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15일 일요일

꿈의 택배편이 떠올랐다

2000년의 여름, 나는 신림동의 어느 고시원 쪽방에서 더위에 쩔어 있었다. 외지에서 난생 처음 격어 보는 지독한 외로움에 심신이 지쳐있었다. 만약 그 해 농활을 가지 않았더라면, 여름을 넘기지 못하고 나는 죽었을 것 같다.

나는 그 때 실재로 약간은 미쳐있었다. 건물 5층이었지만 비가 오기 전에는 꿉꿉한 하수구 냄새가 실내에 꽉 차 있었고, 어딘가 항상 불결한 느낌이었다. 기말고사를 앞둔 유월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방에 도착해 자려고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짜부작 짜부작 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리가 나는 구석을 들여다보니, 바퀴벌레 한 마리가 그 전날 방구석에 버려두었던 초코파이 봉지를 뒤지고 있었다. 봉지를 조심스레 눌러 바퀴벌레를 제거했지만, 잠시 후 이번에는 방향을 특정할 수 없게 방 안의 온 벽에서 끊임없이 아까의 그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내가 미친 것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미치지 않았음을 확인해야 했다. 소리의 근원을 특정하기 위해 한동안 방 안을 초조하게 뒤적였다. 소리의 근원을 확인해야 내가 미치지 않은 것이니까. 혹시 또 다른 바퀴벌레인가. 그리고 잠시 후 깨달았다. 그 소리는 때마침 창 밖에 내리기 시작하던 비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안도해 하며 끈적이는 불쾌함을 느끼며 잠이 들었었다. 수 년 뒤에 깨달았다. 상황이 조금 더 악화될 수 있었으며, 그럴 경우 많이 위험했을 거라는 것을.

그 때의 나를 지탱해준 건, 사회에 독립해서 첫 발을 내 디뎠다는 데서 느낀 헛된 뿌듯함이었다. 세상은 운 없게도 돈 없이 세상에 나온 18년産 남자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상경직후 복덕방에서 소개해 주었던 하숙집은 2달 반 만에 헐렸다. 복덕방에서 그에 대한 아무런 사전정보를 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5월 축제기간, 나는 당장 집을 찾지 않으면 길거리에 나 앉게 된다는 두려움에 서울 변두리의 복덕방들을 전전했었다. 1학년의 봄 축제는 내게는 남 일이었다. 싼 집은 좀처럼 찾아지지 않았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보이는 위생환경의 집들만이 내가 정한 원세의 상한 기준을 만족시켰다. 더 이상은 도저히 부모님께 부담드릴 수 없는 금액이었다. 관악구청 앞에서, 복덕방 주인을 따라 방을 보러 갔다가, 낙담하며 구청 앞 신호등을 건너 사방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건물들과 그 건물마다 수십 개씩 붙어 있는 까만 네모난 구멍들, 그 어디에도 내가 몸을 뉘일 곳이 없다는 절망감은 좀 많이 무거웠다. 그 때 어렵게 구했던 방이 빗소리가 바퀴벌레 소리로 들리던 바로 그 방이었다.

외로웠다. 억지로 관계를 맺는 듯 해 보이는 가식적인 대학생들의 만남이 스스러웠다. 난생 처음 만나는 선배들을 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힘들었고, 동기 수십 명에게 자신의 존재를 어필하기 위해서 하는 과장된 액션들이 보기 싫었다. 더군다나 그 오바질이란 것들은, 나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장기와 재주를 부리는 것들이었기에 나는 질투와 무력감을 함께 느꼈다. 저 인간들은 어떻게 저런 잡기와 성적을 함께 유지할 수 이었지? 그와 더불어 입학 전 모임에서 겨우 말을 텄던 몇몇은, 개학과 동시에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 종강한 것이다. 수업시간표가 남들과는 다소 달랐고, 컴퓨터가 없었다는 것도 상당한 이유였다. 나는 내부적·외부적 이유들로 인해서 효과적으로 고립되었다.



그 여름의 어느 날, 자우림의 앨범을 샀다. 그리고 한동안 하루 종일 그 곡들을 들었었다. 그 곡들은 내 기억에, 그 여름의 힘든 시기에 달린 태그와 같은 것들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꿈의 택배편”.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친해질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가 서너 달의 지독한 인내 끝에 무너졌지만, 그 때 난 아직도 스스로 먼저 다가 갈만큼 용기가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든다. 상처받기 싫어하는 것이 그리 비겁한 짓이었을까. 그 날, 그 자우림 3집 테이프를 사러 버스타고 15분이나 걸리는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 옆에 있는 음반가게에 갔었다. 그리고 올라오는 길에 우연히 과친구들 한 무리를 만나 식당에 함께 들어갔었다. 아직도 아주 뼈아프게 기억이 난다. 그 때 그 친구들이 미칠 듯이 부러웠었던 것이. 단지 그들은 외롭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풍족하고 여유로워 보였기 때문에.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은, 딱 거기까지만 기억이 난다.

