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26일 토요일

Tandem-X 첫 사진

독일의 X-band 레이더 지구관측 위성 Tandem-X가 발사된 지 3일이 채 지나지 않아, 첫번째 영상을 지상에 송신했다. 놀랍다.

http://www.dlr.de/DesktopDefault.aspx/tabid-1/117_read-25278/

Tandem-X의 주요한 임무 중의 하나는 전 지구에 대한 고해상도 표고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현재는 미국이 SRTM을 통해 만들어진 수치표고자료가 사용 가능하다. 그러나 미국을 제외한 지역에서는 해상도가 90m에 불과하고, 기본적으로 우주왕복선을 이용했기 때문에 궤도의 제한이 있어서 북위 60도 이북, 남위 54도 이남의 지역에 대하여서는 자료를 얻지 못했다. 극지의 빙하를 연구하는 데에 현실적으로 큰 장애물로 다가오는 부분이다. 어쨌든 NASA느님께서는 이 자료를 공짜로 배포하고 계신다.

Tandem-X는 이미 운용중인 TerraSAR-X와 함께 합성개구레이더간섭기법을 이용하여 전 지구적으로 10m 해상도 수준의 수치표고자료를 만드는 것을 목표중의 하나로 하고 있다. 그 외에도 편대비행을 이용하여 다양한 과학·민간 응용기법들을 시험할 것이다. 누추한 예를 들자면, 고속도로를 달리는 개별 차량의 속도를 측정할 수 있다.

링크에 걸려있는 마가다스카르 섬의 레이더 영상에는 해파가 항만에서 회절하고 굴절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 위쪽. 그리고 바다 표면의 무늬로부터 바람이 동남쪽에서 북서쪽으로 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광학영상에 비하면, 직관성도 떨어지고, 좀 많이 구리게 보일 수도 있는데, 밤에도 똑같은 영상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도 조만간 X-band 레이더 지구관측 위성을 발사한다. Kompsat-5이다. 광범위한 활용을 기대해 본다.

2010년 6월 24일 목요일

이변

이탈리아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Cheer up.

답장이 왔다.

The good players played ten minutes and scored three goals! Ahh.. See you tomorrow

1.
이변이라 하는 것들이 가끔 벌어진다. 그 때, 그것을 목도할 수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 놀라운 일들 말이다. 가끔은 기적이라고도 한다. 이탈리아나 프랑스가 16강에 못 오른 것 정도가 그런 일이 되지는 않을테다. 한국이 4강에 오르는 정도는 되어야지.

사람이 요즘은 평균 80까지 산다고 한다. 그 중에 그런 이변이나 기적을 피부로 느끼고, 그것이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시기는 그보다 더 짧을 것이다. 내가 유치원에 있을 때, 전두환이 항복선언을 했다고 한다.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또한 내 삶에 변화를 가져오지도 않았다. 10년 후의 IMF는 좀 달랐다. 그 일을 경계로 가세는 기울었고, 정치적 성향이 바뀌었고, 꽃집 주인은 친구들의 장래희망 목록에서 사라졌다. 5년 후에, 나는 이변들 일어나는 곳에 있었고, 그 이변들의 의미들을 상당히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 이변들이 앞으로의 내 삶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것 역시 머리에 앞서 피부가 느끼고 있었다. 다시 5년 후에도.

앞으로 한 2·30년일까. 이변이나 기적 혹은 격변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을 시간이. 그 후에는, 어찌되든 상관 없는 삶을 살게 되지 않나? 그 나이가 되면, 이변을 받아들이는 호들갑은 주책이 되고, 흐름을 조절하려는 뻔한 시도는 노욕이 되는 것 같다. 꽤나 노련하지 않으면 말이다.

유튜브에서 찾아 본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에는 적절한 나레이션이 있다.
일정부분 포기하고, 일정부분 인정하고 그러면서 지내다 보면 나이에 “ㄴ”자 붙습니다. 서른이지요. 그때 즈음 되면 스스로의 한계도 인정하게 되고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도 그렇게 재미있거나 신기하거나 그러지도 못합니다. 뭐 그런 답답함이나 재미없음이나 그런 것들이 그 즈음에 그 나이 즈음에 저 뿐만이 아니라 또 그 후배 뿐만이 아니라 다들 친구들도 그렇고 비슷한 느낌들을 가지고 있더군요.

