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0일 화요일

자연적 억제, 예방적 억제

낙성경제연구소의 연구논문집인 《수량경제사로 본 조선후기》를 연초를 전후해 읽었다. 첫 논문은 조선후기의 인구변화 시계열적 분석한 것인데, 족보를 이용한 접근이라는 점에서 참신한 연구라고 했다. 족보를 통해서 추정되는 인구는 19세기 동안 증가하지 않거나 감소한다. 그 이후 논문를에서도 계속해서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19세기는 정체 내지는 퇴보의 시대였다.

인구의 자연적 억제와 예방적 억제라는 개념이 그 첫 논문의 마지막 부분에 제시되었다. 쉽게 말해 자연적 억제는 일단 낳고 난 다음에 살놈은 살고 디질놈은 디지게 놓아 두는 것이다. 식량 생산과 무역을 통해 부양할 수 있는 인구만 살아남을 수 있으므로, 생산성이 정체된 사회에서는 인구가 극한값에 수렴하게 된다. 조선 후기처럼. 예방적 억제는 인구를 미리 줄이는 것이다. 만혼화, 피임, 낙태, 영아살해 등이 이용된다. 그 논문은 조선 후기의 인구 억제는 자연적 억제에 머물렀고, 동시기 일본과 유럽에서는 예방적 억제가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고 했다. 내가 과민한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조선은 미개했다는 말을 하는 듯 한 뉘앙스가 느껴지는 것 같아 좀 불편했다.

그들이 용을 써서 창출한 신개념(무개념?) 정부는 역설적이게도 선진적 인구조절 기법인 예방적 억제를 불법화하기 시작했다. 그 극단적인 경우를 여기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Story.do?movieId=43763 에서 볼 수 있다. 그 영화를 아직 보지는 않았는데, 찾아서 봐야겠다.

묻는다. 종교적 신념에 도취해 남의 인생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는 성스로운 분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태어날 아기들의 인생에 무엇을 해 줄 수 있는가? 시설아동으로 커 간다면 운이 좋은 축에 들 그들에게. 그리고 산모에게도 평생 엄청난 짐을 지울 당신들. 그들이 어른이 되어 사회의 맨 바닥을 깔아 줄 때, 그들에게 대고 생명의 은인이라고 으스델 것인가? 불쾌한 인간들 같으니.

난데 없는 바른생활사나이들 때문에 공포와 불안 속에 있을 젊은 산모들과, 또 태어나 고통의 세상을 살아야 할 아이들이 너무너무 불쌍하다. 불쌍해 미치겠다. 왜 원인이 명확한 동정과 안타까움이 분노로 연결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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