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0월 14일 목요일

신뢰는 돈이나 힘으로 살 수 있는게 아닐텐데.

몇 달의 시간차를 두고 두 분이 좀 믿어 달라고 읍소를 했다.

먼저 분은 국방장관이고,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65324

나중 분은 “공인” 스텐포드 출신 힙합가수이다.

http://www.vop.co.kr/A00000322395.html

(구글에서 찾아보니까 가장 먼저 나오는 매체들이 각각 요 둘이었다.)



흥정을 하면서 물건을 사야 할 때, 뻔히 보이는 구라를 치는 상인에게서는 물건을 사지 않는다.
당연하다.

허풍이 세고 구라를 잘 까거나, 핑계나 구실이 늘 따라 붙는 친구는 자동적으로 乙種이나 丙種으로 분류된다.
당연하다.



내가 자라온 문화적 배경에서는, 가정과 학교·지역사회들을 포함해서, 남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으면, 남탓을 하기 전에, 자기 자신이 평소 믿을 만한 행실을 해 왔는지 되돌아 보라고 가르쳤다. 나는 이것이 특별한 경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국적과 계급을 막론하고, 이런 비슷한 인성 교육을 받을 것이라 생각한다.

걸걸한 목소리로 “나 이 사람, 믿어주세요” 라는 말을 남긴 노태우를 마지막으로, 믿음과 신뢰를 강요하는 세상은 지나갔다고 생각했는데, 저런 찌질하다 못해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믿으라고 협박을 하는 모습을 다시 보게 되어 매우 유감스럽다.



천안함 검증단의 발표 내용은 거의 모든 언론에 기사화되지 못했다. 타구라의 학력이 사실로 입증되었지만, 그의 나머지 미심쩍은 (그리고 결정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발언들마저 사실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타구라 사건을 통해 여론을 몰아가려는 냄새가 나는데, 아마도 정부의 “의견”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면, 그 의문이 아무리 합리적이라 하더라도,  “열등감에 쩐 사회부적응자들의 불만”으로 매도할 수 있는 기초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 전두환 때, 기자 생활을 시작해서 받아쓰기 기사질로 커리어를 시작한 기자들이 지금은 언론의 중추가 되었는데, 이들은 정부의 발표를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은 하나의 “의견”이 아니라, 공식적인 단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는 의견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사회에 불만있냐” ---요거는 걸작이다.

단계1. 첨예한 이성을 통한 비판적 사고의 결과가 정제된 언어로 표출된다.

단계2. “사회에 불만있냐?”

단계3.  비판을 제기한 사람의 인격이 사회부적응자로 매도된다.

여기서 멈추는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좀 더 이견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면 상대는 좀 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반응한다.

단계4 (옵션). “억울하면 출세하든가.”

한 번 더 가면 빨갱이 드립이 나온다. 세번째에서 빨갱이 드립이 나오는 것은 굉장히 효과적인데, 직접적으로는 더 이상의 반론을 봉쇄할 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나는 벌써 두 번이나 관용을 배풀었다는 “나는 관대하다” 효과도 누릴 수 있다. 이런 일이 두 세번 반복되면, 자기검열효과도 누릴 수 있다.

사회에 불만있냐, 억울하면 출세해라, 너 빨갱이냐, 넌 왜 그렇게 정치적이냐, 니 일이나 잘 하세요 따위의 상투는 “그 사회가 적응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회인가”에 대한 판단을 은폐하고, “그러면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가”라는 논의를 봉쇄한다. 더 나쁜 것은 제기된 문제의 원인을 (대체로 억울함을 당하고 있는) 개인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결론을 내자면 다음과 같다. 평소에 구라충만한 그런 새끼를 믿지 않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는 거다. 그런데 요새 보니 그걸 못하게 하겠다는 거다. “나는 평소 해왔던 대로 계속 구라칠테니, 너흰 그런 줄 믿어. 그렇지 않을 거면 혼나게 될테야.” 그런 협박에 익숙한 사람들이 아직 많이 살아있다. 생물학적 해결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의문의 제기를 막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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