노래 찾아 듣다가 괜히 센티해져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다.


2.
문자를 보낸 그 친구와 얼마 전에 이야기를 하다가 2002년 월드컵 이야기가 나왔다. 밀라노 출신으로, 나폴리 출신에 비해 보면 천양지차로 젊잖은 그 친구도, 심판 이야기를 하더라. ㅎㅎ 그 심판 존나 유명해졌다고. 대놓고 말은 못해서 그렇지, 승부조작이 있덨다고 확신하는 눈치였다. 2002년 여름이라면 믿지 않았겠지만, 이제는 혹시 호로 몽이라면 어쩌면, ...  차마 누가 될 것 같아서, 그 심판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발설하지는 않았다.



실의에 빠져있을 그 친구에게 답문자를 보냈다.

I agree. See you.

2010년 6월 14일 월요일

매, 먹이를 가지고 둥지로 돌아오다.

일본의 소행성 샘플리턴미션이었던 하야부사(隼, はやぶさ)가 지구로 귀환했다. 하야부사는 매라는 뜻이다. JAXA는 하야부사의 샘플캡슐이 한국·일본 시간으로 6월 13일 저녁 7시 51분 분리되었으며 밤 10시 51분 대기권으로 재진입했다고 밝혔다. 하야부사는 2003년 5월 9일 M-V로켓에 실려 발사되었다. 하야부사는 소행성 이토카와에 착륙하여 표면의 샘플을 채취해 지구로 귀환하는 목적으로 제작·발사되었으며, 7년여에 걸친 여행 끝에 임무를 완수했다. 하야부사의 샘플캡슐은 계획되었던대로 호주의 우메라에 떨어졌다. 우메라는 아들레이드에서 500km 북쪽에 있는 사막지대이다. 헬리콥터가 동원되어 농구공 크기, 20kg 무게의 캡슐을 수색했는데, 첫번째 헬기에는 그 지역 원주민이 탑승하여 캡슐이 성지를 훼손하지 않았는지 확인하였다. 캡슐은 나 여기있소 하는 신호를 발생시켰다.

캡슐의 최종 돌입시 속도는 초속 12km에 달하며, 이 때 대기와의 마찰로 인하여 생기는 열을 차단하기 위해 캡슐은 하나의 냉장고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낙하 예상지점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이어야 한다. 마지막에는 낙하산이 펼쳐져 착지시의 충격을 줄이게 된다.

과학자들은 소행성에 태양계 형성 시기의 물질이 보존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지구나 달과 같은 큰 행성·위성에서는 그 물질들이 화성 작용을 받으면서 화학적으로 분화되고, 뒤섞여 버렸기 때문에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 광학관측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그 성분을 조사할 수는 있고, 운석을 통해서 성분을 조사할수도 있지만, 역시 간접적이라는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은 직접 가서 가져오는 것이다. 하야부사의 샘플은, 태양계 초기의 물질이 어떤 것이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줄 것으로 예상된다. 캡슐은 일본에서 열리게 된다.

하야부사는 5년 전인 2005년 9월 중순 이토카와에 도착해 선회하면서 소행성 전체에 대한 탐사를 하였고, 11월에는 이토카와에 착륙해 샘플을 채취했다. 하야부사가 이토카와의 표면에 머문 시간은 45분 가량에 불과했다. 그리고 즉시 지구로의 귀환 일정을 시작했다. 귀환일정에는 여러 문제점들이 생겨 원래 3년으로 예정되었던 일정이 5년 반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하야부사의 귀환 역시 쉽지 않았다. 이온 엔진에서는 연료의 누출이 있었고, 한동안 지구와의 교신이 끊어지기도 했다. 또한 탐사선의 자세를 제어하는 자이로 3개 중에 2개가 고장나기도 했다.

