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6일 일요일

선진국은 투표율이 낮다

내가 국민학교 고학년 시기를 보내며 사춘기를 준비하고 있을 시기, 당시 내가 살던 지역 국민학생들의 사상계에는 “《먼나라 이웃나라》를 읽지 않은 자 함부로 똑똑한 척 씨불지 말지어다.”정도의 룰이 있었던 것 같다. 말 그대로다. 《먼나라 이웃나라》는 만화라지만 꽤 두꺼웠고, 글자도 작았다. 전체 분량의 절반 정도를 유럽 역사에 할애한 책이 당연히 쉬운 책일 수만은 없었다. 요거 읽고 나불나불 거리는 정도면, 그 내용을 이해하고 기억한다는 것만으로도 꽤 먹어줬었던 기억이 난다. “어, 임마 뭐 좀 아네”하면서.

어느덧 시간도 벌써 20년이, 쒯, 흘렀고, 늙은 유럽이라 하던 유럽도, 사람이 변하는데 가만히 있을 방도가 없다. 그 책이 역사를 제외한 나머지 반을 할애해 서술했던 많은 내용들이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독일은 통일 된지가 하 세월이고, 스위스는 더 이상 산중의 조용한 나라가 아니다. 프랑스의 자존심도, 영국의 똥폼도 이제는 그때와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 네덜란드사람이 외국어 잘한다는 거랑 이탈리아사람들이 개판이라는 것만 아직까지 유효한 듯 보인다. (이번 우에파 결승 때, 이탈리아 사람들이 줄을 잘 맞춰 서는 곳은 페널티킥 박스 앞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 책이 사람들에게 심어준 대상에 대한 고정관념은 실체가 변하는 만큼 빨리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에는 독소라고 불려도 과장이 아닐 치명적인 오해도 있었다. “선진국은 투표율이 낮다”는 것이다. 선진국에서조차 보통선거가 정착된 것이 20세기 전반이었던 것을 되새겨보면, 1980년대에 저술된 이 책이 얼마나 최신의 경향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참고로 지난 5월 9일 있었던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의원선거의 투표율은 59.3%였다. 대한민국의 17대 총선은 60.6%, 18대 총선은 46.1%였다. 선거 보도를 보면 투표율을 이야기를 참 많이 하는데, 거의 대부분은 시계열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반면 외국 사례와의 비교는 의외로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기자들이 알면서 보도를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비교대상이 될 만한 외국은 다들 투표율이 낮을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미국의 투표율 밖에 알아내지 못해서 유럽은 스킵된 것일까?

각설하고, 나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강하게 던져졌던 그 메시지 “선진국은 투표율이 낮다”가 대한민국의 낮은 투표율을 일정 부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젊은 세대일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사람은 책잡힐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을 직시하는 것보다는, 합리화하는 방향을 선호한다. 잘못을 직시하는 것은 앞으로 내가 변해야 하고, 그 만큼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합리화하는 쪽은 자기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 “선진국은 투표율이 낮다”는 기똥찬 합리화 이유를 대준다. 나는 편하고, 나라는 선진국이 되는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죽으나 사나 선진화 4만 불을 외치던 지난 대선의 투표율은 사상 최악이었다. 그래서 선진국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인과의 순서가 반대가 되었으니 그리 될 턱이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수사로 고초를 겪고 있었을 때, 한 지인께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다. 검찰이 저렇게 수사를 하는 것은, “거 봐라, 저 새끼도 저렇게 썩었다니까. 니가 이명박 더러운 줄 알고 뽑은 거, 미안해 할 필요 없어.”라는 합리화 제공 팬서비스 차원도 좀 있다고. 뭐 나는 그 쪽 사람들의 맨탈리티에 대하여 거의 모르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얼마나 일반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는 그걸 좀 더 넘어서, “비천하고 더러운 위선자 새끼다! 더 저주해라!”라는 선동에 가까워 보였지만 말이다.

사실대로 고백을 하자면, 《먼나라 이웃나라》를 읽은 다음에 사춘기를 넘기 전 같은 저자의 책을 두 권 더 읽었다. 《자본주의 공산주의》와 《한국 한국인 한국경제》였다. 중학교시절 나는 때늦은 반공소년이었다. 다행히 올바른 국사선생님께 국사를 배웠고, 또 집에 있던 또 다른 세계사학습만화(다행히 요거는 이교수가 그린 책이 아니었네요.)를 읽으면서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이번 대선에서는 김대중이 당선되어야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방패막이를 하자면, 중학교 때의 반공소년은 거의 컨셉이었다. “빨갱이 때려잡아 민주평화 이룩하자”라고 미친 척 내지르는, 딱 중2병. 그 두 책은, 특히 《자본주의 공산주의》는, 꽤 중립적이었다고 여겨진다. 원작이 다른 사람이어서 그럴 수도 있고, 혹은 작가 자신이 아직까지 이념적으로 경도되기 전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공산주의》에 나왔던, 1830년 영국 노동자의 평균 수명 28세, 일요일 없는 日14시간 노동이라는 서술, 이미 얼굴에 주름이 진 12세의 소년 노동자의 초상은, 단지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기를 바라는 부질없는 마음 밖에는 일으키지 않았다. 지금의 이교수라면, 아마 그 장면, 편집했을 것 같다.

나는 운이 좋았던 사람이다. 사춘기 이후에도 배울 수 있었고, 대학에 가서도 또 한 번 더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하지 못한 채 나에게 강요 내지 주입되었던 사고의 틀들을 반성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만약 내가 부산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지금과 같이 맹렬히 여당을 비판할만큼 성숙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는 2010년 6월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사춘기 시절에 더 이상 배울 수 없게되었다면, 아마 몸은 막노동 일을 하면서, 입으로는 주둥이만 산 좌파놈들 혹은 전라디언 개새끼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며 아름다운 욕들을 민주당에 퍼붓고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난 반공소년이었으니까. 사춘기때 공부를 멈추게 되는 것, 친구 잘못 만나면 한 방이다. 결코 어렵거나 운이 나빠서 그렇다고 볼 수만은 없다.

선진국이 투표율이 낮다는 주장을 언제부터 완전히 기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1997년에 의심이 시작되었고, 2002년에 완전히 기각하게 되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하지만 똑 같은 것을 보아온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이번 선거를 기화로 해서, 저런 어처구니 없는 자기합리화가 배척당하는 흐름이 생겨난 것 아닐까? 그래도 55%는 아직 높지는 않다. 어느 기사에서 읽었던 것처럼 “예전에는 정치에 무관심한 걸 쿨하다고 여겼는데, 요새 들어서는 개념없다 쪽으로 바뀐것 같아요.”라는 흐름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한국의 낮은 투표율에는 《먼나라 이웃나라》가 기여했을지 모른다. 2000년대 학생운동의 소멸 및 대학생문화 막장화의 배후에 《남자 셋, 여자 셋》이 서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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