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5월 15일 화요일

벌과의 짧은 조우

며칠 전의 일이다. 퇴근하고 방에 들어와 보니 왠 벌 한 마리가 방 안을 맴돌고 있었다. 벌이란 위험한 존재이지 않는가. 나는 얼른 발코니 문을 열고 벌을 밖으로 유인하려 했다.

아, 그런데 이 벌이 한참 전부터 의자 위에 걸쳐놓았던 잠바 위에 앉더니, 접힌 후드 모자 주름 안으로 뽈뽈 기어 들어가는게 아닌가. 아, 이걸 어쩐다... 잠시 고민하다가 벌을 꺼내기 위해 후드 모자를 훽 제꼈다.

그런데 오 이럴 수가. 벌이 걸쳐 놓았던 잠바 주름 안에 둥지를 만들고 있었다. 허.. 그냥 지가 사는 둥지가 아니라, 새끼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주름 양쪽의 천을 벽을 삼고, 그 사이에 손가락 마디만한 둥지가 있었다. 그 둥지의 격벽은 흙을 물어 와 만들었고, 거의 완성되어 가는 그 벽 안 공간은 꽃가루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쌀알 만한 알이 하나 있었다. 꽃가루는 애벌래가 부화하면 먹을 양식인가보다.

벌은 이미 열어 놓았던 발코니 문을 통해서 밖으로 나갔고, 나는 잽싸게 문을 닫았다. 벌이 들어오려고 애쓰는지, 탁 탁 하면서 문 유리에 뭔가 부딧히는 소리가 한동안 들렸다. 이미 옷의 모양이 무너졌기 때문에 벌 둥지 격벽은 개방되었으나, 아직 완전히 박살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직 잠바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잠바를 그대로 밖에 놓아두었다. 혹시 그 벌이 미련을 가진다면 밖에서라도 둥지를 완성을 하기 바랐다. 그 때까지는 저녁해가 좀 남아있었다.

다음날 아침, 그 부숴진 벌 집은 밖에 내 놓을 때의 상태 그대로였다. 벌은 둥지를 포기했는가보다. 자손을 위해 모든 자원을 투입해 만들었을 둥지가 실패로 끝났으니, 어쩌면 그 벌은 탈진해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벌 둥지를 방 안에 두고 살 수는 없지 않는가.



오늘은 오후 늦게 갑자기 비가 쏟아질 것 같아서 조금 일찍 들어왔다. 오늘도 웬 벌 한마리가 블라인드 위에 앉아 있었다. 아 진짜 이것들이... 이번에도 밖으로 유인해 날려버리려고 창문을 열고 옆에서 도발을 했는데, 이상하게 이 놈은 날아오르지 않았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살펴 보니, 아마 기력이 다 쇠한 듯 했다. 광고지를 주워 그 위로 벌을 살살 옮긴 후에 조심스럽게 창 밖에 내 놓았는데, 잠시 뒤에 보니 어딘가 다시 구석으로 느릿느릿 기어 들어갔다. 녀석은 아마 거기서 짧았을 생을 마감하겠지.

며칠 전에, 둥지를 만들던 바로 그 벌이었을까? 그 놈은 내가 둥지를 본의 아니게 부숴버리면서 완전히 인생이 꼬였을 것이고, 오늘 본 이 놈은 곧 죽을 놈이다. 괜히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자기 전에 술을 좀 마셔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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