이토카와는 폭 250m, 길이 500m에 불과한 땅콩 모양의 소행성이다. 궤도장반경은 1억 9800만 km이고, 주기는 556.4일이다. 궤도 이심률은 0.28로 큰편이고, 근일점은 지구궤도 안, 원일점은 화성궤도 바깥에 위치한다. 이토카와라는 이름은 원래부터 붙어있었던 것은 아니고, 일본이 하야부사 임무의 목적지를 이 소행성으로 정하면서 붙여진 것이다. 일본의 로켓 과학자 糸川英夫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이토카와의 중력이 작기 때문에 샘플을 채취하는데는 충돌을 이용하는 방법이 계획되었다. 매우 낮은 고도로 선회하면서 작은 물체를 표면에 쏘고 그 충격으로 튀어 나오는 것들을 채집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실재로는 탐사선이 표면에 착륙을 해버렸다! 계획대로는 아니지만 어쨌든 샘플캡슐이 닫혔기 때문에, 캡슐 안에 이토카와의 물질이 있을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진짜인지는 뚜껑을 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또한 계획되었던 착륙로봇인 미네르바가 투하 이후 사라진 것도 이토카와의 중력이 매우 약하기 때문이었다. 우주로 날아간 듯하다.

하야부사의 샘플회수 여부에 관계없이 JAXA는 후속임무를 출범시킨다. 하야부사-2로 명명된 이 임무는 내년 11월에 발사될 예정이다. 사실 하야부사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마이크로웨이브 추진 이온엔진 우주선이었고, 그 점에서는 이미 성공했다. 하야부사-2는 소행성 1999JU3을 목표로 할 것이다. 또한 하야부사-2에도 미네르바 같은 착륙로봇이 실려 가게 될 것이다.

JAXA는 캡슐에서 유기물이 발견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근년들어 유기물의 기원이 우주공간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 소행성 이토카와에서 유기물이 발견된다면, 이것은 빼도박도 못할 증거가 될 수 있다. 우주에 정말 우리 혼자인가 하는 오래된 질문에 대한, 긍정이든 부정이든, 그 대답의 불확실성을 줄일 것이다. 또한 실재로 유기물이 발견된다면, 그 유기물을 지구의 생명과 연관시키는 연구, 그리고 그 유기물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또 다시 필요할 것이다. 항성이 폭발하고 난 희박한 성간물질에서 유기물이 합성되는 과정 말이다.

소행성의 화학. 정말 궁금하다. 지구와 어떻게 다를지. 그리고 그것이 지구나 다른 지구형 행성 또는 위성의 진화를 어떻게 설명할지 말이다.



출처
관심있는 사항이기도 하고, 이상하게 국내 포털에는 없는 것같아,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가며 정리했다. 개요는 die Zeit의 기사 http://www.zeit.de/wissen/2010-06/Sonde-Hayabusa-Japan와 http://www.zeit.de/wissen/2010-06/sonde-hayabusa-rueckkehr를 따랐고, 하야부사의 착륙에 대한 설명은 위키백과의 하야부사 항목, http://en.wikipedia.org/wiki/Hayabusa, 소행성 이토카와에 대하여서는 http://en.wikipedia.org/wiki/25143_Itokawa를 참고했다. 또한 JAXA의 프레스 릴리즈 http://www.jaxa.jp/press/2010/06/20100614_hayabusa_e.html와 최종접근상황 http://hayabusa.jaxa.jp/e/index.html등을 참고하였다.

2010년 6월 13일 일요일

58년부터 82년까지 무슨 일이?

한국이 월드컵에 진출한 것이 54년에 한 번 있었고, 86년에 다시 월드컵 무대에 이르기까지 긴 공백이 있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늦게 태어난 나는 잘 몰랐는데,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인터넷을 좀 뒤졌다.

58년 월드컵 예선
58년 월드컵 지역예선(아시아·아프리카 통합)에 한국과 에티오피아는 FIFA가 엔트리를 거부했다. 이유는 찾지 못했다.

원래는 아시아에 1장이 배정되어 이스라엘이 진출하게 되었으나, 상대팀의 기권에만 기대어 올라 온 것이 규정위반이 되었다. 피파는 유럽의 웨일스와 이스라엘이 플레이오프를 하게 하여 그 승자가 월드컵에 진출하게 하였다. 웨일스가 홈·원정방식의 두 경기에서 모두 승리하여 아시아에서는 한 팀도 출전하지 못했다.

