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8일 금요일

지성인이 되고 싶었다

2학년 1학기 교양수업으로 나는 동아시아 문명의 사적 전개라는 수업을 들었다. 금요일 오후 수업이었으므로 전체 16강 중에, 첫 수업, 중간고사, 기말고사, 휴일 겹치는 거 빼고 하니까 11강인가 12강인가가 남았다. 그 중 8시간 중국사, 나머지 한일월 한 주씩. 이렇게 수업을 했다. 아, 중국사의 비중이 엄청나구나, 그것을 배웠다. 그 다음 3학년 1학기에는 외대 교수님께서 출강하신 교양 아랍어 수업을 들었고, 그 다다음 학기에는 개관 일본사, 그 다음에는 중화민국사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1학년 때는 문화인류학을 듣기도 했었네. 내 전공과는 아무 상관없는 수업이었지만, 배우고 싶었고, 실재로 재미있었고, 또 그 때가 아니면 결코 배울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결과는 보통이었다. 전공과목들과 별 차이 없는 점수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개관 일본사는 평균보다 좀 많이 떨어지게 받았다. 일반 교양과목이 아니라 동양사학과 핵심교양과목이라서 그랬는가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존나 재미있었거든.

그런 경험을 통해서 전인적 교양에 한 발작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교과서 위주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선택과목의 자유도가 높지 않은 시절이었기 때문에, 학습량이 많았지만, 전반적인 지식의 범위는 꽤 넓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대학의 공기는, 춥다고 창문 닫아 놓은 겨울철 남자 고등학교 교실의 공기와는 완전히 달랐다. 스스로 박식하다고 여겼던 내가 아는 수준이란, 단지 그 세계의 베이스일 뿐이었다. 내가 전공으로 선택한 지구에 대한 이해를 완벽하게 하고 싶다는 욕심은 대학 입학 전부터 가지고 온 것이었다. 그러나 대학은 그것만 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많은 기회를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조금 한눈을 팔면서, 내가 궁금해 하고 재미있어하던 역사와 지리에 대한 수업들을 찾아 들었다.

사실에 대한 지식, 원리에 대한 이해, 합리적인 사고방식, 선입견과 반대되는 사실을 마주쳤을 때 가져야할 태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 것들로부터 만들어지는, (인문·사회·자연·예술 모든 측면을 망라한) 세상을 바라보는 오직 그 사람만의 관점. 이런 것들이 바로 전인적 교양교육을 통해 얻어지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미·추에 대한 기호, 선·악에 대한 판별은 개성의 문제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므로 제외했다. 그리고 이런 전인적 교양에 덧붙여, 혹은 더불어 전문적 지식과 경험이 쌓여야 비로소 하나의 사회인이 완성되고, 이에 추가로 행동하는 용기가 더해지면, 그 때야말로 그 사람을 지성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성인이 되고 싶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치기 어렸지만, 자연과학을 공부한다는 점에서 정말로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었다. 인문대 수업을 들으면서 전혀 생소한 방법론들을 접할 때도, 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이 이질적인 요소들이 수렴되는 지점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지금 역시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 때보다는 많이 게을러졌고, 사실 시간이 지난만큼 쌓인 것도 별로 없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학점 잘 주는 수업을 골라 듣는 사람들을 낮추어 보았다. 수강편람을 뒤지며 수업을 찾을 때, 누구 수업이 재미있다는 것은 상관없었지만, 어디서 들었는지 누구 교수가 학점을 잘 준다고 하니 그 수업을 듣겠다는 말에는 언짢게 반응했었다. 비례물청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포카페이스가 아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하려했지만, 정색하는 내 표정을 상대는 분명히 봤을 것이다. 그 시절 나는 앞서 말한 그 단 한 부분에서는 확신에 차 있었다. “학점좆망가능”이라는 경고는 무섭지도 않았었다. 신기하고 재미있었고, 그래서 나는 굶어야 할 만큼 돈이 없었지만, 그런데도 심지어 행복했었다.



언론을 통해 보이는 지금 대학의 공기는, 내가 느꼈던 공기와는 확연히 달라 보인다. 어느 학교에서건, 학생들에게 허락된 단 하나의 자유는 학점과 스펙의 경쟁뿐인 듯하다. 대한민국은 빚을 강요함으로서 전 국민을 거대자본권력에게 인신적으로 종속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국민들은,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젊은이들의 피를 바쳐 얻어내자마자, 그 자유로 빚을 내어 그들의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자본에게 가져다 바쳤다. 빚을 내는 순간 지금의 기성세대들은 그들의 현재를,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은 그들의 미래를 저당 잡혔다. 빚을 진 사람은 정말로 노예가 된다. 현재의 대학생들은 학자금 융자 빚과는 관계없이, 이미 미래가 자본권력에 손에 저당 잡혔다. 그들이 채권자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행동할 자유 따위는 이미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전인적 교양교육을 강요할 수 있는가? 기성세대가? 그럴 수 있다면, 그들에게는 내가 이명박에게 주는 경멸을 보낸다. 단 지금의 대학생들은 용기라는 고귀한 가치를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나와 내 또래는 배울 수 없었던 그 용기라는 가치 말이다.

또 다시 최고수준의 이공계 학생이 자살했다. 올해 들어서 그가 다니던 학교에서만 벌써 네 번째다. 징벌적 등록금제 때문에 생긴 심리적 압박이 그 원인이라고 하는데에, 동의한다. 동의할 수밖에 없다. 학점으로 사람들 들들 볶으면, 전인적 교양교육은 불가능하다. 물론 대학의 존재 가치에서 전인적 교양인을 양성하는 측면은 완전히 배제되어야 하고, 전적으로 전문적인 기능인을 양성하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고 우긴다면 그 지점에서는 논리를 맞추겠지만, 그렇다면 대학과 직업학교는 어떻게 다르며, 직업인을 육성하는데 드는 비용을 왜 기업이 아닌 가계가 부담하느냐는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다음 질문이다. 징벌적 등록금을 도입한 사람을 과연 교육자로 볼 수 있는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현명한 채권자는 채무자들에게 자신이 주인임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채무자들을 경쟁시킬 뿐이다. 그 대학교의 총장이라는 서남표라는 작자도, 채권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 역시 다른 대학총장들과 경쟁을 하는 채무자에 불과하다. 채권자가 왜 경쟁을 하겠는가? 대가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따라서 총장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교육자라는 것은 의복에 불과하다. 만약 그가 공기업에 낙하산을 타고 가면 경영자가 될 것 아닌가. 옷을 갈아입는다고 채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경쟁이라지만 도라는 게 있다. 점수나 등수는 어쨌든 한 개 스칼라량에 불과하기 때문에 모든 정보를, 혹은 요새 유행하는 말로는, 모든 비용이나 편익을 표현할 수 없다. 잔인한 학점·등록금 경쟁을 붙여 학교 평가등수가 높아졌는지 모르지만, 그 향상된 어떤 가상의 지표는 그 경쟁 때문에 작아져 버린 학생들의 행복도는 포함하고 있지 않은 지표이다. 여기에서 매우 정의롭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 학교 평가등수 상승이라는 이익은 총장에게 가고, 행복도의 하락이라는 손실은 학생에게 돌아간다. 요새는 그 말도 유행하데. “이익의 사유화, 손일의 사회화”라고.

어떤 문제에서 고려하지 않는 변수라는 말은, 그것이 실재로는 존재함을 의미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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