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8일 일요일

거제역

도시에는 사람의 기억이 밀도있게 스며들어 있다.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는 그냥 낯설고 편하지 않은 곳이 되어버리나보다.

어느덧 10년이 넘게 타향살이를 하고 있다. 지난 연말, 오랜만에 옛 살던 동네를 들러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넘어지고 뛰어놀던 골목, 국민학교, 중학교 등교길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사라진 거제역과 마주했다.

동해남부선의 복선전철화는 이미 1990년대에 결정된 사항이었으나, 매우 천천히 진척되었고, 이제야 그 공사구간이 부전-거제 사이에 다다른 것이다. 도심을 가로지르는 철도망은 매우 유용한 인프라인데 이를 적절히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었다. 나 역시 동해남부선의 복선전철화를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중의 하나이고 하나였다. 그러나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복선전철화가 되면 거제역은 무사할까하는 것이었다.

내가 거제역 과선교에 다시 올랐던 2009년 12월 31일 오전에, 거제역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거제역의 아담한 역사(驛舍)와 쇠 녹이 묻은 시멘트의 낡은 승강장이 있던 자리는 완전히 파헤쳐져 있었다. 아마 장래의 고상 플랫폼의 기반이 될 기둥들이 땅에 가지런히 박혀있을 뿐이었다. 혹시나 옮겨져 보존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동래 방향을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부전 방향 저 멀리 보존되고 있지는 않을까. 역시나 헛된 기대였을 뿐이었다.

거제역은 도심에 있지만, 역을 둘러싼 담장 안으로 들어가면 어디 시골역 같은 분위기가 나는 역이었다. 한적한 철길, 딱 시골 간이역만한 역사. 거기서 통근형 열차를 타고 해운대를 가기도 했었고, 또 놀다가 그걸 타고 집으로 오기도 했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는 걸어서 역까지 걸어 가서 기차표를 예매하기도 했다. 봉사활동 확인서를 끊기 위해서 반 친구들이랑 우루루 몰려가서 역 근처에 있던 쓰래기들을 줍기도 했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오후 과선교를 건너면서 거제역을 본 것도, 그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작은 시골역 같은 역에 내가 정이 들게 된 이유일 것이다.

이후 알게 된 사실은 거제역이 나름 좀 특별한 역이라는 것이었다. 플랫폼 위에 역사가 있는 그런 구조는 원래도 드물었고, 이제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그리고 역사 자체의 구조 또한 일제 말기의 역 형태로 이제는 일본에도 별로 남아있지 않은 형태이고, 물론 남한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나는 그런 역이 많을 줄 알았다. 거제역이 그렇게 가까이 있었으니까. 어쨌든 거제역은 타지에서 알게된 친구들에게 내가 자라왔던 동네를 구경시킬 때, 빠지지 않는 관광코스였다.

수 년 안에 새로운 거제역이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된다. 수도권에서 볼 수 있는 광역전철역과 비슷한 역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 내가 아는 거제역에 비하면 무척 클 것이고, 그 전에 비하여 훨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 다시 찾아간 그 곳에서 나는 이방인의 느낌을 받을 것이다. 과외를 소개받고, 처음으로 가 보는 어떤 역에 내렸을 때와 비슷한 느낌말이다. 그리고 좀 서운할 것 같다.

사실 그 건물이 그대로 역사 역할을 수행해 주기 바라는 것은 얼토당토 않은 생각이다. 그 역사를 하루에 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이용할 수는 없는 일이다. 아마 인파에 역사가 무너져내리리라. 하지만 옛 건물이 드문 우리나라에 운 좋게 반 세기 넘게 버텨왔던, 나름 유서 깊은 건물이, 또 다시 하루아침에 아마도 포크레인의 삽날에 무너져 내렸을 장면을 상상하니 씁씁하다. 많이 씁쓸하다. 과거의 거제역이 그러했듯이 플랫폼 위의 대합실은 어디에 보존해 놓았다가 나중에 그대로 고상홈 위에 옮겨서 쓸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에 섬식 승강장으로 계획되었다면.

지금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이미 고향을 떠나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 거제역 보존을 외치며 복선전철화에 태클을 건다면, 그처럼 고약한 훼방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가 보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을 보존하면서 나이테 처럼 켜켜히 세월을 보전해 간다면, 그래서 유럽에서 볼 수 있는 도시들처럼 특색으로 가득찬 도시가 된다면, 결국은 모두에게 좋을 일이 되지 않을까. 비극은 개발과 변화를 추동하는 원동력이, 지금 한국에서는 견제받지 않는 자본이라는 먼치킨이라는 점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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