62년 월드컵 예선
아시아 예선의 승자는 유럽 팀과 대륙간 플레이오프를 하게 된다.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세 팀이 참여하였으나, 인도네시아는 기권하였다. 두 팀이 남은 상황에서 한국은 60년 11월 6일 서울에서 일본과 2:1로 이겼고, 61년 6월 11일 도쿄에서 2:0으로 승리하여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었다. 플레이오프의 상대는 유고슬라비아였다. 61년 10월 8일 베오그라드에서의 경기에서 유고슬라비아가 5:1로 이겼고, 같은해 11월 26일 서울에서 열린 경기에서 다시 유고슬라비아가 3:1로 승리를 거두어 한국의 월드컵 진출은 좌절되었다.

66년 월드컵 예선
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에 1장이 배정되었다.

아프리카 팀들은 경기장소에 대한 항의로 모두 기권했다.

아시아·호주에서는 남·북한 호주가 출전했는데, 한국은 경기장소가 일본에서 캄보디아로 변경되자 기권했다. 1965년 11월 21일과 24일 양일에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있었던 호주와 북한의 경기에서 북한은 차례로 6:1, 3:1로 승리하여 월드컵에 진출한다.

70년 월드컵 예선
아시아·오세아니아에 1장이 배정되었다.

1차전과 2차전 두 단계로 나누어졌다. 1차전에서는 한국·일본·북한·호주 중의 우승팀이 2차전에 올라간다. 2차전에서는 1차전에서 올라온 한 팀과 이스라엘, 뉴질랜드, 로디지아(지금의 짐바브웨)가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각 그룹의 승자가 최종 라운드에서 맞붙는다.

북한은 이스라엘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기권하여 1차전은 호주, 한국, 일본이 맞붙었다. 모두 여섯 경기가 열렸고, 장소는 모두 서울이었다. 1969년 10월 10일부터 20일 사이의 짝수날에 열린 여섯 경기에서 한국은 일본을 상대로 1승 1무, 호주를 상대로 1무 1패를 기록했다. 호주는 일본과 1승 1무, 한국과 1승 1무를 기록하여, 호주가 2차전에 진출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월드컵에 진출한다.

74년 월드컵 예선
아시아·오세아니아에 1장이 배정되었다.

룰이 복잡하다. 아시아·오세아니아가 A존과 B존으로 나누어서 경기를 치루었다. 모두 15개국이 출전하였다. A존은 7개 팀이 2개 조로 나누어져 조별리그를 통해 1·2위가 준결승에 올라간다. 준결승은 1조의 우승팀과 2조의 준우승팀, 1조의 준우승팀과 2조의 우승팀 경기, 이렇게 두번의 경기가 있고 각 경기의 승자끼리의 경기를 하여 승자가 상위 예선에 진출하게 된다. B조는 8개 팀이 2개 조로 나누어져 조별 리그를 진행하고, 각 조의 우승팀이 홈·원정 방식으로 승부를 겨루어 A조의 우승팀과 붙는다.

남한은 A존의 2조에 속하였다. A존의 경기는 1973년 5월동안 모두 서울에서 열렸다. 남한은 이스라엘과 함께 준결승에 올랐다. 5월 26일, 한국은 홍콩을 맞아 3:1로 승리하여 결승에 진출했다. 같은날 열린 일본과 이스라엘의 경기에서 이스라엘이 1:0으로 이겨 결승전에 진출하였다. 28일의 결승전에서 한국은 이스라엘을 1:0으로 이기고 A조의 우승팀이 된다.

북한은 B존 1조에 속하였는데, 1조에서는 이란이 B존 결승전에 진출한다. 2조에서는 호주가 진출하였고, 73년 8월 18일에 시드니에서 열린 결승 1차전에서 호주가 3:0으로 이란을 이기고, 24일에 시드니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호주가 0:2로 2점밖에 실점하지 않아 호주가 B존 우승팀으로 진출한다.

