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4월 24일 수요일

관료의 질

지난 주말 산행을 했다. 동행했던 분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임진왜란 이야기가 나왔다. 임진왜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의견이 있는데, 곧 그 때 조선이라는 왕조가 망했어야 했다는 論이다.

특히나 전쟁 도중에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의 최고 권력자였던 선조가 보여준 비열한 행태들, 전후 퇴행으로 치달았던 조선의 지배층들, 그리고 정체되었던 지배층이 초래했던 19세기과 20세기의 끔찍한 결과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된다면, 조선이 그 때 망해서, 그래서 다른 역사가 시작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이 절로 솟아 오른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하지만 몇 개의 평행 우주가 16세기 말에 분기되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평행우주가, 조선이 가질 수 있는 최악의 경우였을지 생각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이런 경우는 어떨까? 정유재란 때, 남해안에서 농성을 하던 왜군의 일부가 현지화에 성공해서, 17세기를 맞이하지 못한 조선왕조를 대체한 한반도의 지배자는 왜군과의 연합을 해야만 했을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그들이 수 세기동안 점유상태를 유지했을 수도 있다. 왜군은 물러나고 조선은 망한다는 가정은 지나치게 순진하지 않나? 조선이 망했는데 왜군이 왜 물러나지?

유튜브에서 찾아 본 한명기 교수의 임진왜란 강의 (네 시간짜리 강의였는데, 매우 재미있었다)  마지막 편 질의 응답 시간에도, 비슷한 류의 질문이 나왔는데, 그 때 한명기 교수의 대답이 흥미로웠다. 아직 조선은 망할 때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 하면 떠오르는 인물들을 대충 적어보자. 한석봉, 정철, 유성룡, 이순신, 조광조 정도가 개인적으로 떠오르는데, 조광조 말고는 다들 선조 때 사람들이다. 관료의 선발체계는 건전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을 단편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 의병들 쪽을 보자. 의병장들은 대체로 지역의 儒頭였다. 지방 행정을 담당하거나 조력했던 사람들은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의병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의 관료와 관료체제는 전면전을 수행하는 데에는 부적합했을지 모르겠으나, 비상시를 어쨌든 관리하고, 인력과 물자를 동원했던 측면에서 보자면 “아직 망할만큼 무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승병의 활약을 잊어서는 안된다.

당시 일본의 경우를 살펴보자. 일본은 당시 한 세기 반이 넘도록 이어진 격렬한 내전을 마무리하던 시기였다. 개전 당시 일본의 지배자는 豊臣 秀吉였으나, 아직 완전히 국내를 장악한 것은 아니었고, 단지 힘으로 힘겹게 누르고 있는 상태일 뿐이었다. 유력 다이묘(그러니까 현대식으로는 군벌)들은 독립적이었다. 豊臣의 카리스마가 사라지고 나자 억지로 출혈을 감수하고 있었던 다이묘들은 원정을 계속할 이유가 사라졌고, 전쟁을 종식되었다.

일단 최고 권력자의 망상 하나로 대규모 원정이 결정되고 실행될 수 있을 만큼, 내부의 의사 결정 시스템은 허술했다. 또 豊臣가 그 권력을 사후에 물려주지 못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 관료, 혹은 이들은 군사집단이니까 막료집단이 갖추어 진 것도 아니었고, 있었다 해도 유능하지 못했다. 결국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豊臣 집단의 집권은 끝나고, 德川네가 일본열도에서의 최고권력을 쥐게 된다. 이들의 행동 양태는 조폭 집단의 이합집산, 그리고 그 내부에서의 의사 결정을 연상시킨다.



국토가 초토화된 임진왜란 시기의 관료가 나름 유능했다고? 아직 감이 잘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분들을 위해서 조선이 맞이한 두 번째 위기 국면을 살펴보자. 고종의 신하들은 초기에는 민씨네 사람이었는데, 나중에 가면 고종은 그야 말로 온갖 잡놈들에게 고관 대작자리를 마구 던져준다. 고종과 민씨 커플은 조선 말기 전국적 매관매직 피라미드의 최상위 포식자였다.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뇌물을 가져다 바칠 능력이 우선이지, 조정의 안위 따위는 아예 눈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대신의 능력이 무슨 상관이 있으랴, 잘 빨아 많이 받치는 놈이 장땡인 것이다. 아오, 여기에 대하여서는 매천야록 등에서 읽은 게 좀 있는데, 인상만 남아서 가져다 쓸 만한 사실들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하튼 관료의 질 측면에서 보았을 때, 고종의 조선은 이미 “망하지 않으면 이상한” 상태였다. 고종의 유능한 신하가 누가 있었는가? 아마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한국 관료집단의 선구집단은 조선총독부 2류 관리들의 시다바리였다. 조선총독부에는 일본 내지에서 관료를 할 수 있을 만큼 유능하지는 못한 관리들이 파견되었는데, 조선인은 그 자리 마저도 차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료들은 50년대의 혼란에서 볼 수 있듯이 거의 어떠한 능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새로운 교육을 받은 신진 인재들이 관료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60년대부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실질적인 운행이 시작되었다.

2008년 이후 대한민국의 관료집단에서 볼 수 있는 특징적인 변화는 쓰레기의 약진이다.  그들은 공적 의무를 행하는 대신, 공적 자산을 자본으로 바꾸어 사유화하는 데 몰두한다. 공기업을 민영화 해서 임원 자리를 내정받는다든지, 전관예우 같은 것들을 초라한 예로 들 수 있겠다. 이전에도 이런 행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2008년 이후에는 정부가 이런 행위를 독려하는 느낌이다. 이런 사유화를 소위 공직자의“능력”이라고 표현하지 않는가?

유교는 그 문제제기의 핵심이 관료 계층의 부패를 방지하고, 효율을 유지시키기 위한 고민에 있다. 그것은 법가도 마찬가지이다. 이 둘은 사실상 전통 동양 사회를 조직하고 떠바쳐 온 두 축이 되어왔다. 한편 서양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수 세기 전에 발견하고 가꾸어왔다. 민주주의는 감시·견제와 균형을 통해 관료의 비행을 예방한다. 자본과의 결탁을 통해 지대를 추구하려는 관료들의 욕구는가, 시민들의 감시와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는 인사권을 통해 좌절되는 구조이다. 국회가 관료들에 대한 탄핵소추권과 파면권을 쥐고 있는 이유이다.

지난 몇 달간 계속된 인사파동을 보면서, 관료의 질이 그래서 나의 장래가 걱정되는 이유이다. 또한 관료의 실패가 구조적으로 장려되는 시스템이 지난 대선을 통해 추인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다. 감시라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상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관료의 실패가 豊臣의 경우에서 처럼 집권세력의 교체만을 초래해서 더 큰 문제를 초래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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