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5일 월요일

다시 횡횡하는 지구온난화 구라설

북미에서나 횡횡한다고 여겨지던 지구온난화 구라설이 한국에 상륙한지 꽤 된 것 같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현혹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음모론은 꽤나 매력적인 설명이다. 그 설명이 간단하기 때문이다. 더하여 처음 들어보는 음모론은 듣는 이로 하여금 고급 정보를 우연히 얻었다는 생각이 들게 하고 우쭐하는 마음을 가지게 만든다. 그런 고로 어처구니 없는 음모론적 설명을 확고하게 믿게 되기도 한다.

얼마 전부터 《프레시안》이 지구온난화를 까는 데에 불을 뿜고 있다. 첫 기사의 제목은 “지구온난화 이론, '과학적 사기극'으로 전락하나”였다. 안타깝게도 몇 안되는 진보적 언론으로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었던 《프레시안》이 “음모론 찌라시로 전락하나”하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깜짝 놀라 이 기자의 다른 기사를 살펴보았으나, 이전에는 과학이나 지구온난화와 관련된 기사를 찾지 못했다. 그 이후 이어지는 몇 편의 기사들은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논란이 된 사태를 요약하자면, “IPCC의 4차 보고서에 있는 히말라야의 빙하가 2035년이면 모두 없어질 수 있다는 내용이, 출처의 신뢰성에 대한 충분한 검토를 거치지 않고 인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IPCC의 신뢰도가 추락했다.”정도가 되겠다. 나 역시 좀 실망했다.

소위 “기후 게이트”와 “빙하 게이트”로 인해서, 지구온난화에 대한 미국민의 신뢰가 낮아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북미의 대중들은 유럽과 비교했을 때 원래부터 지구온난화 대하여 무관심 내지는 무지했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책임을 가장 많이 져야할 집단이, 그들을 유리하게 만드는 논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연하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담론이 유럽에서는 주로 “그러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보다 더 촛점이 가 있었다면, 북미에서는 “그게 진짜냐”에 더 촛점이 가 있었다. 원래부터 교양이 상대적으로 모자라는 집단이라는 것이다.

오늘 올라온 기사에는 편파성과 자기기만이 극에 달했다. 몽턴이라는 사람의 발언을 인용하면서 기사를 전개하고 있는데, 친절하게도 그가 최고정책고문으로 있는 연구소의 웹사이트에는 "증명됨:기후 위기는 없다"는 타이틀을 내 걸고 있다고 한다. 와우, 마가릿 대처의 고문 출신이라는군요. 그의 웹사이트를 직접 찾아가보지는 않았다. 무려 대처여사의 고문이라는데.

이 기사 처음에는 지구온난화 이론 자체는 믿어주자라고 한다. 아레니우스가 황송해 해야겠다. 믿어주겠다니. 과학적 사실은 권위에 의해 증명되는게 아니라고 하면서도, 절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이 “이론”을 지지하므로 믿어준다는 것은 자기모순 아닌가? 일부의 기후변화 회의론자들만이 이를 부정한다(이 기사를 통틀어서 가장 진실에 가까운 명제이다)고 마무리를 해 놓고, 다음 문단에서는 시민들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것은 아무 상관도 없는 사실을 편한대로 가져다 붙이는 것에 불과하다. 정확히 이야기한다면, 그 일부 기후변화 회의론자들의 부실한 주장을 분수에 맞지 않게 크게 떠들어대는 일부 언론을 접하는 시민들이 “정말 그런가”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자기 실현적 예언이라고 한다. 기후변화를 믿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시민이 아니라 글을 쓴 기자이다.

이산화탄소가 온실기체이고, 대기 중에 증가한 이산화탄소는 기후변화를 일으킬 수 밖에 없다. 히말라야가 2035년까지 녹고 자시고에 달려있는 문제가 아니다. 절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이에 동의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제외한) 절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이 명제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참인 명제이기 때문이다. 별로 어려운 사실도 아니다. 고등학교 때 다 배우는 것들이다. 대기중의 이산화탄소가 증가하고 있음은 이미 한 세기 전부터 관측을 통해 기록되어왔고, 그와는 별도로 동위원소분석을 통해 이것이 인간이 뿜어낸 탄소라는 것도 증명되었다.

지구 대기가 지금보다 더 많은 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기후에 미치는 영향은 무시할 만해서,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지금까지와 같은 평온한 기후를 만끽할 수 있다고 여기고 싶어할 수도 있다. 물론 이 결론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반대되는 수많은 과학적 사실을 무시해야 할 것이다. 아무렴 어떤가. 과학적이라는 것들을 잘 보라. 광우병파동, 원전부지의 활성단층, 일기예보. 과학·과학하지만 확률 이상으로 정확한것이 어디있던가. 이렇게 얼마든지 스스로를 편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과학적 사실이라는 것은 불확실성이 내재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물리적인 것들이다. 대기중에 이산화탄소가 많아지면 온실효과가 강해진다는 것은, 사람을 건물 옥상에서 떨어뜨리면 중력가속도 만큼 가속을 받으면서 땅에 떨어진다는것 만큼이나 논란의 여지가 없는 “과학적”사실이다. 정치적 주장을 위해 가져다 붙이는 수사적인 의미의 “과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IPCC보고서의 오류와 관련되 최근의 보도(기체분자은 전자기파를 흡수한다)들이 가만히 보니까 점술인의 예언(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이나, 예전의 아하에너지 사건(에너지는 보존된다)과 같은 일이라 가만히 있기에는 좀 곤란했다. 그리고 BBC에서 나왔다는 그 이상한 다큐먼터리, Climate Swindle의 캡춰판을 본 사람들이 있다면, 그 다큐에 나온 내용들이 심각한 왜곡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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