73년 10월 28일 시드니에서 열린 한국과 호주의 경기는 득점없이 무승부로 끝난다. 11월 10일 서울에서 열린 경기에서 양팀은 또다시 2:2 무승부를 기록한다. 11월 13일 중립지역인 홍콩에서 열린 경기에서 호주가 1:0으로 승리하면서, 한국의 월드컵 진출은 좌절된다.

78년 월드컵 예선
아시아·오세아니아에 1장이 배정된다.

21개 팀이 5개조로 나누어서 예선이 진행되고, 각 조의 승자가 다시 홈·원정 방식의 리그전을 하여 1개 팀이 진출하게 된다. 각 조마다 팀 수와 경기 조직방식이 조금씩 달랐다.

한국과 북한은 이스라엘, 일본과 함께 2조에 속했다. 북한이 기권했기 때문에 3개 팀만으로 리그가 진행되었다. 한국은 77년 2월 27일 텔아비브에서 이스라엘과 무득점 무승부를 기록한다. 3월 20일 서울에서 다시 맞붙은 경기에서는 3:1로 승리한다. 일본과는 3월 26일 도쿄에서 첫 경기를 가졌는데, 역시 무득점 무승부를 기록하고, 4월 3일 서울에서 열린 경기에서는 1:0으로 승리하여 최종 5개 팀 리그에 한국이 진출하게 된다.

최종 예선에는 홍콩, 한국, 이란, 쿠웨이트, 호주가 진출하였다. 77년 6월부터 12월까지 홈·원정 방식으로 진행된 리그에서 한국은 3승 4무 1패를 기록하여 6승 2무를 기록한 이란에 뒤져 월드컵 진출이 좌절된다.

82년 월드컵 예선
월드컵 티켓이 24장이 되었다. 아시아·오세아니아에는 2장이 배정되었다.

20개 팀이 4개 조로 나뉘어져 예선이 진행되었다. 각 조의 승자는 홈·원정 방식의 리그를 통해 순위가 매겨지며, 우승과 준우승팀이 월드컵에 진출한다.

조마다 경기조직방식이 조금씩 달랐다. 한국이 속한 3조에는 쿠웨이트, 말레이시아, 태국이 있었다. 3조는 모든 경기를 쿠웨이트에서 한번씩만 치르게 되어있었다. 리그는 81년 4월 21일부터 29일 사이에 있었으며 한국은 2승 1무를 기록해 3승을 기록한 쿠웨이트에 밀려 최종 예선에 탈락했다.

북한, 일본, 중국 등이 속한 4조는 3개 팀씩 A그룹과 B그룹으로 나누었다. A그룹에는 중국, 일본, 마카오 중에 중국과 일본이 진출하였고, B그룹에는 북한, 홍콩, 싱가포르 중에 북한과 홍콩이 진출하였다. 80년 12월 30일 홍콩에서 열린 준결승에서 일본과 북한이 맞붙어 북한이 1:0으로 승리하였고, 다음날 열린 중국과 홍콩의 경기는 무득점 무승부 끝에 승부차기에서 중국이 홍콩을 이겼다. 81년 1월 4일 열린 4조 결승전에서 북한은 아쉽게 중국에 4:2로 져서 중국이 최종 예선에 진출하게 된다.

최종예선에는 뉴질랜드,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중국이 진출하였다, 쿠웨이트는 리그 1위로 월드컵 진출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중국과 뉴질랜드는 승점과 골득실이 동률이 되었다. 81년 12월 27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경기에서 뉴질랜드가 2:1로 승리하면서 뉴질랜드가 월드컵에 진출한다. (리그가 종료되었을 때, 승수는 중국이 3승 뉴질랜드가 2승으로 중국이 앞섰다.)



점차 참여하는 팀의 수가 많아지고, 서술이 길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은 대부분의 경우 월드컵 진출 직전에 좌절하고 마는 경우가 좀 있었다. 북한은 이스라엘과 정말 사이가 나빴나보다.

58년에 피파는 왜 우리나라를 먹어주지 않았을까. 그 전에 너무 못해서 그런거였을까?

