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3일 수요일

좋아하는 노래들의 발표시기분포와 잡설

세벌식 자판을 익힐 무렵, 노래 가사를 들으면서 따라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몇 곡을 시간 날 때 연습했다. 그러다가 목적이 변질되어 좋아하는 노래들 가사를 텍스트로 모아두게 되었다. 가사집에 들어가서 카피 페이스트 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들으면서 따라쳤다. 그렇게 모은 곡들이 시간이 흐르다 보니 142곡이나 되었다.

요 며칠동안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던 프로그래스 미팅이 끝나고, 가벼운 마음으로 집에 와서 가요들을 찾아 듣다가 문득 뻘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이 노래들의 발표시기의 분포를 도시해 보자.”

검색을 해서 곡 발표년도를 찾는 것이 간단하지만은 않았지만, 어쨌든 끝을 볼 수 있었다.

짜잔


ㅋㅋ, 아 x발, x축 제목이 이상하네.

이렇게 그리고 나니까 뻔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들었던 곡들이 남은 인생과 함께 가지 않겠는가.



1997년 봄은 맑은 날이 많았다.
그 해 토요일 시간표는 예술이었는데, 1교시 교육학, 2교시 기술, 3교시 음악/한문 격주, 4교시 체육. 이랬었다. 담임선생님이 체육선생님이라서 운동장에서 종례하고 끝. 아예 교복을 넣은 가방을 운동장 구석에 숨겨놓고, 축구 뛰고, 체육 끝나면 교실에 들르지 않고, 운동장에서 옷 갈아입고 바로 귀가하곤 했었다. 조용한 오전 수업시간에 들려오던 부산항의 뱃고동 소리가 아직도 기억나고, 그렇게 토요일에 귀가하면서 서면에 들러, 번화가를 기웃거리다가 동보서적에 가서 책들을 구경하다가 집에 오곤 했다. 그렇게 강렬한 기억을 남긴 주말들이 많아 봐야, 12번이었다니. 세번 이상이면 그냥 많다라고 느끼는 것이 인간인가보다.

야자를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이승환의 《가족》을 들으면 마음이 울컥했고, 넥스트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들으면서, 천사같은 첫사랑 그녀에게 고백을 거절당했을 뿐만 아니라, 심한 모욕을 받았던 기억들을 곱씹었다. 《뿌요뿌요》가 5월께 히트곡이었던가? 웃지못해 이 부분 따라하면서 키득거렸었다. 젝스키스가 데뷔해서 HOT와의 더비가 시작되기도 했었고, 가을에는 자우림 1집 (지금은 이선규가 부른 《예뻐》만 찾아 듣는다.), 임창정《결혼해줘》, 태사자 《타임》, 영턱스의 《타인》(이거 둘 꽤 흥했더랬다) 등이, 그리고 겨울에는 터보의 《회상》, 박지윤의 《하늘색 꿈》. ㅎㅎ 이거 여자랑 노래방 갈 일이 없었겠지만, 다들 랩은 꿰고 있었던 듯하다.

그냥 그 때는 그랬다. 꽃집 주인이 되는 것이 장래 희망이었던 친구들이 있었던... 딱 그 때까지. 그 해 봄에 DJDOC가 세상 좆같다고 《삐걱삐걱》을 목놓아 불러재꼈었는데, 그 해 겨울 IMF가 왔고, 에디아카라의 낙원은 끝났다. 마침 《거위의 꿈》이 발표된 해도 이 해네.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더 와닿았다. 아, 그리고 《삐걱삐걱》 이후로 사회비판 내용의 가요가 히트하는 것은 씨가 마른 것 같다. 내가 잘못알았나요?



이제는 저 그래프의 긴 꼬랑지처럼 열정과 감수성이 사그라들어간 들고, 뭔가 남긴 남았는데, 2009의 빈도수 3중에 하나를 《뽀삐뽀삐》로 채우게 하는 그 뭔가가 남았다. 젠장.

어쨌거나 나는 90년대 가요를 좋아한다. 다른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냥 내 감수성이 90년대에 거의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직업도 그런 감수성을 연마할 필요가 있는 직업군이 아니고, 감수성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는 것이 정치적·도덕적 당위가 아닌 이상, 나는 지금 상태로 만족한다. 비론 존나 촌스럽다는 지적을 자주 받곤 하지만. 뭐 따지고 보면 촌스러울 것도 없잖아. 리메이크 자주 되는데 뭐. 당연히 그래도 원곡을 찾아 듣지만.



아, 그리고 서면 동보가 폐점했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들었다. 부산은 왜 부산인가. 동보서적이 없고, 해운대에 솔밭이 없고, 영도다리가 철거된 부산은, 또 거제역이 박살나고 없는 부산은, 좀 많이 부산답지 않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렇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