말이다. LG 왕따 사건을 보라. 당하는 놈을 바보 만들어야 굴러가도록 만들어진 사회이다. 그걸 법이 인정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학원폭력이 계급 문제라는 것을 언제 쯤 인정할텐가? 즉, 학부모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을 언제 인정할 것이냐는 말이다. 아이의 행실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사회생활에 적합하도록 교정을 가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에서 다시 가정의 문제도 돌아왔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지식을 바탕으로 용기를 내어 오해를 사기에 딱 좋은 생각을 해 본다. 인간의 형질은 유전될 수 밖에 없으므로, 비(非)신분제 사회에서마저 관찰되는 계급의 재생산은 그 물리적, 자연적 원인을 가지고 있다고. 그러면 그게 당연한거니까 내버려 두란 말인가? 아니, 오히려 차별과 폭력을 조장하라는 말 처럼 들린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그렇지만”을 꺼내 본다. 그것을 통해야만 지식이 아니라 지성이 작용하는 치역으로 사상될 수 있다. 잘난 놈도 있고, 못난 놈도 있지만, 그렇지만, 못난 놈이라서 비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게 하지 말고, 또 잘난 놈이라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할 수 없게, 그런 규칙에 모두의 동의를 구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다. 인권을 넘어 모두에게 존엄을 보장할 수 있게 말이다. 구체적 인간은 타고난 능력과 키워진 환경이 모두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가만히 놓아 두면 그 차별이 너무나 “비인간적인 상황”을 만들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더 존엄의 하한선만은 무조건 지켜져야 한다는 논리이다.

보수언론은 학교폭력 가해자들과 그들의 공범인 폭력물에게 짐승이라는 비유를 가져다 붙였다. 그러나 학교폭력이 결국은 계급의 반영이라는 점을 목도하고 나면, 계급간의 반목과 질시, 동경의 헤게모니와 값싼 동정을 이용하여야만 유지될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해 온 기존의 시스템, 그리고 그 시스템의 협력자들이 짐승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그리고 어쩌면, 나도 짐승일지 모른다. 남이 짐승임을 확인하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