2010년 6월 6일 일요일

선진국은 투표율이 낮다

내가 국민학교 고학년 시기를 보내며 사춘기를 준비하고 있을 시기, 당시 내가 살던 지역 국민학생들의 사상계에는 “《먼나라 이웃나라》를 읽지 않은 자 함부로 똑똑한 척 씨불지 말지어다.”정도의 룰이 있었던 것 같다. 말 그대로다. 《먼나라 이웃나라》는 만화라지만 꽤 두꺼웠고, 글자도 작았다. 전체 분량의 절반 정도를 유럽 역사에 할애한 책이 당연히 쉬운 책일 수만은 없었다. 요거 읽고 나불나불 거리는 정도면, 그 내용을 이해하고 기억한다는 것만으로도 꽤 먹어줬었던 기억이 난다. “어, 임마 뭐 좀 아네”하면서.

어느덧 시간도 벌써 20년이, 쒯, 흘렀고, 늙은 유럽이라 하던 유럽도, 사람이 변하는데 가만히 있을 방도가 없다. 그 책이 역사를 제외한 나머지 반을 할애해 서술했던 많은 내용들이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독일은 통일 된지가 하 세월이고, 스위스는 더 이상 산중의 조용한 나라가 아니다. 프랑스의 자존심도, 영국의 똥폼도 이제는 그때와는 양상이 많이 다르다. 네덜란드사람이 외국어 잘한다는 거랑 이탈리아사람들이 개판이라는 것만 아직까지 유효한 듯 보인다. (이번 우에파 결승 때, 이탈리아 사람들이 줄을 잘 맞춰 서는 곳은 페널티킥 박스 앞 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 책이 사람들에게 심어준 대상에 대한 고정관념은 실체가 변하는 만큼 빨리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에는 독소라고 불려도 과장이 아닐 치명적인 오해도 있었다. “선진국은 투표율이 낮다”는 것이다. 선진국에서조차 보통선거가 정착된 것이 20세기 전반이었던 것을 되새겨보면, 1980년대에 저술된 이 책이 얼마나 최신의 경향을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참고로 지난 5월 9일 있었던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의원선거의 투표율은 59.3%였다. 대한민국의 17대 총선은 60.6%, 18대 총선은 46.1%였다. 선거 보도를 보면 투표율을 이야기를 참 많이 하는데, 거의 대부분은 시계열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반면 외국 사례와의 비교는 의외로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기자들이 알면서 보도를 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비교대상이 될 만한 외국은 다들 투표율이 낮을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미국의 투표율 밖에 알아내지 못해서 유럽은 스킵된 것일까?

각설하고, 나는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강하게 던져졌던 그 메시지 “선진국은 투표율이 낮다”가 대한민국의 낮은 투표율을 일정 부분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젊은 세대일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사람은 책잡힐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을 직시하는 것보다는, 합리화하는 방향을 선호한다. 잘못을 직시하는 것은 앞으로 내가 변해야 하고, 그 만큼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합리화하는 쪽은 자기는 가만히 있으면 된다. “선진국은 투표율이 낮다”는 기똥찬 합리화 이유를 대준다. 나는 편하고, 나라는 선진국이 되는 것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죽으나 사나 선진화 4만 불을 외치던 지난 대선의 투표율은 사상 최악이었다. 그래서 선진국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인과의 순서가 반대가 되었으니 그리 될 턱이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검찰수사로 고초를 겪고 있었을 때, 한 지인께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다. 검찰이 저렇게 수사를 하는 것은, “거 봐라, 저 새끼도 저렇게 썩었다니까. 니가 이명박 더러운 줄 알고 뽑은 거, 미안해 할 필요 없어.”라는 합리화 제공 팬서비스 차원도 좀 있다고. 뭐 나는 그 쪽 사람들의 맨탈리티에 대하여 거의 모르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얼마나 일반적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는 그걸 좀 더 넘어서, “비천하고 더러운 위선자 새끼다! 더 저주해라!”라는 선동에 가까워 보였지만 말이다.