하악, 감동도 재미도 없는 씁쓸했던 기억이다. 왜 이 노래가 기억이 났는지 모르겠다.



사실 처음에 쓰고 싶었던 것은, 외로움이 아니라 빈곤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실대로 말하면, 앞서 이야기했던 내가 외로웠던 이유들을 모두 뒤집어야 한다. 나는 빈곤했기 때문에 외로웠다. 하루 저녁, 만 원을 뿜빠이 해서 내야했던 동기들과의 술자리에 가는 것조차 죄책감이 들었던 이유, 부모님께 대학교 들어간 큰아들 컴퓨터 한 대 사 달라고 우길 수 없었던 이유, 그 고립되었던 시간 동안 외로움을 떨쳐 줄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그리고 내 부모님이 빈곤했기 때문이었다. 지나친 빈곤은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기에는 너무나도 아픈 상처이니까. 그 때 날 지탱해 준 것은 어떤 의미에서 뽕이었다. 넌 이제 성인이야, 네 앞가림은 네가 알아서 하는 거야라는 달콤한 속삭임. 세상은 그 헛된 용기들을 도둑질하지 않으면 굴러가지 않는 것 아닐까.

나는 그 때를 스스로의 인생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스스로 원하는 삶을 준비해 나가는 시간이라 여기며, 빈곤 속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만큼의 행복만을 추구하며, 아니 없는 행복을 자주 가공해 가며, 살아갔다. 하루는 밤늦게 과외를 하고 돌아와 피곤한 몸을 뉘였다. 문득 관악구청 앞에서 절망했던 5월 어느 날의 해질녘이 떠올라, 이제 누울 자리가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하며 보람 속에 잠이 들었다. 오늘 난, 그 잠자리가 떠올라 그 불쌍한 젊은이를 동정하며 눈물을 훔친다. 그 젊은이는, 나도 저 옷을 입어보고 싶어, 나도 새로 나온 저 핸드폰을 써 보고 싶어, 나도 저 음식점에서 다들 맛있다는 어떤 메뉘를 먹어보고 싶어, 그런 욕심들을 마음에서 하나씩 죽여 갔다. 행복은 물질적인 충족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속삭임들은 또한 얼마나 달콤한가. 이제는 내가 정말로 새 물건을 사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지, 아니면 어차피 못 살걸 알고 포기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어차피 죽었으니까 상관은 없다.

그런 생활은 단속적으로 반복되어, 2007년의 어느 날, 나는 그 때보다 해발고도 70m 높은 또 다른 방을 빌려 몸을 누이고 있었다. 2000년, 나 같이 극단의 빈곤 선 바로 위에 있었던 젊은이들은 완전히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아마 10%가 조금 되지 않았었던 것 같다. 지금은 상황이 개선되기는커녕, 더 악화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했다고 한다. 경향신문의 며칠 전 그 기사(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5112139085&code=940702)는, 그리고 거기 달린 현실감 있는 많은 의견들은 처절한 절규였다.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진짜 기사였다. 똥이 질질 나오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눈물이 흘렀다. 사실만을 기술한 기사가 이미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다는 것은, 사회가 이미 매우 극적인 상황이 되었다는 뜻이다. 극의 절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안하지만, 그 젊은이들의 부모들 중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최후에는 징벌을 받는 악역을 맡은 자들이다. 내가 말하는 그들은 내가 빈곤에 고통 받고 있는 동안 가장 열렬히 투기에 뛰어들었던 자들이다. 그 뿐만 아니다. 그들은 내가 인정하는, 특권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가치들을 형편없이 비웃었고, 자본이라는 신이 역사하시는 몰상식과, 법 위에 서 있는 힘의 전횡에 열광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그것을 위해서라면 (소수의, 동시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죽거나 고통 받는 것 따위에 대하여서는 조금도 고려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던 자들이다. 나 같은 대대로 돈 없는 것들이,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결혼과 출산의 축복을 포기한 채, 붙어있는 목숨에 감사해하며, 근근이라도 살아있는 것이, 대체 그들과 무슨 상관이었느냔 말이다. 나는 그들이 빚을 떠안고 몰락하기를 정화수 떠 놓고 빌고 앉아있지는 않아도, 그들의 비참한 몰락을 비웃으며 보아 줄 용의는 있다. 대체 그들이 투자에 실패하고 일가족이 비탄의 구렁텅이에 떨어져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꿈의 택배편”은 나에게 외로움뿐 만이 아니라, 외로움과 빈곤을 함께 떠올리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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