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5일 일요일

마이웨이?

마이웨이를 봤다. 기대보다 실망스러웠다. 한편으로는 큰 기대를 했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영화를 보고 평가를 내리는 기준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실망스럽게 만든 요소 몇 가지와, 그래도 볼만했던 요소들을 나열해보았다.

경성에서 살고 있던 김준식은 달리기를 잘 한다. 그의 라이벌인 타츠오는 일본군 고관의 손자이다. 경성에서 있었던 마라톤 예선에서 있었던 부정심판으로 인한 소동에 김준식과 그의 친구들이 연루되고, 재판 끝에 이들은 관동군으로 징발된다. 이들은 만-소 국경에 위치한 부대에 투입된다. 한 편 (왠지 모르겠지만) 타츠오는 이 부대의 지휘관으로 새로 부임한다. 타츠오는 (왠지 모르겠지만) 무리한 도강작전을 계획했지만, 도리어 적의 기습을 허용하여, 부대는 소멸하고 생존자들은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벌목장 수용소로 끌려간다. 이들은 결국에는 동사로 끝날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졌지만, 독소전 개전으로 병력이 부족하게 된 소련 정부는 이들은 소련군으로 소집해 총알받이로 쓴다. 전향한 포로로 급조된 이 허술한 부대는, 모스크바 공방전의 와중에 데도프스크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증발하지만, 김준식과 타츠오는 그 지옥에서 또 다시 기적적으로 생존한다. 이들은 (왠지 모르겠지만) 독일 진영으로 탈출을 감행하고, 동방부대에 배속되어 노르망디 상륙전에 투입된다. 하지만 준식은 탈출 과정에서 사망한다.

영화에서 가장 크게 보이는 허점은 주인공의 캐릭터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김준식은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이데아의 현인신이지, 현실계의 인간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현실계에서의 김준식은 두 가지 상반되는 목표에서 갈등한다. (글을 쓰려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 두가지 갈등되는 목표가 나타났다. 관람하는 입장에서는 일관성 없는 행동들의 연속일 뿐.) 첫 번째는 살아서 돌아가서 달리기를 계속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 상대가 반드시 타츠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상황이 아니라면, 이 두 가지 목표는 별 무리 없이 달성될 수 있었겠지만, 전쟁의 한 가운데 떨어진 김준식에게는 두 목표 중 하나도 힘들거니와, 둘은 서로 모순되기까지 한다. 김준식이 짝사랑하는 타츠오는 경쟁 이런거 필요없고, 그냥 김준식이 사라지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김준식의 존재와 타츠오의 존재가 서로 모순되는 상황에 떨어졌고, 김준식은 갈등해야 한다. 그런데 그는 갈등 사이에고 고민하지도 않는다. 또한 사실은 갈등의 두 목표 또한 드러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김준식의 행동들은 생뚱맞다. 그는 그저 불사신으로 전장에 떨어졌을 뿐이다. 단지 노르망디에서 죽기 위해서.

김준식의 첫 번째 목표 “살자”, “달리기 위해, 살아남자”는, 명확하다. 누구나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전쟁의 비참함이 생으로 드러나면 날수록, 김준식의 목표설정은 더더욱 설득력을 가지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김준식의 두 번째 목표, “타츠오, 너 뿐이야”는, 이상하다. 김준식에게 타츠오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초반의 경성 장면에서 충분히 설명이 되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경성장면은, 김준식이 훌륭한 달리기 선수였지만, 식민지관리의 필요상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는 민족주의적 의식 고양을 위해 사용되었다. 김준식의 상대는 식민정부였지, 타츠오가 아니었다. 더하여 훌륭한 경쟁자의식은 두 상대가 정정당당하게 경쟁할 때 형성되는 것이다. 최소한의 신뢰관계가 전재가 되어야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타츠오는 경성에서도 별로 그러지 않았고, 만주에서는 더더욱 맛이 간 행태를 보인다. 오직 달리기 실력 하나가, 자신을 개죽음으로 몰아넣는 만주에서의 타츠오를, 훌륭한 라이벌로 인정해야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이것은 “그러니까”와 “그런데도”가 가지는 설득력의 차이이다.