사실대로 고백을 하자면, 《먼나라 이웃나라》를 읽은 다음에 사춘기를 넘기 전 같은 저자의 책을 두 권 더 읽었다. 《자본주의 공산주의》와 《한국 한국인 한국경제》였다. 중학교시절 나는 때늦은 반공소년이었다. 다행히 올바른 국사선생님께 국사를 배웠고, 또 집에 있던 또 다른 세계사학습만화(다행히 요거는 이교수가 그린 책이 아니었네요.)를 읽으면서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이번 대선에서는 김대중이 당선되어야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방패막이를 하자면, 중학교 때의 반공소년은 거의 컨셉이었다. “빨갱이 때려잡아 민주평화 이룩하자”라고 미친 척 내지르는, 딱 중2병. 그 두 책은, 특히 《자본주의 공산주의》는, 꽤 중립적이었다고 여겨진다. 원작이 다른 사람이어서 그럴 수도 있고, 혹은 작가 자신이 아직까지 이념적으로 경도되기 전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본주의 공산주의》에 나왔던, 1830년 영국 노동자의 평균 수명 28세, 일요일 없는 日14시간 노동이라는 서술, 이미 얼굴에 주름이 진 12세의 소년 노동자의 초상은, 단지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기를 바라는 부질없는 마음 밖에는 일으키지 않았다. 지금의 이교수라면, 아마 그 장면, 편집했을 것 같다.

나는 운이 좋았던 사람이다. 사춘기 이후에도 배울 수 있었고, 대학에 가서도 또 한 번 더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하지 못한 채 나에게 강요 내지 주입되었던 사고의 틀들을 반성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만약 내가 부산을 벗어나지 못했다면, 지금과 같이 맹렬히 여당을 비판할만큼 성숙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또는 2010년 6월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사춘기 시절에 더 이상 배울 수 없게되었다면, 아마 몸은 막노동 일을 하면서, 입으로는 주둥이만 산 좌파놈들 혹은 전라디언 개새끼들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며 아름다운 욕들을 민주당에 퍼붓고 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난 반공소년이었으니까. 사춘기때 공부를 멈추게 되는 것, 친구 잘못 만나면 한 방이다. 결코 어렵거나 운이 나빠서 그렇다고 볼 수만은 없다.

선진국이 투표율이 낮다는 주장을 언제부터 완전히 기각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1997년에 의심이 시작되었고, 2002년에 완전히 기각하게 되었다는 점은 확실하다. 하지만 똑 같은 것을 보아온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이번 선거를 기화로 해서, 저런 어처구니 없는 자기합리화가 배척당하는 흐름이 생겨난 것 아닐까? 그래도 55%는 아직 높지는 않다. 어느 기사에서 읽었던 것처럼 “예전에는 정치에 무관심한 걸 쿨하다고 여겼는데, 요새 들어서는 개념없다 쪽으로 바뀐것 같아요.”라는 흐름이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한국의 낮은 투표율에는 《먼나라 이웃나라》가 기여했을지 모른다. 2000년대 학생운동의 소멸 및 대학생문화 막장화의 배후에 《남자 셋, 여자 셋》이 서있을지도 모르는 것처럼.

2010년 6월 3일 목요일

지키고 싶다.

1.

유시민과 한명숙을 지키고 싶다.

71년의 辛勝, 72년의 維新.

그리고 김대중.

같은가, 혹은 다른가.


2.

부산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이 강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생각이 떠올랐다.

민주당, 정말 이겼다고 생각하는가?


3.

서울.

씨비매스는 좋은 그룹이다.




자, 이제 또 누구를 드시겠습니까?



잠시 후에 추가.

아마 앞으로 내가 PD계열에 투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 적어도 지금 기분은 그렇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씩 벽을 쌓다가 결국 그들도 طالب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생각하니, 스스로 두려워진다.

2010년 6월 1일 화요일

읭?

텍스트큐브의 공지를 꼼꼼하게 읽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공지를 읽고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돼서 댓글을 참조했다. 아, 통합된다는게 그런 뜻이었구나, 그렇다면 엿된거네.

티스토리는 초대장 달라고 사정해야된다면서? 그리고 검열도 한다면서?

블로거는 구리다며?

나머지는 잘 몰라.. 은둔형 미니홈피로 백?

음. 심란해졌다. 뭐가 not to be evil이라는 건지.
이런식이라면 “not to be evil의 대상은 전역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밖엔 없다.



어쨌든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기 전에 대처를 해야 할 듯하다.