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14일 일요일

덴마

나는 《아기공룡 둘리》의 팬이다. 둘리를 매우매우 좋아했고, 또 좋아한다. 특히 보물섬에서 단행본으로 나온 둘리 7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친구 빌려줬다가 하나 밖에 못 돌려받았다. 어쨌든 지금도 언론에 김수정 화백의 인터뷰가 실리면 꼭 찾아 읽곤 한다.

그 중 기억에 나는 인터뷰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주인공이 왜 공룡, 외계인, 조류 이런 거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당시 군부독재시절 검열이 심했다. 어린이나 청소년이 어른에게 반말을 하거나 불손하게 구는 행동은 만화로도 불가능했기 때문에 검열을 피하기 위해 이런 놈들이 주인공이 된 것이다.

지금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내가 국민학교 다니던 시절은 실재로 그러했다. 어린이날이면 YWCA 아줌마들이 시내 모처에 모여서 만화책 화형식을 하곤 했었다. 그리고 김수정 화백의 만화는 화형식의 단골 손님이었다. 처참한 풍경이다.

털이 나기 시작하면서 나의 만화적 관심은 명랑만화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때 쯤에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만화가 있었으니, 양영순의 《누들누드》였다. 허.. 소지품 검사를 피해 학교로 반입된 누들누드는, 이 손 저 손을 거치다가, 집에 돌아갈 때 쯤에는 너덜너덜해져있기 일쑤였다. 나는 이 책을 직접 사지는 못하는 소심한 학생에 불과했고, 다른 친구들의 용기과 자비에 의존하여 학교에서 누들누드를 읽었다. 어쨌든 만화가 양영순은 나에게 그렇게 각인되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양영순은 레벨업을 거듭했다. 《아색기가》를 보고 정말 숨이 막혀 죽을만큼 웃어 봤고 (진주야! 편을 보면서 그러했다. 정확히 두 명이 죽을 뻔 했다), 《1001》을 보면서, “아, 이 작가가 야시꾸리한 것만 그리는 작가가 아니라 이런 수준 높은 극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생각했다. 그 후에 뭐 《3반2조》, 《난의 공식》, 그 외 그닥 끌리지 않는 것도 없진 않았지만, 그건 취향의 문제였다. 《란의 공식》에서 “이 사람도 이 시대를 함께 사는 사람이구나”하는 것을 드디어 약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하늘에서 악마가 강림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생각과는 달리 네이버에서 연재되었다. 그리고 충분히 잘 연출된 극 중 긴장감과는 별도로, 이거 연재 무사히 끝났 수 있을까하는 현실과의 긴장을 시작한지 얼마 안된 때부터 독자들에게 주었다. 역시나 연재는 중간에서 잘렸다. “이거는 단지 고대 그리스의 영웅담일 뿐인데요”라는 변명은, 그것이 현실 정치의 풍자라는 누군가의 심증을 엎어버리기에는 부족했는가보다. 하긴 사람 사는 일이 어디나 다 똑같지 않겠는가. 연재중단을 알리는 게시글에, 표현의 자유가 왜 튀어나왔겠는가.

노련한 작가는 시대의 모순이 어디에 있는가를 발견하는 법이다. 할 말을 못하게 한다면, 좀 더 꼬아서 해야하지 않겠는가. 《덴마》는 이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외계인 별종(퀑)의 이야기이다. 검열을 피해 인간이 아닌 것을 주인공으로 가져와야 하는 비극이 세대를 초월해 또 다시 되풀이되는가 하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덴마 역시 현실의 좆같음을 비추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정치의 영역을 관찰했다면, 《덴마》는 경제의 영역, 그 중에서도 (몇 푼 안되는) 자본을 통해 인간을 통제하는 방법에 더 중점을 두어 관찰한다는 차이가 있겠는데, 사실 근본적으로 그 두가지의 차이는 없다. 그리고 《덴마》에서 볼 수 있는 인신종속화의 방법이 기상천외하다거나, 지금의 기술을 한참 뛰어넘는 하이퍼테크놀로지가 실현되어야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익숙하다. 만약 《덴마》가 연재 중단을 당하지 않는다면, 《플루타르크스 영웅전》을 중단시켰던 자들이 (있다면) 바보라서 그런 것이고, 중단을 당한다면, 그들이 (있다면) 역시나 개새끼들이라서 그런 것이다.

蛇足
오늘 드디어 《덴마》에서 희망고문이 등장했다. 아, 물론 이미 이브라헬 편에서 잘 나타났지만, 이번회에 희망이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등장했다.

많은 이들이 희망의 정치를 이야기한다. 나는 그것을 영화 《전우치》에서 보았다. 화담이 초랭이에게 사람되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하자, 초랭이는 거기에 넘어간다. 희망의 정치는 기만의 정치이다.

결국 희망이 정치를 통해 주어진다는 것은 그게 하나든 과두든 메시아의 강림이고, 종교적 주술이다. 그 둘이 잘 결합함을 그리고 그 어리석음이 초래하는 파국을 지금 목도하고 있지 않는가?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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