주인공이 이렇게 망가졌으니, 스토리가 살아날 리가 없고, 영화는 내내 생뚱맞은 풍광을 보여주며 유라시아를 횡단한다.

이제는 영화를 보면서 눈에 거슬리던 부분들이다. 먼저 쉬라이. 단언하건데, 쉬라이는 없어도 되는 캐릭터였다. 제작비가 너무 많지 않아서, 중국시장까지 타겟으로 넣어야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쉬라이는 극의 나머지 부분과 아무런 유기적 연관성 없이 단지 삽입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죽음 역시 별로 아름답지는 않았다.

다음은 경성에서의 기자회견 장면이다. 1940년 동경 올림픽 육상 예선에서 조선인을 배제한다는 기자회견인데, 이것을 왜 동경이 아닌 경성에서 하는가?

경성 세트는 좋아보였다. 그런데 왜 펼침막들이 굴림체로 찍혀있는가. 매우 눈에 거슬렸다. 현수막 업체 고용할 필요 없이, 차라리 스테프가 그냥 붓으로 쓰는 편이 나을 뻔 했다. 비슷한 예는 둘 사이의 라이벌 관계를 암시하는 신문기사 스냅샷 들인데, 역시 당시의 신문과는 철자도 폰트도 어울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지리와 관련된 내용이다. 데도프스크에서 살아남은 김준식과 타츠오는 지극히 험한 산을 넘어 독일 진영으로 가는데, 모스크바에서 독일로 가는 길에는 아예 산맥이 없다. “이 산이 아닌 가벼”가 아니라 산이 나오면 안된다. 그래서 그들이 산에서 내려와서 처음 만난 그 마을이 무슨 마을인지는 자막설명 없이 넘어갔다. 아마도 준식과 타츠오가 고난 끝에 우정을 형성하는 개연성을 넣기 위해 어거지로 삽입된 것 같은데, 그런 설정은 만-소 국경충돌 이전에 나왔어야 했다. 김준식은 (왠지 모르겠지만) 부대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하다 부대로 귀환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노르망디에서의 베어마흐트. 여기서 김준식과 타츠오는 자나 깨나 오로지 탈영만을 꿈꾸고 있는 예비 탈영병이다. 거기까지 흘러 들어간 마당에, 부대나 군복에 무슨 애착이 더 있겠냐만은, 어쨌든 졸병인데, 윗선에 대한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마음껏 동료와 함께 독일어로 탈영을 이야기하고, 자리를 자유롭게 이탈하는 모습들이, 몰입에 방해될 정도로 심각하게 보였다.



단, 이 영화에서도 건질만한 부분이 있다. 포로수용소 장면이다. 까레이스키든 야폰스키든 어차피 로스께 눈에는 똑 같은 포로일 뿐, 마지막 노동력까지 쪽쪽 빨리다가 결국에는 연료가 되어 난방에 사용될 뿐인 절망적 상황이, 경성에서와는 다르게 설득력 있게 묘사되었다. 단, 이 부분에서의 주인공은 김준식이 아니라, 안똔이다. 김준식에서는 볼 수 없는 내면의 갈등이 처절하게 드러났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포로수용소에서 새로 태어난 인간은 안똔 뿐이 아니다. 타츠오가 자랑스러운 황군장교에서 붉은 군대의 군복을 입은 총알받이로 변신했고 (총은 데도프스크에서 지급된다), 삶이 별로 길게 남지 않은, 노몬한에서의 타츠오 똘마니는, 이제 그의 허물벗기를 빈정거린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인물은 김준식이다. 그는 노몬한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점호 전에 달리기를 한다. 죠낸 미치겠다.

전쟁장면도 좋았다. 고증이나 이런 부분은 잘 모르겠지만, 사방에 불타고, 다 뿌사지고. 폭탄 떨어지고 하는 부분은 그럴듯 했다. 단 주인공과 스토리가 워낙 쌩뚱맞아서 감정이입이 잘 되지는 않았다. 엄폐도 안하는 주인공들을 총포가 피해가는데, 무엇에 긴장할 부분이 있겠는가.

추신. 마지막에 제목을 적었다. 그러면서 보니, 제목도 삐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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